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 타닥. 타다닥.
창문가를 거세게 두드리는 빗소리에 벤자민은 책상에 놓인 편지에서 눈을 돌려 잠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작은 촛불빛에 맞추어 그림자가 넘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사실 벤자민은 편지로부터 눈을 돌릴 핑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눈동자에 바늘로 점을 찍는 듯 작디 작은 점들이 기어다니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나지막히 욕설을 중얼거리며 벤자민은 마른 세수를 했다.
편지에서 눈을 떼어낸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가려는 듯 신경질적으로 복도를 향해 소리를 외쳤다.
" 사라! 침실 창문은 닫았나? "
" ... "
깜깜한 복도에서는 메마른 적막만 텁텁하게 흘러나왔다.
" 사라! "
재차 고함을 외쳐보지만 역시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내심 편지에서 떨어지게 되어 기쁘지만 그렇지 않은 척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밀치며 일어난 벤자민은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 사라 엘리자베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도대체 왜 - "
이어붙이려던 뒷말은 끝내 목을 거치지 못했다.
열려 있는 침실 문 너머로 활짝 열려 있는 창문에서 거센 빗줄기가 그대로 방안을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말을 하는 것도 까먹은 채로 허둥지둥 창문가로 다가간 벤자민은 빗물에 푹 젖어 미끄러운 창문 청동 장식을 우악스럽게 잡아채어 끌어당겼다.
급하게 움직인다고 움직였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방안으로 들이닥치는 빗물의 대부분을 받아낸 벤자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어있었다.
손아귀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청동 고리를 겨우 창문 잠금 걸이에 고정시키고는 뒤로 돌아섰지만 충격에 벌린 입에서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언제부터 창문을 열어놓은 것인지 방 안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젖은 종이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잉크로 적힌 단어와 같이 물에 젖은 각양각색의 것들이 방안을 물과 함께 떠다녔다.
" 맙소사 이게 무슨.. "
어디서부터 정리를 시작해야할 지 감이 잡히지도 않아 그저 눈만 돌려대다가 문득 바닥에서 달력을 발견했다.
바닥에 깔린 물 덕분에 달력은 온통 젖어 있었지만 용케도 내용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 속에서 건져내어 눈 가까이 들고 오자 어째서 위화감이 들었는 지 확인할 수 있었다.
' 7월 25일..? '
항상 잠에 들기 전 하루를 달력에 X표를 쳐 지난 날을 표시하는 습관이 있던 나는 7월 달력에 24일까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X표를 확인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7월 22일까지의 기억만 가지고 있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오늘이 내가 기억한 적 없는 23,24일이 지나 25일이 맞다면 내 가정부 사라가 집 안에 없는 것도 말이 되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어제부터 오늘까지 그녀의 휴가날짜였으니까.
분명히 달력에 그려진 X 표시도 그간 그려왔던 나의 글씨체가 분명했다.
오늘 날짜에 무엇이라 글씨가 적혀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비에 젖어 번저버린 잉크로는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벤자민은 축축한 달력을 손에 쥐고 있다가 탁상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잠시 침실을 거닐어 허리를 굽히며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물건을 간간히 주워 탁자나 서랍 위에 대강 올려놓다가 대충 중요한 것들은 주운 것 같아보이자 손을 놓아버렸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 인해 놀라 잊고 있었던 편지의 내용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며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사실 내용만 따지고 보면 별 것 없는 내용이였다.
그의 옛날 집에서 보내진 편지는 길게 이어진 횡설수설한 글을 담고 있었지만 결국 그 머리 아픈 글을 계속해서 읽어내려가면 그가 이 집으로 와주길 바란다는 내용이 장황하게 들어있을 뿐이였다.
...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여러가지 영어 단어를 섞어서 만들어낸 듯한 문장은 읽으면 읽을 수록 해석되기는 커녕 머리 속을 쿡쿡 쑤시는 듯 두통만 일으키는 것 같았다.
나름대로 집에서 나와 악착같이 돈을 버는 와중에도 학문을 손에 놓지 않고 나름 이름을 알리는 대학에 들어가 졸업을 하고 이제는 대학의 교수 (임시이지만, 곧 정식으로 바뀌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로써 일을 하고 있는 벤자민이지만 심지어 그조차 이해하지 못할 사어 (죽은언어.) 가 섞여 있는 듯 전혀 의미를 알지 못할 단어도 드문 드문 글에 나타났다.
