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참 어렸지. 아무것도 모를 만큼.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아. 아마도 내가 '석회질'이니, 아니면 '과산화수소'니 하는 것들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였으니까... 아마 열 일고여덟 살? 정도 되는 나이였겠네.
우리 집은 2층짜리 주택이었어. 총 네 개의 창문은 반듯한 정사각형 모양이었고,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붙어있어서 창가에 식물을 키우기 딱이었지. 1층에는 거실이랑 주방이 있었고, 2층은 부모님과 내 동생, 그리고 내 방이 있었어.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1층에 모여 아침을 먹고 난 후 아버지는 직장으로, 나와 동생은 학교로 향했어. 그 전에 엄마의 뽀뽀세례 역시 빼놓을 수 없었지.
우리 아버지는 크루에르 인더스트리라는 이름의, 거대한 시멘트 제조회사의 임원이었어. 어머니는 지역 학부모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나와 동생은 종종 과학에 관련된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고 오기도 했어.
우리 집은 주변에서 선망과 동경의 대상으로 통했어. 사실,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엄청 개방적인 국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그렇지 않아. 자네 역사 공부 좀 했었나? 애초에 영국에서 청교도인들이 이주해서 세운 나라가 미국이거든. 걔네들이 한국으로 치면 선비들이잖아, 꽉 막힌 선비.
여튼, 꽉 막힌데다가 자네들끼리만 네트워크를 짜놓다시피 한 미국이라는 데서, 아무 연고도 없는 순혈 한국인 집안이, 그것도 한인타운도 아닌 그냥 일반 미국인들 거주지역에 자리를 잡고 정착한 셈이니, 얼마나 놀라웠겠어? 그때는 또 지금이랑 다르게 인종차별도 심하던 시절이었는데.
아,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려나?
어쨋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집이 누가 봐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정이었다는거야.
그리고 그 즈음에 아마 그 애를 처음 봤던 것 같아.
이름은... 내 기억이 맞다면 베리, 베리였어.
베리는 우리집 바로 맞은편 집으로 이사를 왔어. 자기 또래가 앞집으로 이사 온다는 소식은 십대 남자아이를 들뜨게 만드는데는 충분했지. 난 그날 아침 일찍부터 집 앞 화단에 나갔어. 거기에 내가 의자 대용으로 쓰려고 쌓아놓은 흙무더기가 있거든. 난 그 위에 걸터앉아서 이삿짐 트럭을 죽치고 기다렸어.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 한 대가 서서히 다가왔어. 그리고 트럭에서 초췌한 남자 한 명이 내렸어. 베리의 아버지인 것 같았어. 머리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고, 더러운 게 잔뜩 묻은 흰 티셔츠에다 바지는 세탁을 안 하는지 티셔츠보다 더 더러웠어.
그 남자는 조수석으로 빙 돌아가더니 작은 체구의 여자애 하나를 품에 안고 다시 운전석 쪽으로 돌아오더라. 그 애는 베리였어. 아, 어떻게 이리 생생하게 기억하냐고? 난 기억력이 되게 좋거든. 특히, 사람에 대한 건 절대 안 까먹고 기억하는 편이야.
여튼 그렇게 새로운 친구가 생기나 싶어 신이 나던 찰나, 그 남자는 여자애를 텅 빈 집 안에 데려다 놓고 본인은 이삿짐을 집 안으로 옮기더라고. 분명 나를 본 것 같은데, 아는 체도 안 하는거야. 그래서 그때 베리랑 친해질 기회를 놓쳤지.
베리랑 친해질 기미는 쉽게 보이지 않았어. 베리는 애초에 집 밖으로 잘 안 나오는 것 같더라. 학교도 안 다닌 것 같아. 아마 홈스쿨링 비슷한 걸 했겠지. 아, 그때는 홈스쿨링 이런 게 없었나? 여튼, 우리 부모님도 처음에는 우리 애들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기겠네 하시며 좋아하셨다가, 한 몇 주가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베리 얘기는 꺼내지도 않으셨어.
