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사실대로 털어놓을 준비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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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탁에 앉아 밥을 한 술 뜬다.기름진 김에 감싸진 녹말이 침에 녹아 단맛을 낸다.맛있다.


콩나물시루같은 통근 버스에 몸을 싣고선,누가 책가방에 넣어논 전공책을 채가지나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낡고 허름한 우리 집.미군에서 흘러나온 루핑지로 만든 우리 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하지만 나의 눈엔 정겹고 아름답다.


"맛있지?" 어머니가 묻는다.

"네." 내가 답한다.나는 웃으며 김치에 젓가락을 올린다.


"그래,요즘 그 사회학 공부라는 건 잘 되어 가냐?" 아버지가 묻는다.

"예.그럭저럭 잘 되어 갑니다. 최근에 제출한 과제에 대해선 교수님이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근데 이 두툼한 건 도대체 뭐라니?"어머니는 밥을 먹다 말고 가방에서 내 전공책을 꺼내 든다.

"저게 그 전공책이에요 어머니.저것 때문에 요즘 미치겠습니다." 나의 말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다.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미역국에 수저를 크게 찔러 넣는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그 교수라는 놈도 미쳤어. 이것들을 도대체 어디다 숨겨놓는단 말이냐?"

"근데 누나랑 진평이는요?설마 잔업 중이에요?또?"

"얘야.이럴 필요까진 없잖니.그 사상이란 것이 얼마나 중한지 몰라도 네 애미보다..." 어머니는 김치를 집다 말고 한숨을 푹 쉬신다.

"대체 그놈의 평화공장이란 데는 잔업 없으면 안 굴러간답니까? 보니까 현장도 열악하던데. 그런 데서 10시간 넘게 일하면 당장 죽어도 안 이상하겠어요."

"니가 정말 우리를 결딴낼 셈이구나.사람은 때로 거절도 할 줄 알아야 사람인 거야."

"아무리 늦어도 12시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겠어요.저기 아랫목에 누나랑 진평이 몫으로 밥이랑 미역국 좀 올려둬요.저는 미리 정류장 쪽에 마중나가 있을 테니."

"...여보.부엌 천장에 루핑지 좀 뜯어봐." 어머니는 마지막 한 톨까지 닥닥 긁어 먹는다.

"자네까지 왜 그래?" 아버지는 냄비에서 미역국을 꺼내 아랫목에 올려놓는다. 집안 전체와 비교했을 때 덜 추운 정도지만 그냥 냅두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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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정말 잘 해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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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소요 사태 때문인지 군대가 학교를 점거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하지만 뜬소문은 뜬소문일 뿐. 나는 그런 것에 관심조차 없다. 누나와 동생과 부모님의 피와 땀을 빨아 공부하는 나로선 데모니 뭐니 하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진다.


사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던지 말던지 학교는 축제 준비로 바쁘고,나는 김형을 만났다.


"그 팜플렛들은 어찌했지?"선배님이 반갑게 인사한다.

"아시잖습니까.제 집안 사정이... 저 요즘은 굶고 다닙니다.하하."

"곧 있으면 장마가 올 거야.그 팜플렛들이 젖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나?"

"아유.그럴 필요까지야...저 사실 술도 잘 못해요."

"좋아.동지가 그렇게까지 보증한다니 믿어줄만 하지."

"저 정말 괜찮다니깐요 김형.제 집이 못 사는건 사실인데요 뭐.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자보 말인가? 그건 잘 준비되고 있네.문장 몇 개만 더 손보면 탈고도 마무리 될 참이야. 그리고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동지들끼리 말이 많아서 말인데..."

"적당히 전만 부치죠 뭐.요리도 안해본 사람들끼리 더한 거 도전했다가는 사고나요.사고."

"학우들이여!... 그래.아무래도 그게 가장 무난하지.의견 고맙네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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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사실이야.네가 말했잖아.이제 와 부정하려 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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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야 집에서 자면 된다지만 점심도 집에서 먹을 순 없는 노릇이다. 맛과 돈 사이에서 늘 갈등이 오간다. 부모님과 형제자매의 기름 묻은 돈으로 고학하는 내 입장에선 허름한 백반집도 들어가기 부담스럽다.

결국 내 선택은 포장마차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곳에선 어묵,군참새 따위의 군것질거리들을 팔고 있다.

정신없이 어묵 국물부터 들이키려던 찰나 친구가 포장마차 안으로 뛰어들어와 날 끌어낸다.



