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눈앞에 갑작스레 펼쳐진 무한한 검은 어둠


"여긴 대체 어디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다.


지금의 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가족들과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고!"


"도와줘, 도와줘!"


"누가 있으면 대답이라도 해줘!"


< "아아, 아아, 시끄럽네" >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말을 걸었다.


"너는 누구야?! 네가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거야?!"


< "쉿, 잠시 조용히 해봐" >


검은 공간은 갈라져내리며 순식간에 붕괴했다.


그 시커먼 껍데기 너머에는 또 한 번 무한히 펼쳐진 백색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검은색 딱정벌레 하나가 서있었다.


< "만나서 반가워, 아 그리고, 이곳에 너를 데려온 건 내가 아니야" >


"그럼 대체 누구야?! 나를 이곳에 데려온 건!"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일 뿐이야. 다시 돌려보내 줘!"


< "조용히 해, 네가 그냥 평범한 인간이듯 나도 그냥 평범한 딱정벌레야" >


< "하지만 내가 너를 도울 수는 있을 거 같아." >


... 이해가 되지 않아.


어째서 내가 이곳에 끌려온건지


왜 사람 말을 하는 딱정벌레랑 대화를 하는지


<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냥 받아들여" >


"너, 내 생각을 읽는 거야?"


< "너는 말을 하고 있었던 적이 없어.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너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지" >


< "여기서 나가고 싶어?" >


"당연하지."


< "좋아! 그렇다면 내가 도와줄게, 멋쟁이 벌레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법이니까!" >


녀석이 앞 뿔을 덩실덩실 흔들며 말했다.


"너는 대체 뭐야? 이 공간은 대체 뭐고?"


"내가 납득 가능하게 그거부터 설명해 줘"


< "워, 워, 진정해 봐. 누가 똑똑이 아니랄까 봐 질문 꼬락서니 하고는" >


< "내가 무엇인지, 이곳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중요한 건 너야 너." >


< "여기서 나가야 하잖아? 안 그래?" >


"으음..."


맞는 말이긴 해.


< "잘 들어, 너는 지금 상식 밖에 이현상에 휩쓸린 거야." >


< "편하게 생각해, 2차원 존재가 3차원 존재의 놀음에 걸려들어 버린 거지!" >


< "그러니까 지금만큼은, 네 뇌를 비우고 생각해야 해" >


< "이곳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인지는 아무리 설명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


"... 일단 들어는 볼게"


"나갈 방법은 뭐야?"


미심쩍고 수상하지만 어쩔 수 없지


< "거 참 벌레 못 믿는 놈이네." >


아 이 녀석 생각을 읽을 수 있지


< "그래, 인마! 여기서 하는 말은 뒷담이 아니라 앞담이라고!" >


미안해...


< "괜찮아. 괜찮아. 멋쟁이 벌레는 마음이 넓으니까." >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는지 말해줘


< "좋아! 지금부터 잘 들어." >


< "일단, 네 이름, 나이, 가족관계, 직업, 네가 살아온 환경 같은 거" >


< "그걸 되뇌어 읊어봐" >


"음... 그래"


"내 이름은 김진명, 나이는 39, 가족 관계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살아 계심"


"아내가 있으며, 자식은 딸 하나, 아들 하나. 직업은 ----연구원, 내가 살아온 환경은"


어...?


"잠깐 방금 뭔가 이상한데"


< "다시 해봐! 방금 했던 말 그대로!" >


"내 이름은 김진명, 나이는 39, 가족 관계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살아 계심"


"아내가 있으며, 자식은 딸 하나, 아들 하나. 직업은 ----연구원, ..."


"이거 뭐지...? 기억이 안 나. 뭔가 날 거 같으면서도"


< "이거 이거 아주 큰일 났구만!" >


< "놈들의 마수가 벌써 네 대뇌피질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이야." >


"뭐...? 놈들...? 그게 누군데...!"


"너는 뭔가 알고 있는 거야?!"


< "아아, 나중에, 나중에 다 설명해 줄 거야. 놈들이 누구인지도." >


<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


젠장, 왜 저놈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데, 난 저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거야.