베리네 집안은 조금 특이했어. 우리 집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다른 집이랑 비교해도 확실히 다르더라고. 베리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은 항상 흰 티셔츠에 갈색 운동복 같은 바지만 입고 다녔고, 옷에는 항상 더러운 게 묻어 있었어. 면도는 안 하는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다녔고. 그 와중에 베리는 혼자 예쁘고 비싼 옷을 입고 다녔지.
그리고 베리의 엄마는 없었던 것 같아. 그때는 왜 엄마가 없는지 이해가 안 됐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이혼을 했던 것 같아. 솔직히 내가 여자라고 생각해 봐도 그런 남자랑 살 자신은 없거든.
그리고 석 달 쯤 후였나? 그때 베리를 처음으로 집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 봤었어. 거기는 지역 도서관 앞의 공터였는데,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지역 도서관에 가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빌리러 가야 했거든. 그때는 지금처럼 대출증을 찍고 빌리는 게 아니라, 이름이랑 전화전호를 대출록에 적고 빌려오던 시절이었어.
늘 하던대로 대출록에 아버지의 미국식 성함과 집 전화전호를 써넣고 책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도서관을 나오는데, 그 앞에 그 애가 앉아있었어. 걔는 날 눈치채지 못했더라. 내 기억으론 아마 모래로 뭘 만드는 중이었던 것 같아. 모래를 막 헤집으면서 움푹 파고 있더라고.
베리를 유심히 보는데, 볼에 뭔가 붉은 게 묻어있었어. 그때 난 그게 토마토 케찹인 줄 알았거든. 근데 자세히 보니 케찹보다는 진한 것 같더라고. 그래서 뭔지 보려고 그쪽으로 살살 다가가는데, 베리가 나를 봤어. 흠칫 놀라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가버리더라고.
아마 지금이었으면 뭐야... 하고 그냥 내 갈 길을 갔겠지만, 친구가 누구보다 소중했던 그때의 나는 이대로 놓치면 베리랑 다신 친해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대로 달려가서 어깨를 붙잡았어. 베리는 크게 외쳤지.
"Stop! Don't touch me!"
당황한 나는 그대로 놓아줄 수 밖에 없었어. 아마 그 시절 한국에서 그대로 놔주지 않았다면 별 일이 안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미국은 달랐어. 잘못하면 성추행범으로 몰릴 수도 있었으니, 그대로 놔 줄 수 밖에 없었지.
결국 나는 바닥에 떨어트려 표지가 살짝 찢어진 <총,균,쇠>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어.
잔뜩 풀이 죽은 채 토스터에 구운 식빵에다가 잼을 발라서 먹는데, 지역 TV 뉴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어.
뉴스 내용은 실종 사건이 발생했다는 얘기더라고. 그게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상당히 지능적인 연쇄살인 범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선 피해자들을 납치한 후 여자 피해자의 경우 잔혹한 성폭행을 저질렀어. 그리고 시신을 토막내서 매장했던 범죄였지. 지금도 위키피디아에 단독 문서가 남아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지.
하지만 사건의 자세한 면모가 밝혀지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단순 실종 사건으로 보도되었어.
우리 집은 물론 동네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어. 앞서 말했듯 지역 학부모회 회장인 우리 엄마는 회의를 소집해서 나를 포함한 아이들의 안전을 의논했고, 아버지는 회사를 당분간 쉬면서 총포상에 가서 샷건을 한 자루 사오셨어. 또 경찰들이 마구 왔다 가느라 밤낮없이 엄청 시끄러웠어.
근데 이상한 건, 베리의 아버지가 그때부터 안 보이더라. 원래는 베리만 집 밖에 잘 안 나갔지, 베리의 아버지는 종종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린다던가 아니면 간단한 식료품을 산다던가 할 목적으로 집 밖으로 나오곤 했어. 그런데, 지역 뉴스로 그 실종 소식이 알려진 그 날부터, 베리의 아버지는 아예 보이질 않았어. 물론 베리도 마찬가지고.
