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부모님 손에서 자랐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시피 한데


희미하게나마, 내 머릿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목소리, 매일 밤 번갈아가며 자장가를 불러주시던 그 목소리 뿐이다.


이외에 얼굴이라든가, 성격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워낙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야지…


그래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그 애매하게 둥둥 떠다니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뭐랄까… 부모님이 내게 남겨주신 마지막 유품 같아서, 이것마저 없어지면 영영 부모님이라는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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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이 아마 장례식장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꽤 자랄 때까지 그곳이 장례식장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초.중.고 때까지는 장례식장을 갈 일이 없기도 했고…


기껏해야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장례식 풍경이 전부였는데,


아무리 어릴 때라고는 해도 내가 기억하는 그 풍경이랑은 좀 많이 달랐다.


미디어 속 장례식장은 너무 사람들이 많았고, 너무 시끄러웠고(울음소리 때문에), 너무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냥 전형적인 방송쟁이들의 뻥튀기겠거니하고 넘겨버렸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동기놈들 몇몇의 가족 장례식장에 가고 나서야 ‘아, 이게 보편적인 장례식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각 집마다 사정이 다를 수도 있는 거고, 아니 애초에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생각들은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목소리만 기억하기에도 바쁘다고… 커갈수록 왜 점점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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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님은 내게 은인과도 같은 존재다. 


한 순간에 부모 모두를 잃은 나를 정말 애지중지 키워주셨다.


한 번도 모자르게 먹은 적도, 모자르게 입은 적도, 모자르게 생활해 본 적도 없다.


할머니께 듣기로는 할아버지가 젊으셨을 적 크게 사업이 번창해서 모아둔 돈이 많다고 하셨다. 늙은이들은 이제 쓸 데도 없고, 나중에 다 니 돈이니 부담 가지지 말고 편하게 쓰라고까지 하셨다.


다만, 손자가 어디가서 ‘부모 없이 자라서…’ 소리를 듣게 할 순 없으셨는지 여러가지 예의나 예절 면에서는 정말 엄격하게 가르치셨다.


개중에는 다소 미신의 영역인 것도 많긴 했지만… 왜 그런거 있잖은가, ‘다리 떨지 말아라’, ‘문지방 밟지 말아라’ 같은거.


그중에서 문지방은 특히나 신경을 쓰셨는데, 내가 몇 번이나 문지방을 밟을 뻔 하자 나중에는 아예 집 모든 문지방에 눈에 잘 띄는 새빨간 야광 박스테이프를 붙여 놓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과했던 것 아닌가 싶지만, 어릴 땐 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게임 같기도 하고 좋았다. ‘방과 거실 사이에 흐르는 용암을 피하는 전사!’ 뭐 이런 유치한 생각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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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진학하자마자 난 바로 자취를 시작했다. 통학 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이기도 했고, 나도 이제 성인이니 독립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기 때문이다. 


조부모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취를 허락해주셨고, 보증금과 첫 월세만 지원해주셨다. 사실 계속 월세를 지원해 주겠다고 하셨으나, 이는 내가 한사코 거절했다. 그동안 너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온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월세를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3-4개월 쯤 지났을 때는 ‘아 그냥 월세 지원 받을걸…’ 이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나중에는 오기가 생겨서 결국 졸업 때까지 한 번도 손을 벌린 일은 없었다. 한 1년 정도 더 지났을 때는 이 생활이 익숙해져서 그런 생각이 더이상 들지도 않았다. 


아르바이트와 학업, 또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여자친구를 그때쯤부터 만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점점 더 빠듯한 생활을 보내야 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할 일은 많으니 자연스레 내가 해야 할 일에 우선순위가 매겨지기 시작했다. 조부모님을 찾아 뵙는 일은 날이 갈수록 점점 후순위로 밀려갔고, 원래는 주말마다 찾아 뵙던 빈도가 나중에는 명절에만 찾아 뵙게 되었다. 아까 전 조부모님을 은인과도 같은 존재라고 했던 내 표현이 부끄러워지지만…


그래도 나름 이렇게 아득바득 살아간 끝에, 나는 아르바이트 2개를 병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부모님과 함께 졸업식을 치른 후,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아 두 분이 연달아 돌아가셨다. 마치 나의 대학교 졸업까지가 그들의 책무였던 것처럼, 그 책무가 끝나자 그렇게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자주 찾아 뵐 걸 이라는 후회가 사무쳤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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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와 나는 평수가 좀 작더라도 서울에서 살 작정이었기에, 수도권 외곽에 위치해 있는 조부모님댁은 팔기로 했다. 옛날에 지어진 현대식 기와집이었지만 당신들께서 그동안 관리를 잘 해오신 덕택에 집 안팎에 남겨진 세월의 흔적은 오히려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부동산 중개업자도 요즘엔 서울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서 금방 팔릴 거라고 했다. 


그렇게 집을 내놓은 후, 나는 남은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한동안 조부모님댁을 자주 들락거렸다. 유품 하나하나를 바라보면서 어릴 적 추억에 잠기느라, 그날 계획한 처리량에 못 미칠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런 순간이 아련하고 소중했다. 이제 내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둘이나 더 늘었지만, 그래도 이런 유품들 덕분에 부모님의 목소리보다는 조부모님을 더 기억하기가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도 역시 유품을 정리하면서 추억에 잠겨 있었는데 밖에서 중개업자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수 씨! 안에 계세요? 집을 보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있어서요!”


아, 중개업자에게 집을 내놓을 때, 굳이 나에게 연락하지말고 편하게 보여주라고 했었는데 오늘은 밖에 주차된 차를 보고 안에 내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 네~ 지금 나갑니다! 잠시만요!”


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는데 그 순간 계속 쭈그리고 앉아 있던 다리가 팍 저리기 시작했다. 원래 같았으면 가만히 서있거나 다시 앉아서 저린 걸 풀고 걸었겠지만 지금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현관으로 가기 시작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문지방 밟지 않기’에 단련된 나였으나, 그때는 마음도 급하고 다리도 말을 듣지 않다보니 그런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이십몇년간… 한 번도 밟히지 않았던… 그 문지방을 밟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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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어엿한 아버지가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하나, 딸 하나. 어릴 적 외로웠던 기억 때문일까. 나는 꼭 두 명 이상을 낳고 싶었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이 녀석들은 하루 종일 칭얼대다가도 자장가 한 번이면 금세 잠에 빠져든다. 내 아버지, 어머니도 내가 하루 종일 칭얼대면 자장가를 불러주셨겠지? 나는 아직까지도 목소리를 잊지 않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제 기를 쓰고 외우지 않아도 된다.


잠이 안 오는 날이면 나는 조부모님댁을 간다. 집은 팔지 않기로 했다. 몇 년 전, 문지방을 밟았을 때 들렸던 소리 때문이다. 


장롱에서 베개를 꺼내고, 문지방 위에 올려 놓는다. 머리를 가져다 대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장가를 불러주신다. 잠이 쏟아진다.


집을 팔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나의 은인인 조부모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이다.


내가 병들고 늙으면, 우리 자식들한테도 나를 여기 밑에다 묻어달라 해야지. 


그리고 잠이 오지 않을 때 이곳을 찾아오라 해야지.


나도 아이들을 위해 자장가를 불러 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