각하. 중대한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으로부터 반년전, 수십년에 걸친 외성인 통치가 끝났습니다. 외성인(外星人)들은 아무 조짐도 없이 별안간 우리를 지배하길 포기하였습니다. 각하와 같은 '현지' 대표자들에게 총독부의 모든 권한을 이양하고, 한 사람도 예외없이 우주선에 올라 행성 궤도 바깥으로 철수하였습니다.
갑작스러운 해방에 모두가 당혹스러워 했지만 곧 진실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머잖아 행성 전역에 걸쳐 침략자들의 흔적을 걷어내고 예전의 세상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시기였죠. 저도 열정적인 자세로 제 일에 임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우리 손에 남겨진 것을 파악하기 위한 전국적인 실태 조사가 오늘부로 완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모두 국토부에서 검증을 거친 분명한 사실입니다. 더이상 우리는 예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수십년에 걸친 과도한 지력 소모로 인해 행성 지표의 작물생산력은 한계에 도달하였고, 온대 기후대의 상당 면적은 오래전에 그 무엇도 길러낼 수 없는 건조한 황무지로 전락하였습니다.
예상되는 다음 분기의 곡물 산출량은 통치 기간 동안 과밀화된 인구를 먹여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며, 그마저도 갈수록 줄어들 것입니다. 우리의 조사자들은 가능한 모든 긴축안을 동원한다 하여도 현재 인구대로는 10년 이내에 확정적인 파멸이 찾아올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원조사 결과 외성인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유정과 광산을 고갈시켰음이 드러났습니다. 아직 각지에 비축분이 남아있지만, 그마저도 수 년 뒤에는 완전히 고갈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발전소의 운영도, 통신 인프라의 유지 보수도 불가능해질지 모르겠군요.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행정적 역량까지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통합 정부가 무너지면 각 지방은 얼마 남지 않은 자원을 두고 내분과 굶주림으로 천천히 말라갈 것이고, 종국에는 죽은 행성만 남을테지요.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 해코지도 하지 않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끝맺음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었을 뿐입니다. 미래를 내다보지 않은 농경으로 육지 절반이 황폐화되건, 부양 가능한 한도 이상으로 노동 인구가 늘어나건, 모든 산업의 동력이 멈춰버리건, 과실만 취하고 떠나면 그만인 자들에게 이 땅의 후일을 고민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각하께서도 지금쯤 이토록 중대한 보고를 저 혼자 구두로 전달하는 이유에 대해 짐작하셨겠지요. 이미 국토부의 다른 관료들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저도 이 보고를 마치는대로 그들을 뒤따를 작정입니다.
그러니 저한테 해결책을 묻지 마십시오. 오래 가지 못할 연명을 위한 대학살이건, 존엄한 끝을 위한 자살이건, 부디 각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제 떠나면 그만인 제게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