여튼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2주 정도 지났을까? 경찰들이 더는 오지 않더라고. 아마 조사를 완료했어서 그랬겠지. 그런데, 베리와 베리의 아버지는 아직도 돌아올 줄을 몰랐어.
베리네 집 역시 불도 꺼져있고 인기척이 아예 안 났지. 설마 그가 가해자인가...? 아니면 피해가 두려워 다시 이사를 간 걸까...?
마음속으로 내심 후자였으면 좋겠다고 빌었었어. 그동안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했었지만, 그래도 바로 맞은편에 집을 두고 살면서 내적 친밀감이랄까? 그런 감정이 생겼었거든.
일상은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오더라. 경찰들이 떠난 이튿날부터 난 다시 등교를 시작했어. 동생은 나이도 어리고 여자이다보니, 일주일 정도는 기다려보고 가기로 했지만 난 남자였기에 꼼짝없이 학교로 나서야 했지.
아침에 다들 모여 식사를 하고, 아버지와 함께 신발을 신고, 엄마의 품에 꼭 안기고, 회사로 향하는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고, 학교를 향해 걸어갔어. 원래랑 크게 다를 게 없었지. 행복이 다시 찾아왔어.
또 한 달이 지났어. 그때가 초겨울었는데, 바람이 쌀쌀하게 불더라. 여느때처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데, 집으로 가려면 지나쳐야 하는 골목길 앞에 베리가 서 있었어. 난 까무러치게 놀랐지.
베리는 꼴이 말이 아니었어. 머리는 처녀귀신처럼 축 늘어진대다, 옷은 자기 아버지마냥 더럽기가 그지없었어. 눈은 팅팅 부어있었고, 민소매에 짧은 바지를 통해 드러나는 맨살 곳곳에 상처가 없는 데가 없었어. 원래의 모습이랑은 완전 딴판이었지.
"You... you are..."
"Come here. Get inside the alley."
베리는 날 골목으로 이끌었어. 거기서 베리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어. 돈 터치 미 이후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었지.
베리라는 이름도 여기서 처음 알았어. 골목에서 들려준 베리의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어.
베리의 아버지는 현상금 사냥꾼이었대. 미국에는 경찰이 모든 범죄자를 잡기 어려워서, 자격증을 가진 개인에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적 제제를 허용하는 현상금 사냥꾼 제도가 있거든.
그렇다고 베리의 아버지가 원래부터 현상금 사냥꾼으로 일했던 건 아니야.베리의 아버지는 원래 공사장의 인부로 일했었는데, 얼마 전에 베리의 친누나가 실종당했다는거야. 그때부터 베리의 아버지는 친딸을 찾기 위해 현상금 사냥꾼 일을 시작하게 되었대.
범인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초췌한 꼴로 돌아다녔고, 집에서는 하루종일 범인의 흔적을 추적했대.
그는 다른 범죄자가 아닌 오직 자신의 큰딸을 납치한 사람만을 쫒았고, 점점 범인에 대한 증거를 모아가는 중이었어.
이사를 온 이유도 범인이 우리 집 근처에 산다는 것을 알고 왔다는 거야.
그래서 베리의 친누나의 실종이 공론화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범인을 색출해내기 시작했데. 집이 비어있던 이유가 이거였던거지.
그러다가 범인의 정확한 위치를 발견해냈고, 거기는 범행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가정집이었다는거야. 범인은 아마 거기에 은신하는 중이었겠지.
베리의 아버지는 베리를 경찰관 중 한 명의 집에 맡겨두고, 큰딸의 복수를 위해 혈혈단신으로 그 집으로 향했대. 손에는 권총을 들고서.
하지만, 그는 그 순간이 생전의 마지막 순간이 되고 말았어. 단발의 작은 권총은 어두운 집안에서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는 가뜩이나 총 쏘는 법을 모르는 그에게는 더더욱 큰 문제였지.