글을 보낸 사람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고 그저 이리저리 튀는 글씨체로, 마치 글을 전혀 모르는 어린 아이가 쓴 ( 또는 손아귀에 펜을 잡을 힘이 없이 한없이 늙은 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주소는 분명 벤자민이 살던 옛날 집이였다.
옛날 집주소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뭉개지는 글씨체.
벤자민은 비록 탐정도 아니고 그런 재능을 가졌다고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도 이정도의 단서만 가지고 단번에 글쓴이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문제가 너무 쉬웠다.
이 편지는 분명 그의 아버지가 보낸 것일 터이였다.
...아버지.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허리가 한층더 지끈거리는 듯 했다.
사실 그 옛날 집에서 나온 것도 거의 그 때문이였으니.
잠시 아버지를 떠올리며 가만히 서 있던 벤자민은 이내 진저리 치듯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분명 멈추어 있던 순간은 1분도 안되었던 것 같은데 그의 발은 바닥에 흥건하게 깔린 차갑디 차가운 물에 의해 감각이 없을 정도 였다.
그는 편지를 보던 방안으로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기어코 의자에 다시 앉은 그는 벌레가 기어다는 듯한 편지를 신경질적으로 탁자 저편으로 밀쳐둔 뒤 그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편지를 하나 더 꺼내들었다.
이 편지도 그의 전 집주소가 적혀져 있었지만 확연히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지럽게 휘갈긴 글씨가 아닌 정확한 타자기로 처낸 글씨가 차갑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심지어 엄정한 법정에서 쓰는 문자로.
빳빳한 편지 봉투에서 꺼낸 잉크 냄새가 감도는 종이에 이어진 문자는 간결한 것이였다.
나름대로 미사여구와 법률 문자를 섞어 길게 늘여놓기는 했지만 이 역시 내용은 간단하였다.
' 아버지가 죽었으니 정해진 날짜에 아버지의 집으로 와서 유산집행인이 보는 앞에서 유산을 확인하고 찾아가라. '
두 편지를 확인하면서도 그는 끝끝내 석연치 않은 감정이 들었다.
사실 그가 아버지의 집에서 나온 것은 꽤나 오래전 일이였다.
그가 성인이 되기도 전에 나왔으니 사실상 중년에 가깝게 변모한 지금은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정확히 가늠하는 것조차 힘들정도였다.
또한 아버지의 집을 도망치듯 나오며 그는 이곳 저곳을 떠돌았다.
물론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어디를 가는 것인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단 일말의 단서도 남긴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자신이 사는 주소는 도대체 어떻게 알아내고 이렇게 편지를 보낸 것일까?
과장을 보태자면 탐정조차 그의 행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그는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는 삶이 일상이였다.
편지의 두 내용을 번갈아 살펴보던 벤자민은 결국 편지를 외면하기로 마음 먹고 침대가로 몸을 기울였다.
내일의 자신이 어떻게든 해줄 것이라 믿으며.
◆◇◆◇◆◇◆◇◆◇◆◇◆◇◆◇◆◇
쾅쾅쾅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 벤자민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비둘기가 주위를 둘러보듯 한쪽 눈만 게슴츠레 뜬 채 어질러진 방안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는 한번더 강하게 울려오는 노크 소리에 그제서야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둔 겉옷을 여미며 현관문으로 나갔다.
" 나갑니다- 나가요! "
재촉하듯 계속해서 두드리는 문고리에 덩달아 빨라진 그의 발걸음에 현관문은 그의 눈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 벌컥.
그의 감정을 대변하듯 휙하고 열린 현관문 너머에는 중절모를 깊게 눌러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기다란 몸을 가지고 큰 키에, 중절모로 가려지는 절반의 얼굴과 그림자로 가려지는 얼굴 대부분에서 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벤자민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질적인 그려낸듯한 입뿐이였다.
사실 다른 곳에 집중할 필요도 없었는 지도 모른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매우 중요했었으니까.
" 벤자민 스푸너 브리그즈 맞습니까. "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느릿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벤자민은 반사적으로 눈쌀을 찌푸렸다.
몇십년간의 인생동안 그의 전체 이름을 듣는 것은 매우 드물었으니까.
" 예. 맞소만 누구십니까 "
벤자민이 맞다고 입을 때자마자 뒤이어 따라오는 질문은 듣지도 못하는 것인지 중절모의 사내는 기다란 다리를 쭉 쭉 뻗어 현관 계단을 내려가더니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마차의 문을 부드럽게 당겨열었다.