"교련 반대 투쟁 관련 여론 조성은 제대로 된 것 같아.동지.
교수님이 말씀하셨듯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자주민족통일의 시금석인 거겠지."그는 내 어깨를 잡아끈다.


"아니.됐다니까.내가 더 얻어먹을까봐.나도 염치라는 게 있어 인마."


"전적으로 내 덕분이라니.칭찬은 고맙지만 결국 이 모든건 우리 조직을 지휘하는 수령님 덕분이겠지.난 그렇게 생각해."


"어묵이나 백반이나 배에 들어가면 거기서 거기야.나 정말 괜찮다니깐?"


"민중봉기의 날이 머지 않았어.너희 부모님도 미제의 찌꺼기로 만들어진 집에서 벗어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지."


"알겠어.알겠다구.갈 때 가더라도 이 어묵만 좀."


"그나저나 교수님이 널 부르셔. 보나마나 VIP에게 물건을 전달하려는 거겠지.난 너무 많이 노출돼서 지금쯤 물망에 올랐을지도 몰라."


"내가 돈이 없어서 안 가는줄 아나.어묵이 내 식성엔 더 맞다고.못 믿냐?"


"걱정하진 마. 민중봉기와 조국통일을 위해서라도 이 일은 필수적이야. 혁명의 그날에 살아서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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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했어.자네는 내가 책임지고 잘 말씀드려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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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밤이 되면 외려 더 시끄러워지기 때문에 나는 막차가 끊기기 전까진 최대한 도서관에 있으려 한다.

하지만 이제는 도서관에서 공부도 못 하게 됐다.그놈의 데모 때문에 결국 우리 대학교를 비롯한 주요 대학교 운동장에 군대가 진을 치고 있다.

허리에 단단히 받친 M16소총의 번뜩이는 총신을 볼 때마다 오금이 저린다.하여간 서울 도련님들. 그까짓 교련 눈 딱 감고 하면 되지 뭐가 그리 싫다고.

집에 돌아와서 공부를 계속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땐 대체 어떻게 공부를 했나 싶을 정도다.

시험을 다 치고 며칠 후 교수님이 나를 따로 부르셨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는 문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나는 조심스레 문을 닫는다.


"이미 이상헌 군 편으로 언질을 보냈으니 자네도 자네의 임무를 잘 알리라고 믿네."


"네?그럼 뭐 때문에 부르신..."


"이게 그 물건일세.그쪽과 접신해서 받아온 것이지. 살펴봐도 좋네.열지만 않으면 돼."


"저...정말입니까?"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별 거 없네. 이상헌이,서혁준이,모두 쁘띠부르주아들이지.
부끄럽지만 나도 마찬가지고. 진정한 프톨레타리아인 자네야말로 이 임무의 진정성을 잘 이해하리라고 생각했네."


"아뇨.아니 근데, 제가 이렇게 잘 맞았을 줄은..."


"간단한 일이야. 오후 두 시 경에 OO동에 있는 파란 지붕 집에 들리시게.문을 세 번 두드리고 '교수님 심부름입니다.'하면 아무 말 않고 가져갈 거야."


"감사합니다!교수님.열심히 하겠습니다!"


"내일이면 학교 주요 통로에 대자보가 붙을 거고 대대적인 봉기가 시작될 걸세. 진정한 민중봉기가 곧 개시될 것이고 혁명도 꿈이 아니게 되네.내일 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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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어.좀 배고프지 않나?내가 설렁탕 좀 챙겨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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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전체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린다. 대단한 놈들이다.그에 비하면 나는...배신자에 불과하지.


모든 것은 각본대로다. 모든 것이 그와 그분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내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며칠을 더 버텼더라도 결국엔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혼자다.그놈은 지금 없다. 그놈이 돌아온다면 나는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게 될지 모른다.
빨리 내 입을 걸어잠궈야 한다...


방 한쪽에서 난로가 가물가물 타고 있다.그 옆에는 연료탱크가 보인다. 나는 바닥을 기어 연료탱크 쪽으로 가 마개를 따고 온몸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라이터를 찾을 필요조차 없었다.적당히 가까이 가자 난롯불이 알아서 옮겨붙었다.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아보려 했으나 불이 얼굴에 옮겨붙자 어,어 하는 신음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저 멀리서 그놈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불덩어리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다.


절박한 공포감은 이내 안도감으로 바뀐다.


그들은 나를 잡을 수 없다.


모든 것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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