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이며 사성시 시리즈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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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선 신입 선원 수칙서


일등 항해사로서 신입 선원에게 몇 가지 수칙을 전달합니다.
본 선은 8,600TEU급 컨테이너선입니다. 쉽게 말해 8천 6백 개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배라는 뜻이죠.
이 배의 승조원은 늘 24명이었으나 당신이 타게 되어 25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정원 외의 꼼수로 들어온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기왕 신분 세탁을 한 만큼 성실하게 일하고 평소 언행에도 주의하십시오.

이곳은 B106호 실 당신의 방입니다. 이 배는 1층부터 A로 시작하여 G 층까지 있으며 그 위에는 브릿지입니다.
그러니 이 숙소는 2층인 거죠. 여기 평범한 침대와 소파, 그리고 책상과 의자가 있습니다.
개인 화장실과 별도의 붙박이장도 있으니, 물건을 넣어두고 귀중품은 그 안에 있는 금고에 보관하십시오.
방, 화장실 청소와 빨래는 스스로 해야 합니다.

아래의 허락된 몇몇 공간 외에 다른 승조원의 방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설령 초대받은 기분이 들거나, 안에서 누가 부르는 느낌이 들더라도 절대 들어가지 마십시오. 특히 기관실은 내려가지도 접근해서도 안 됩니다.
실종되면 영원히 이 바다를 떠돌게 됩니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죠.

1. 갑판 작업 시 반드시 형광색 안전모와 조끼를 착용하십시오.
이때 안쪽에 부적이 각각 온전히 붙어있는지 철저히 확인해야 합니다. 훼손되었으면 즉시 폐기하고 다른 것을 착용합니다.
작업 중 잠시 바다를 둘러보는 것은 문제없으나, 근처에 붉게 녹슬고 낡은 배가 접근하면 고개를 숙이고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보지 마십시오.
그것에 홀리듯 바다로 뛰어내린 선원이 많았습니다.

2. 기상이 좋지 않거나 해가 진 후에는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그런 상황에서 갑판 작업을 지시하지 않으며, 친숙하게 느껴지는 동료 선원 등이 권유하더라도 따라 나가서는 안 됩니다.
홀로 나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선원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3. 식당(D101호) – 탑승한 선원들의 국적을 고려해 다양한 식단이 나옵니다. 아침 7시, 정오, 저녁 5시 30분에 딱 한 시간만 문을 엽니다.
차라리 한 끼 굶을지언정 절대로 시간을 어기지 마십시오. 질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었으니,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주방장에게 불평불만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재료가 될 수 있으니까요.

4. 선원 휴게실(D103호) – 식당 옆에 있습니다. 말 그대로 휴게실이죠. 대형 TV가 있고 각종 DVD와 노래방 등 즐길 거리가 많습니다.
작업을 마치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밤 10시 이후로는 들어가지 마십시오.
특히 노래방 기계 사용 시 전 세계의 최신곡이 준비되어 있으나, 슬픔, 이별, 죽음에 관련된 노래는 절대로 부르지 마십시오.
그들을 배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5. 체력 단련실 & 사우나(C104호) – 장기간의 항해에서 건강 관리는 필수입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십시오.
작업 중에 계속 들러붙고 쌓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털어내고 몸에서 뽑아내기 위해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다소 과격하게 운동하고 많은 땀을 낼 것을 권장합니다. 당신의 방 화장실에 있는 샤워기로는 부족합니다. 이 수칙을 무시했던 선원들은 어김없이 그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6. 선장실(G101호) – 선장님이 사용하시는 이 방은 브릿지 바로 아래층에 있습니다. 이 배에서 가장 넓고 크며 집무실까지 갖춰져 있죠.
하지만 당신이 들어갈 일도 없고, 들어가서도 안 됩니다. 그는 오랜 추억에 사로잡혀 당신을 채용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질 것이지만, 오직 목적지까지 만입니다. 그 밖에 일로 그와 접촉하여 추가적인 부탁을 하려 한다면 검붉은 바다로 던져질 것입니다.
이미 당신은 그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습니다.