그는 마차에 기대어 기다란 한 손가락으로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인 입가를 두드리며 말했다.
" 현재는..... 유산. 집행인. 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 같군요. 날짜가 되었습니다. "
벤자민이 현관문에서 얼어붙은 듯 마차 안을 가리키던 다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중절모의 사내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 혹시. 편지를 받지 못하신 겁니까? "
분명 유산 집행인이라 자신을 소개한 말과 똑같은 어조에 똑같은 음색으로 말을 한 것 같았지만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벤자민을 덮쳤다.
마치 대답을 빨리하지 않으면 온몸이 난도질 당할 듯한 불안감에 발작하듯 벤자민은 외쳤다.
" 받았소! 편지. 받았소! "
잠시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마차와 수상한 중절모의 사나이를 바라보던 벤자민은 한마디 말을 남기고 다시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준비해야할 것이 있으니! 별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
그는 허둥지둥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책상위에 놓인 편지뭉치를 우악스럽게 웅켜쥐고는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바깥주머니를 더듬어보자 외출하기에는 괜찮게 적절한 것들로 채워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책상에 붙어있는 서랍을 마구잡이로 열어보며 뒤졌다.
그리고 결국에는 맨 아래 서랍 저 밑에 숨겨지듯 구석에 박혀 있는 신분증을 집어 올렸다.
신분증을 감추기라도 하듯 바지 주머니 안쪽에 깊숙히 찔러넣은 벤자민은 집안을 한번 더 빠르게 훑어보았다.
놓친 것은 없는 것인지 확인한 것이나 특별한 것을 찾지 못하고 현관문으로 그는 다시 달려나갔다.
전날 꺼림칙함에 아버지의 집에 가기 싫다고 생각한 다짐은 어디로 간 것인지 그의 머릿속에는 단지 유산 집행인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뿐이였다.
막 현관문을 나서기 전.
그의 눈에는 신발장 한켠에 놓인 한 신발에 눈길을 빼앗겼다.
그가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달아날때 신었던 신발이였다.
잠시 그렇게 또 넋을 읽고 멍하니 서있기도 잠시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신발장 한켠에 놓여져 있는 낡은 가죽가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몸을 굽혀 어릴 적 신발은 가죽가방에 쑤셔넣으며 허겁지겁 현관문을 나섰다.
마차에 기대어 있던 중절모의 사나이는 어느새 마부석에 올라 말들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만 보며 그는 빨리 마차 뒤에 오르라 재촉하듯 고삐 쥔 손을 위로 들었을 뿐이였다.
현관문을 닫으며 단속을 한 벤자민은 마차에 올랐다.
그가 마차 문을 닫기도 전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스쳐가는 도시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벤자민은 거세게 덜컹거리는 마차 안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거 속 아버지의 집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사실 아버지의 집에서 살 때에는 좋은 경험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었다.
그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매번 집안에 이상한 사람들을 들이곤 했다.
그가 이상한 사람들을 매번 집안에 들일 때마다 벤자민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은 2층의 그의 방뿐이였다.
그 흔한 창문 하나 없는 그 방에 그는 감금되어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갇혀 있어야 했다.
그리고 방음이 하나도 되지 않는 듯 마룻바닥과 벽. 심지어 천장까지 가리지 않고 희미하게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방안 속으로 스며들어왔었다.
사실상 그의 아버지는 거의 매일매일 집에 괴상한 손님들을 데리고 왔기에 어린 벤자민은 거의 방안에 갇혀서 살았다고 볼 수 있었다.
집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도 모른체 그렇게 살아가던 그는 어느 순간 부터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줄기 시작하면서 집안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었다.
집에 오는 손님을 줄었지만 손님이 줄어들 수록 그의 아버지도 점점더 괴팍하게 변해져만 갔다.
술에 취한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아버지는 이따금 괴상한 언어를 내뱉으며 집안을 방황하며 다녔다.
그리고 벤자민은 아버지를 피해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감옥이 아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까.
아버지는 벤자민을 방안에서 끌고 나와 집안 한가운데에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방 중앙에 깔려있던 양탄자를 치우며 있는지도 몰랐던 지하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벤자민 손에 밧줄을 쥐어주며 한시간이 지나도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밧줄을 당기라고 윽박지르듯 외친 아버지는 독한 술을 술병째로 들어 벌컥이며 들이키더니 지하실 아래로 걸어내려갔다.
