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명의 모든 가치가 야만적인 폭정 앞에 속절없이 짖밟힐 것이라는 것에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대책을 고민할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탈출 계획은 그 초안입니다. 심우주를 향해 영원히 항해하는, 자체 보급이 가능한 이주 선단의 설계안이지요.
제 아무리 그들이 무한한 군세를 지니고 있을지언정, 우리가 한시도 멈추지 않고 항해한다면 뒤따를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자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설사 자원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러한 규모의 선단을 건조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자원 확보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이 있습니까?


그렇기에 두번째 계획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준비된 자료를 읽어주시지요.
먼저 본국에서 10년 거리 이내에서 접근 가능한 모든 항성계에서 최대한의 자원을 수집해야 합니다.


그 범위 안에는 아직 우주시대에 도달하지 못한 독립 행성들이 수도 없이 있습니다... 국장, 제가 생각하는 방법이 맞습니까?


. 무력으로 현지 정부를 굴복시키고 수탈을 위한 사회 구조를 구축할 것입니다.
행성의 자원 조사가 끝나면 이후 수십년간 현지 노동력을 동원하여 모든 지하자원과 식생을 회수하고 본국으로 귀환합니다.


미쳤군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부도덕한 방식이지요.
하지만 그들 역시 공화국이 이곳에 당도한다면 일말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노예가 될 뿐입니다.
차라리 한 떨기 장작이 되어 고등 문명의 불씨에 힘을 보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요.


선민사상을 고결한 선택으로 포장하지 마십시오. 통합 이전의 수많은 선동가들도 당신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그저 씨족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종족으로 소위 고등 문명의 정의가 확대되었을 뿐입니다.


인이나 민족의 영달을 추구하던 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계획은 알려진 세계의 모든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대답해보십시오. 각하.
더 이상 우주에 우리와 공화국 이외의 성간 문명이 남아있습니까? 우리가 무너지면 우주의 모든 이들이 공화국의 대오에 집어 삼켜질 것이고, 곧 그것 이외의 사회가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 종이 이뤄낸 최선의 성과란 타락한 전산업기 독재정에 그치게 되겠지요. 외부에서 무너뜨리기엔 너무나 거대하고, 스스로 무너지기엔 너무나 공고해진 악몽과도 같은 체제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와 그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
선민의식에 찌든 문명 단위의 이기주의가 당신이 주장하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체제입니까?
10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미숙한 동포들을 해치지 않고서도 해결책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무너진 문명들이 시도한 계획 말이군요. 하지만 각하, 자원국이 그 가능성들을 검토한 적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저희는 냉혈한이 아닙니다. 그저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채택했을 뿐입니다.


...


우리와 공화국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여쭈셨지요. 의사결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존중한 나머지, 모두의 손에 피를 묻히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탈출 계획은 나머지 총재들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특히 선임 총재께서 많은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정부 수반 과반이 동의했으니 곧 정식 안건으로 승격되고, 국민 표결에 부쳐질 것입니다.


민중이 동의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이야기하는 고등 문명의 민중은 한낱 유아적인 이기주의에 굴종한단 말입니까?


과반의 동의를 자부합니다. 저는 각하를 접견하기 수 개월 전부터 각 행성의 주요 대표부를 방문했습니다.
모두 호의적으로 반응하더군요. 생에 대한 욕심이 알량한 죄의식을 압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국은, 공의와 평등의 나라는 진실로 죽었군요.


그렇습니다. 추악하기 그지없는 민주적 타협이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그것이라도 좋습니다.
그렇게라도 우주에 우리 존재했다는 증거를 남길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