7. 브릿지 – 조타실이라고 하지요. 이 배의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최첨단 항해 통합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당신 같은 하급 갑판원이 함부로 와서는 안 되며 설령 당신을 호출한다고 해도 오지 마십시오.
그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당신에게 허락된 공간이 아닙니다. 그곳에 올라오는 즉시 당신의 항해는 끝납니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8. 수영장 – 선상 구석에 수영장이 있습니다만, 주로 훈련의 용도로 쓰입니다.
매달 14일에는 반드시 부력복과 헬멧을 쓰고 훈련을 받으십시오.
1년에 한, 두 번 비정기적으로 비상벨이 울리면 잠시 함에서 떠나있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함이니 훈련에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9. 와이파이 – 핸드폰이나 개인용 단말기로 인터넷 이용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래픽을 차단한 텍스트 서비스만을 제공합니다.
사용료가 비싼 위성 수신이니 데이터를 아끼기 위함이기는 합니다만, 가끔 이상한 영상이 떠서 정신 장애를 주는 것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의미 없는 텍스트가 떠도 즉시 화면을 끄고 한 시간 동안 사용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당신이 신분을 세탁하기 전 자주 가던 사이트에서 과거 아이디로 접속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지요?

10. 내부 컨테이너실과 외부 컨테이너 – 들어가지도, 근처에 가지도 마십시오.
애절한 흐느낌,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등 다양하고 수많은 목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그 소리에 홀리듯 다가가서 컨테이너를 열었다가는 당신도 그들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11. 기항지 – 배가 보급을 받을 때 잠시 내려 육지를 구경하며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출항시간까지 승선하지 않으면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이후 완전히 하선한 것으로 취급하여 모든 짐이 바다로 던져질 것이며 그 어떤 배에도 다시는 승선할 수 없습니다. 정 그곳이 마음에 들어 긴 항해를 영영 끝내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다만 그곳은 당신의 생각만큼 좋은 곳이 아닐 확률이 높으며, 실제 살아있는 사람도 없으니 신중하게 결정하십시오.

이상입니다.


약 다섯 달의 시간이 흐른 후,
어랏?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좀 피곤해 보여도 그럭저럭 잘 버텨온 것 같습니다?
아! 궁금한 점이 많군요? 어차피 금방 잊을 테지만 이렇게 만난 김에 다 말해드리죠.

저 검붉은 바다의 이름은 스틱스입니다. 이승과 저승을 이어줍니다.
왜 사공이 있는 작은 배와 강이 아니냐고요? 그것은 인구가 천만 명도 되지 않았던 고대에나 그랬죠.
지금 같은 80억 인구와 대량 살상의 시대에는 하루에 1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낙태와 유산까지 포함하면 매일 30만의 영혼을 운송해야 합니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커진 물동량을 충족시키려면 이런 대형 수송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죠.
이런 배가 한 대만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모든 배의 선장은 카론이죠. 그는 이니까요.

네, 맞습니다. 이 배에 가득 실린 컨테이너에는 저승으로 가는 영혼들이 잔뜩 들어있어요.
왜 짐짝같이 실려 가냐고요? 착하게 살아온 사람의 영혼은 유람선을 타고 편히 가고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당신이오? 벌써 과거가 기억나지 않나요? 내가 알기로는 그다지 바람직한 인생을 살지 않았어요.
조만간 죽을 것을 알고 편법을 써서 이 배에 탔잖아요. 그것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요?
좋아요. 이건 정말 특이한 케이스라 나도 놀란 일이니 마저 말해주죠.

당신은 고대 그리스 신화 카론의 배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평생 더러운 수법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재력을 동원해 그리스 시대의 동전 '오볼로스'를 사들였죠.
네,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망자들이 저승으로 갈 때 바치던 그것 맞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주술사와 제물을 투입한 끝에 카론을 소환하여 그 동전들을 바치는 데 성공한 겁니다.

저승의 신 카론은 괴팍하고 냉정한 늙은이로 묘사되지만, 아름다운 연주에 감동하기도 하는 등 인간적인 면도 있어요.
당신은 그런 그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해 저승길 노잣돈을 대량으로 바쳤고, 그렇게 이 배의 임시 선원이 된 겁니다.
수명이 다한 당신을 끌고 가려는 저승사자들의 눈을 피해 이 배에 탄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죠.
하지만 이 배의 종착지도 저승이기 때문에 승선 후 6개월 이내에 어디든 내려야 할 것입니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속도를 봐서 다음에 나를 만나더라도 이런 질문을 다시 할 확률은 없어 보이네요.
기항지 중 마음에 드는 곳에 내려 그 지역에서 유령으로 떠돌던지 이 배의 정식 선원이 되어 나같이 영원히 항해하십시오.
혹시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있다면 저승까지 가서 죄를 자백하고 벌을 받고요. 그러면 다음 생을 허락받을지도 모르죠.

더 궁금한거 없죠? 이건 잊지마세요. 이제 당신에게 29일 정도 남았습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