한시간은 훌쩍 넘겼음에도 전혀 미동도 없는 밧줄에 벤자민은 밧줄을 당겨보았지만 계단에 잠긴 어둠 속에서 중간에 거칠게 물어뜯긴듯 잘려 있는 밧줄만 끌려올라올 뿐이였다.
곧바로 숨기 위해 방안에 들어가 박힌 벤자민은 곧이어 방안과 마룻바닥에서부터 지긋지긋하게 들려온 환청을 또다시 듣기 시작했다.
저 들리지도 않는 듯 희미하게 울리는 알 수 없는 소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인지도 애매하게 벤자민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가 벤자민을 부르는 날은 없었다.
단지 벤자민은 자신의 방에서 나와 조심스럽게 집안을 돌아다니는 와중 복도 저편 또는 저 멀리에 열린 방 안에서 아버지의 실루엣을 볼 뿐이였다.
어쩌면 환각일 수도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방 안으로 들어간 아버지의 형상이 어느새 저 아래 계단 밑에서 올라오기도 하며 말도 안되는 현상을 보여주었으니까.
다만 그나마 나은점이라고는 아버지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타난다는 점이 유일하게 괜찮은 점이라고나 했을까.
그렇게 미쳐버린 듯한 저택에서 피폐해지는 삶을 이어가고 있던 벤자민은 현관문 앞에서 편지를 하나 발견했다.
별다른 내용은 적혀있지 않았으며 그저 이 집을 떠나 도망쳐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글씨가 적혀져 있었다.
그 종이를 보자 마자 무언가에 홀린듯.
이 저택에서 살아온 그 오랜 세월 동안 나가는 것을 생각치도 못했던 벤자민은 문밖으로 발을 내딛었고 그렇게 저택에서 뛰쳐나와 도망쳐 어린시절 기억을 저 깊이 묻어두고 생활을 해왔었다.
◆◇◆◇◆◇◆◇◆◇◆◇◆◇◆◇◆◇
-덜커덕!
상념에 잠겨 과거를 회상하던 벤자민은 이내 마차가 부서질 듯 덜컥거림에 깨어났다.
멍때리는 습관이 어제부터 들어버린 것인지 계속해서 정신이 깜빡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던 벤자민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저택이 보였다.
몇십년이 지났지만 여젼히 기억 속의 그 저택이 분명했다.
그렇게 불길한 저택으로 마차는 계속해서 굴러갔다..
분명 저택이 마차 창문 너머로 눈에 들어온지는 꽤나 되었지만 좀처럼 저택이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계속해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벤자민은 결국 꺼림칙한 중절모의 사내에게 질문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마차 창문가로 고개를 가까이하자 마치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것처럼 마부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말을 먼저 꺼냈다.
역시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바삭하게 마른 말투였다.
" 저택가에 나 있는 길이 빙글빙글 도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꽤나 오래 걸릴 것입니다. "
답을 듣자마자 뻔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벤자민은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 그러면 가로질러서 가도 되는 것 아니오? "
길에서 한번도 눈이 뗀 적 없던 마부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집에서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은 입 밖에 없었으나 벤자민은 왜인지 모르게 그가 눈가에 의아함을 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이 저택 주변에서는 길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계실텐데요 "
그의 말에 몸안의 수분기가 모두 말라버린 듯 그저 가만히 있던 벤자민을 중절모의 사내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지 짧은 대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저택의 정문이 어느새 불쑥 눈 앞으로 다가왔다.
덜컹거리며 마차의 바퀴가 정문을 넘었다.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불안함에 뒤를 쳐다보았지만 마차 뒷편으로 펼쳐진 풍경은 그저 끝없이 이어질 듯 한 앙상한 나무와 떨어진 잎들 뿐이였다.
오래되어 관리가 한번도 된 적도 없어보이는 작은 분수대를 돌아 비로소 저택 앞에 마차가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린 벤자민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위를 쳐다보았다.
저택을 떠나던 날 그를 굽어보던 저택의 3층 창문에 붙어있는 가고일 조각상이 이번에도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한 꺼림칙함에 가고일 조각상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조각상은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 안 들어가십니까 "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앞을 다시 바라보니 이미 저택의 문을 열고 있는 안내원이 보였다.
또 이렇다.
찰나의 순간을 통째로 베어내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기억이 끊어지며 이어진다.
벤자민은 아마 몸이 피로한 모양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휙휙 털었다.
