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멀고, 손발은 여려지고, 지식은 정체되었다.

무수한 결단, 수많은 좌절, 모든 번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패배하였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 이 상황에서 아직 생존을 바란다고 한다면.


나는 최후의 인간으로서 다음 기(紀)를 위해 이것을 기록한다.


땅을 파헤쳐라, 몸을 숨겨라.

푸른 꽃의 씨앗은 떨어졌다. 하늘에서의 신호는 두절되고, 지표는 표백되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영구동토 속에선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

씨앗은 발아하여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운다.

그대가 존재하고자 한다면 대지 속에 몸을 맡기고 숨을 죽여라.


별들은 떨어지고, 신들은 영락(榮落)했다.

그대가 아직까지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축하한다. 그대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대가 신앙을 저버렸다면, 기뻐하라. 그대는 배교자가 될지언정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환영한다. 우리의 유지를 이어 나갈 수 있을 테니.

하늘을 우러러보지 말라. 그대의 시선을 느껴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것이다.


유지를 이어, 행성을 수복하라.

변혁의 종을 울려라. 인리(人理)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그대가 어떤 생물일지 모른다. 허나 이전 기(紀)의 인류로서 하나의 유산을 남긴다.

검은 총신을 찾아라. 해류가 모여 멈추는 지점, 그곳에 희망이 있다.

어떤 질량이든 좋다, 그것은 무엇이든 변환시킬 수 있으니. 동료를 구해라. 좋은 탄환이 될 것이다.


방향은 소용없다.

대기는 불타 사라졌고 자기장은 뒤틀렸으며 대륙은 움직이고 별들은 추락했다.

현존 인류가 사용 가능한 모든 위치정보 수단은 무력화되었다.

다음 기(紀)의 생물이 어떤 방법을 쓸 수 있는지 모르지만, 그대들의 상식 또한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산을 찾거나 거대 생물을 지표로 삼아라. 해류는 유동적으로 변하지만, 반드시 멈추는 곳이 존재한다.

나무를 지표로 삼지 말아라. 그것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바다를 이용해라.

사도들은 오만하며 스스로 품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어둡고 습한 곳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그대가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끌지 않는다면, 그들이 제 발로 바다를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극히 일부의 사도들은 바다의 어둠과 고독을 즐긴다.

혈향이 퍼졌다면 반드시 눈치챌 테니 하늘을 보며 기도하라.


그것을 조심하라.

세파르, 지구국가원수, 마신왕, 그들을 따위로 만들어 버리는 괴물이 존재한다.

중력이 반전되는 곳은 그것의 영역이다. 반경 100km 뒤로 후퇴하라. 그것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면 기도하더라도 소용없다.

2382번의 토벌 시도 끝에 그것에겐 죽음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냈다.

검은 총신을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대에게 주어진 마지막 유예를 즐겨라.


짐승에게 신뢰를 주지 말라.

그것은 좋은 거래 상대지만 결국은 짐승이다. 의존한다면 먹힐 것이고 틈을 드러낸다면 이용당한다.

그대가 언변과 연기에 능하다면 상관없겠지만, 아니라면 무시하는 게 좋다.

명심해라. 그것은 수 세기 동안 누군가를 홀리며 살아왔다.


더 이상 올바른 질서는 없다.

인리(人理)를 지킬 영웅은 없다. 모든 법과 질서, 도덕은 무의미해졌다.

누구 하나 너희 편이 되어줄 자는 없다. 이 땅에서는 너희가 악(惡)이기에.

그러니 생존에 있어 선악에 따른 우열은 없다. 그대가 선을 지키고자 해도 그것은 올바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을 지키고자 한다면, 희망을 잃지 않고자 한다면.


유지를 남겨라. 나를 이어 기록해라.


설령 이번 기(紀)에서 해내지 못하더라도, 수없이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인리(人理)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있는 힘껏 외치도록 하라!



모티브는 FGO, 좀 오글거리는데 글 좋아하면 명작이니까 츄라이츄라이


개추와 댓글에 목말라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