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미정
· 수산시장의 카나리아




정식 명칭은 “PGU – 1” 이지만

아는 직원들끼리는 전부 세이브” 라고 부른다.

 

크기와 길이는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

평범한 감기약과 별 다를 바 없는 붉은 연질 캡슐.

굳이 물과 함께 넘기지 않아도 부드럽게 넘어가며

단독으로 섭취시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다.

 

“PUG – 2”

직원들끼리는 로드” 라고 불리우는 약을 삼켜야

세이브 역시 그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세이브와 로드,

두 별명이 약효에서 유래했다는 걸 알 수 있겠지.

 

세이브,

빨간 캡슐을 먹으면 복용한 순간이 뇌에 기록되고

 

로드,

파란 캡슐을 먹으면뇌의 기억이 마지막으로

세이브를 복용한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모두가 접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모든 직원이 입사와 함께 알약 케이스를 지급받지만

그곳을 채우는 품목은 단 두 가지진정제와 극독이니까.

 

이유를 생각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겠지.

그 어떤 부작용도 없이 뇌의 기억각종 정신오염이며

트라우마를 깔끔하게 지워 없애는 약이 값쌀 순 없을 테니.

 

능력을 입증하지 못한 신참.

기껏 로드를 먹여 봤자 어차피 머잖아 똑같아질’ 녀석에게

애먼 자본을 투자하는 것보다그냥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새로운 직원을 갖다 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 이거다.

 

내가 처음 세이브와 로드의 존재를 안 것은

지금부터 3년 전이었다.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한쪽 다리의 근신경.

해고혹은 처분을 당하겠지라고 생각한 내게 내밀어진 것은

스무 개의 세이브와 한 개의 로드였다.

 

로드에 비하면 세이브 자체는 값싼 듯했다.

하기야 뇌에 밑줄을 긋는 기능과밑줄 아래 모든 내용을

깔끔하게 지워 없애는 기능 중 뭐가 더 어렵겠는가.

 

내 경우 1년에 하나의 로드를 지급받았다.

세이브의 경우 윗선에 요청하는 대로 박스가 온다.

 

세이브의 양은 거의 무제한이었음에도 불구

윗선에선 우리에게 세이브의 복용을 강제하진 않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실질적인 필요보다는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춘 직원들에 대한 복지의 개념이니.

 

근무를 나가는 날과나가지 않는 날을 가리지 않고

세 시간의 반의 간격으로 세이브를 복용하는 것이 내 루틴이었다.

 

근무 중이 아니라면 세이브를 복용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글쎄우리가 담당하는 일들의 희생자들이 근무 중이 아니라서

그 꼴을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세이브를 복용했다.

 

일어난 직후간단한 커피 한 잔과 샤워.

시계가 오전 10시 30분을 가리킬 때

나는 웃옷에서 케이스를 꺼내어 열었다.

 

두 개의 진정제와한 개의 극독.

다섯 개의 세이브와한 개의 로드.

 

그 중 한 개의 세이브를 집어들어 입 안에 넣고 삼킨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인 순간 나는 다른 곳에 있었다.

 

“.........!”

 

내 시선이 고정된 곳은 여전히 알약 케이스였다.

한 손에 들린 채 열린 알약 케이스에 있는 것은

 

두 개의 진정제와한 개의 극독.

네 개의 세이브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로드.

 

나는 거의 발작적으로 고개를 돌려 내가 있는 장소를 확인했다.

보통 로드를 먹고 되돌아온 기억으로 깨어나는’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회사의 구급 호송차혹은 의무실 안.

 

하지만 그곳은 의류 시설도회사도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는 적당히 가격대 있는 일식집의 2인 룸.

 

나는 탁자에 앉아 있었으며이미 식사를 끝마친 후인 것인지

입 안과 방 안에는 약간의 비린 향이눈 앞에는 후식인 듯한

녹차 아이스크림이 작게 한 스쿱.

 

내 맞은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탁자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이 놓여 있었으나

그 자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룸의 문을 열어젖히며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날짜는 세이브를 먹은 당일시간은 1시 23.

아직 점심시간이라 다소 붐비는 일식집의 홀이었고

점원이 내 뒤를 지나가며 옷자락을 스칠 때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는 번호를 눌렀다.

 

회사의 자동 응답기가 번호를 받아

오직 세상에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는 특정한 숫자를 말한다.

 

그제야 등을 타고 흐르는 땀의 감각이 느껴졌다.

 

이곳은 전화가 통하는 공간이었다.

로드로 인해 뇌의 기억도 초기화되었을 테니애초 오늘 아침부터

모든 것이 환상이 아닌 한 난 현실, ‘우리 세계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로드를 복용했단 말인가.