"갑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을 하며 벤자민은 마차에서 내려 걸어 저택의 문에 도달했다.
벤자민은 한걸음 한걸음마다 저택에 들어가기 싫다는 생각이 더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의 마음과 다르게 발걸음은 무엇에 홀린 것 마냥 주저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저택의 문이 닫혔다.
◆◇◆◇◆◇◆◇◆◇◆◇◆◇◆◇◆◇
저택 안에 들어가자 관리를 하지 않아 여기저기 낡았을 것이라 생각한 벤자민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택은 매우 깨끗한 상태였다.
마치 바로 전날에 누군가 청소를 하기라도 한듯.
"어떻게 저택을 둘러보시겠습니까?"
중절모의 사내가 입을 열었지만 벤자민은 진저리치며 이야기했다.
" 아니오. 아니오..되었소. 그냥 내가 무엇을 확인해야하는 것인지. 아니 그냥 볼 것만 보고 나갔으면 좋겠군. "
마치 무언가에 취하기라도 한 듯 앞과 뒤를 휙휙 바꾸는 말이였지만 중절모의 사내는 지금까지 감정을 한번도 내보이지 않았듯 동요없이 대답하고 벤자민을 저택 이곳저곳에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중절모의 사내를 앞세우고 저택을 이리저리 돌아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벤자민은 마음을 옥죄던 불안감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도대체 이 저택에서 무엇을 두려워 했던 것일까?
유령?
아니면 아버지의 망령?
이따금 방 안을 가리키며 유품으로 돌아가게 될 물품을 소개하는 것을 들으며 점점 긴장을 풀던 그때.
벤자민은 보았다.
저 복도 멀리 어렴풋이 성인 어른과 같은 형체가 스윽 움직이는 것을.
" 저..저게 무엇이오! "
하지만 중절모의 안내인이 느릿느릿 고개를 완전히 돌리기 전에 그 형체는 사라졌다.
안내인이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벤자민은 앞질러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 아니, 아니오 볼 것을 다 보았으면 나갔으면 좋겠군. "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기묘한 소리가 저택안에 울려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벤자민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에 안내인은 열었던 입을 잠잠히 닫고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벤자민은 그를 따라 저택의 1층 중앙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안내인은 이상하게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 왜. 그. 무슨 일이오. "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우아한 몸짓으로 안내인은 허리를 굽혀 양탄자의 끝부분을 들어올렸다.
"그야. 아직 한 가지가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
그리고 벤자민은 그의 과거와 마주했다.
마치 두개의 필름을 이어 빛에 비쳐보이는 것과 같이 현재 눈에 보이는 장면과 과거의 아버지가 지하실로 사라지던 장면이 불투명하게 겹쳐보였다.
벤자민은 당장에라도 비명을 지르며 저택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더 이상 그의 몸과 입은 돌과 같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침묵이 있었던 것도 잠시.
벤자민의 발이 그의 뜻과는 다르게 점점 지하실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는 어떻게든 들어가지 않기 위해 날뛰고 있었지만 몸은 그저 힘없이 지하실을 향해 걸어갈 뿐이였다.
지하실을 향해 걸어갈 수록 어릴적 들었던 저택의 환청이 웅웅거리며 귓가를 간지럽혔다.
둥둥거리는 기묘한 북소리.
고양되는 정신.
한없이 높아지는 것 같기도.
한없이 가라앉는 것 같기도
정신없이 울리는 환청과 환각 속을 거닐며 기어코 안내인을 지나처 지하실 문에 벤자민은 발을 들였다.
그의 뒤로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저기 안까지는 제가 안내해드릴 수 없군요. 어떻게 되었던 간에 저는 그럼 할일을 다 마쳤으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멀어지는 발소리.
그리고 저택의 낡은 문소리와 함께 끝끝내 저택의 문이 닫히기 직전 선심이라도 쓰는 듯 중절모이 사내의 목소리가 매우 약하게 귓가를 흔들었다.
" 길을 잃지 마십시오. 길을. "
그리고.
쾅 소리와 함께 지하실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굳어있던 몸이 풀렸지만 벤자민은 가까스로 참았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비명을 눌러 삼키며.
헛된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지하실 문을 있는 힘껏 밀뿐이였다.
몇시간이나 지났을 까.