결국 베리의 아버지는 범인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말았어. 사인은 외상. 범행 도구는 몽키스패너로 추측된대.
베리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마쳤어. 나 역시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지. 울음이 그친 후, 베리는 나에게 혹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 자신의 누나와 아버지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범인을 꼭 잡아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다는거야.
경찰에게 재수사를 요청해 보고, 자신의 아버지가 모아놓은 증거들로 용의자들을 특정하고 색출한다면 반드시 잡을 수 있을거라면서.
나보고는 이 사건을 주변에 더욱 더 널리 알려달라고 부탁했어. 이전의 살인과는 다르게,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은 크게 이슈가 되지 못했거든.
하지만 난 선뜻 함께하기가 어려웠어. 아무래도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기도 하고, 또 이렇게 위험한 일에 독단으로 휘말렸다가는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안전이 걱정이 되기도 했으니.
결국 난 거절하고 말았어. 베리는 아쉬운 표정으로, 그래도 괜찮다며 돌아갔어. 끝으로 반드시 억울함을 풀것이라는 말을 남겼지.
그렇게 굳은 다짐을 하고서, 여리고 어린 여자의 몸으로 자신의 가족이 당한 죽음에 정면으로 맞서려고 한 베리는, 안타깝게도 얼마 후에 죽고 말았어.
사인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외상. 이번에도 도구는 몽키스패너였어. 게다가 이번에는 성폭행 흔적도 발견되었지. 정말 참혹하기가 그지없었어.
베리는 그날 밤에 죽임당했어. 범인은 베리의 집 창문을 깨고 침입했어.
그때는 베리가 아버지가 남긴 증거를 조합하고 있던 시간이었지.
범인은 베리를 보자마자 베리의 머리에 몽키스패너를 강하게 휘둘러 내리쳤어. 베리는 그대로 쓰러졌지. 아마 그때 즉사했을 거야.
베리의 시신은 화장실로 옮겨졌어. 범인은 베리의 사지를 톱으로 절단하기 시작했고, 피가 화장실 바닥을 가득 매웠어. 정말이지 두 눈을 뜨고는 볼 수가 없는 장면이었어. 하지만 범인은 태연하게 시신을 톱으로 썰어나갔지.
범인은, 이제는 베리였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베리의 시신을 커다란 비닐에 싸기 시작했어. 피나 시체 썩는 냄새가 새어나오면 곤란하거든. 비닐로 꽁꽁 싸매진 시신은 대형 캐리어에 들어갔고, 범인은 그 캐리어를 자기가 살던 집으로 끌고 갔어. 범인은 자기 집 앞마당에 의자처럼 쓰려고 흙을 쌓아뒀거든. 그 옆에는 자연히 움푹 파인 구덩이가 있었겠지.
안 그래도 왜소한 베리는 이제 더욱 왜소해졌어. 그 조그만 구덩이에도 쏙 들어달 정도로. 아, 범인은 그 전에 가방을 열고 부패방지제를 꺼냈어. 시신의 곳곳에 방지제를 뿌린 범인은 그 다음 단계로 베리의 시신에
석고를 마구 뿌리기 시작했어. 시신을 굳히려는거야. 마지막으로 캐리어 안에 비닐을 한 겹 더 덧대고, 그 비닐 속의 공기를 압축했어. 부피가 줄어야 묻기 쉬우니까.
이제야 비로소 완전범죄였지. 마지막으로 뒷마당에 가서 시멘트를 가지고 왔어. 우리 아버지는 시멘트 회사에서 일을 하시거든. 거기에서 임원이시기도 하고.
하여튼 구덩이에서 악취가 새어나오지 않게 단단히 시멘트를 쏟아부었어. 이제 굳기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나는거야.
완벽해. 아주. 이만한 쉼터가 또 어디에 있을까. 가장 아래에는 맏딸이, 그 위에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가장 위에는 막내딸이 편히 쉬고 있는.
그때는 참 어렸지. 아무것도 모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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