 

아마도 해답은 나와 같이 마주앉아 식사하는 이에게 있을 것이다.

오늘의 나에게는 점심 약속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어쩌면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이 식당까지 불렀고

그와의 대화 도중 나는 무언가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로드를 복용했다.

 

하지만 어째서?

나는 지금까지 두 번 로드를 복용한 경험이 있었다.

당연히 둘 모두 ’ 도중이었으며

회사 규칙상 내가 로드를 복용한 일에 대해 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말하면

나는 나 자신이, ‘로드를 복용하지 않고 견딘’ 경우를 안다.

 

나라는 인간 자체를 망가트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깊게 남은 기억들.

 

그런 기억들보다도 끔찍한 무언가가

현실에서의, ‘식사 중의 대화에 나왔다는 말일까.

 

나는 다시 룸으로 되돌아가 문을 열었다.

 

전화 받고 오셨어요혹시 일?”

아뇨친구 전화네요오늘 저녁 시간 되냐고....”

 

적어도 내 생깍엔연기는 거의 완벽했다.

거의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있는 자리로 되돌아가 앉은 다음

나는 상대방을 마주보았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갑작스럽게 연락드렸는데 와 주시고....”

 

그녀는 회사 사람이 .

올해로 도합 9년을 회사에 근무했으며공식적으로는

다음 주에 퇴직을 하고실질적으론 어제 근무가 끝난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우리가 그 정도의 사이라는 것이 제일 놀라운 점이겠지.

같은 집단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속한 그룹이 다르다.

기껏해야 휴게 공간이나 복도에서 엇갈리며 인사를 나누고

직장 내의 다른 소식에 섞인 근황을 듣는 정도.

 

솔직히... 진지하게 들어 주실 거라고는 기대 안 했거든요.”

 

실적도그 이상으로 인망도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녀가 속한 팀의 직원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녀의 무사 퇴직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눈물 흘릴 정도로.

 

그래도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씨라면...

저희가 비록 교류가 잦았던 사이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제 입장을

이해해주실지 모른다고... 이 일 하다 보면 감만 늘잖아요.”

대개 쓸모없는 감만이지만요.”

그렇죠.”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듯이.

 

그럼먼저 일어나 볼게요.”

커피라도 한 잔 드시지 않고....”

아뇨이미 귀한 시간을 충분히 뺏어 버린 걸요.”

 

그녀가 나간 후.

나는 한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조금 더 잡아서 시간을 끌었어야만 했나?

그러지 못한 건 솔직히 겁에 질려서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로드를 먹을 만한 정신적인 충격이

이번에는 로드가 없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심지어 로드를 먹기 전의 나는십 분조차 기다리지 못했다.

그녀와의 시간이 거의 막바지였음에도 그조차 인내하지 못하고

그녀가 자리를 비운 것을 틈타 로드를 집어삼킨 것이다.

 

하다못해 상황을 이어받을 내게어떤 단서라도....

 

문득 생각이 미쳐나는 핸드폰을 켰다.

화면 하단부를 누르자 현재 기기에서 작동 중인 앱의 목록이 떴고

그 중 녹음기가 켜져 있었다.

 

녹음 개시 시간은 지금부터 한 시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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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혹은 집에 돌아간 다음

혼자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녹음기를 키는 병신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회사로 출근했고

윗선에 오늘 있었던 일을 정리한 보고서와 핸드폰을 제출했다.

 

회사는 나를 곧바로 격리실에 구금했다.

사흘 동안 굳게 닫혀 있던 격리실의 문을 연 것은과장이었다.

 

고생했어.”

 

내 어깨를 두드리며 과장은 알약 케이스를 내밀었다.

 

일 주일 동안 유급 휴가야제주도라도 가서 쉬다 오라고.”

 

알약 케이스를 열어 보니 로드가 있었다.

그것도 세 개나.

어째서냐고 과장에게 물으려 했지만입이 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몸값이 올라갔다고 생각해.

이번 일자네 대처에 윗분들께서 아주 만족하셨거든칭찬이 많아.”

 

질문은 거기서 끝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이후로 그녀의 근황을 따로 조사한다던가 하진 않았다.

다만 귀를 열고 흘러들어오는 소식을 기다렸지만

회사를 그만둔 그녀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것은 그녀가 속했던 팀의 근황이었다.

팀원 전원이 ■■■ ■■된 가운데신입 직원 한 명만이

퇴사 처리 후 정신병동에 입원했다고 한다.

 

내 로드를 나누어주고 싶지만

그가 세이브를 하지 않은 이상, 의미없는 일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