식은땀에 흠뻑 젖어 거친 숨만을 토해내던 벤자민은 저 아래로 밖에 내려가는 길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기대어 있던 문에서 떨어져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빛이 없이 계단이 얼마나 이어져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무의식적으로 발을 놀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다리가 아파오고 저리는 것을 넘어 무감각해질 때쯔음 마침내 바닥을 밟으며 벤자민은 휘청거렸다.
미약한 탈력감에 몸을 휘청이면서도 벤자민은 저 멀리에 빛이 보이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광원에 도착한 벤자민은 돌로 이루어진 탁자와 그 위에는 꽤나 말끔하고 깔끔한 등불 하나가 타오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탁자 위에는 등불과 몇장의 종이만이 놓여져 있었다.
벤자민은 떨리는 손길로 종이를 주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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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길.
앞의 길을 걸어가려는 이는 이 주의사항을 꼭 낭독하고 나아가라.
이는 살아서 돌아가는 것에 관심없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이 정독해야하는 사항이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 나아갈 때에 이 탁자에서 등불을 집어가라.
그럴일은 없지만 혹시나 탁자에 종이와 등불을 제외한 무언가가 있다면 최대한 빨리 뒤돌아 온 길을 따라 되돌아가라,
비록 지상으로 다신 나갈 수는 없으며 굶어 죽게 될테지만.
적어도 끔찍한 일은 겪지 않을 것이다.
(탁자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는 것을 인지하고도 앞으로 나아가길 결정하였다면 어리석고 멍청한 결정에 감탄을 금치못하는 바이다.
당신에게는 이 주의사항은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 원하는 대로 앞으로 나아가라.)
먼저 앞으로 걸어나가다 보면 검정 로브 하나가 보일 것이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가지런히 개어져 있으면 이 길을 따라걸어가는 내내 주의를 기울여라.
만약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당신의 선택에 맡긴다. 여기까지 왔다면 뒤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앞과 뒤 어디로 가든 끔찍한 미래가 예정되어 있지만 그나마 헛된 희망을 쥐고 싶다면 앞으로 나아가라.)
로브를 보았다면 뒤집어쓰고 오른손에는 랜턴을 들고 손을 앞을 향해 쭉 내밀고 앞으로 걸어가야한다.
(이는 항상 유지해야 하는 자세이다.)
앞으로 걸아가다보면 흰색 실타래로 이루어진 기둥이 사방을 가득채운 매우 매우 큰 공동이 나올 것이다.
이 기둥은 거울을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이 기둥 사이를 거닐 때 거울 너머에서는 여러가지가 보일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다양한 형상이 보이지만 로브를 뒤집어쓰고 등불을 들고 있는 자신의 형상이 보인다면 그 즉시 뒷걸음질쳐서 다른 길로 들어서라.
거울 너머에는 여러가지 형상의 허락되지 않은 지혜가 담겨져 있다.
원하는 만큼 이 장소를 돌아다니며 과실을 챙겨라.
감당할 수 있을만큼만.
절대로. 무슨일이 있어도,
실타래로 이루어진 기둥을 건드리지 마라.
이 실타래 거울 공간은 매우 넓다.
보통은 일생이 전부를 바쳐 돌아다닌다하더라도 전부를 돌아볼 수 없겠지만 매우 드물게도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 주의하기 바란다.
만약 바닥에 흙부스러기가 늘어나거나.
나무 잔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 방울.
이해할 수 없는 옷깃 스침 소리.
이것들이 보인다면 그 즉시 뒤로 물러나라.
환각이나 환청. 그저 지례짐작으로 겁을 먹고 물러나도 괜찮다.
차라리 겁쟁이가 되는 편이 앞으로 겪을 일보다는 나을 것이니.
또한 이곳을 거닐다가 속이 간지럽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즉시 이곳을 탈출하여 ' 가장 오래된 물결 ' 의 교단, 또는 ' 불길한 징조의 불 '의 교단을 찾아가라.
살아서 도착할 수만 있다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면 바닥에서 신발을 찾으면 된다.
자신의 발에 딱 맞을 것이니 신발을 찾는다면 그 신발을 신고 올바른 지혜의 형상을 향해 나아가라.
이 방법은 딱 한번만 가능하니 꼭 명심하라.
이곳에 발을 들이게 된 무지하고 바보같은 이에게.
거대하고 형언할 수 없는 깊이의 어둠에 들어가는 이에게.
보잘것 없고 형편없는 금방 사그라들 촛불과 같은 주의사항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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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은 어둠 속에서 떨리는 눈으로 몇 번이고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등불을 집어들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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