< "아이, 쪼다 같은 자식. 다 알려준다니까 글쎄?" >


< "인간이 벌레를 질투하냐 지금?" >


...씨발


< "어쭈, 욕도 하네" >


"네 앞에 알몸으로 서있는 기분이라고"


< "뭐 어때, 내가 인간 암컷도 아니고 벌레인데" >


< "아, 설마 벌레를 보고 끌려 하는 취향이 있다면 그건 내가 사양할게. 나도 수컷이거든" >


"그런 거 아니야 미친 새끼야."


< "워, 워, 분위기 풀어주려고 농담 좀 한 거야." >


< "자, 바로 본론으로 되돌아가자." >


< "잘 들어, 방금 기억나는 부분을 계속 되뇌며 읊어." >


< "그것들이 네 기억에 간섭하고 있어." >


그것들이 대체 뭔지...


아니다, 뭐 이따가 알려주겠지.


< "그래, 그래, 이제 말 통하네" >


"내 이름은 김진명, 나이는 39, 가족 관계 어머니, 아내, 딸 하나 아들 하나"


"내 이름은 김진명, 나이는 39, 가족 관계 어머니, 아내, 딸 하나 아들 하나"


"내 이름은 김진명, 나이는 39, 가족 관계 어머니, 아내, 딸 하나 아들 하나"


녀석이 말한 대로 반복해서 그것들을 읊조렸다.


< "네게 가장 중요한 것은..." >


내게 가장 중요한 것...


당장엔 기억 군데군데에 노이즈가 끼어있다.


하지만 가족을 향한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아내, 그리고 아이들"


"가족... 가족의 행복, 가족의 안전"


< "가족... 좋아, 그러면 가족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가슴속으로 계속 읊조려." >


"가족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족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족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내 말을 들으면서도 앞으로 그것들을 꾸준히 생각해" >


< "그것이 네 정신을 뒷받침하는 근간이 되어주고, 너를 너로서 남게 해 줄 거야." >


< "아마 이제 곧 어떤 일이 일어날 거야." >


"어떤 일?"


<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올 거야. 아니, 하늘이 아니야 사방에서" >


< "그 소리가 들리면 귀를 닫고 무시해. 방금 읊조린 것들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어" >


< "그다음, 놈들은 네가 잘 세뇌되었나 질문을 할 거야." >


< "그 질문엔 모두 이렇게 대답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 "질문이 중간중간 바뀌기도 하겠지만 논점은 결국 저거야.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 >


< "이해가 안 가겠지만 반드시 내가 시킨 대로 해야 해. 이것은 규칙이니까." >


규칙...


"이쯤 했으면 놈들의 목적을 알아도 되지 않으려나?"


< "아니, 아직 안 돼." >


< "나 역시 확신이 필요해." >


< "반드시 내 말대로 해야 해. 네가 실수하면, 놈들이 나의 존재도 알아차릴 거야." >


< "너를 도와준 멋쟁이 벌레를 생각해서라도, 네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꼭 내가 시킨 대로 해줘." >


"어...?"


하늘에서 무언가 치직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 "나는 숨어있을게." >


< "명심해. 네가 누구인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


< "무엇을 대답해야 하는지" >


... 하늘에서, 아니 사방에서 무언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딱정벌레의 말대로 나는 귀를 닫았다.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내 이름은 김진명, 나이는 39, 가족 관계 어머니, 아내, 딸 하나 아들 하나


가족을 지키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음 공해와 같던 수많은 노이즈들이 사그라들었다.


무언가 질문 같은 게 내 머릿속으로 우겨져 들어왔다.


[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


가장 중요한 것은 가... 아니


녀석이 시킨 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


[ 당신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는 ]


"사람을 해치는 행위"


[ 당신의 가족이 괴한으로부터 공격받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나는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


[ ----이상 없음 ]


"후우...!"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오던 질문의 세례가 끝났다.


구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다시 그 딱정벌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 "오우! 역시 똑똑이, 생각보다 기대 이상인걸?" >


< "나 멋쟁이 벌레만큼이나 엑설런트하고 퍼펙트 한 대처였어!" >


"이제 알려줘."


"네가 시키는 대로 했잖아."


"놈들이 누군지, 목적이 무엇인지."


< "좋아, 이 세상에 약속을 어기는 벌레는 없으니까." >


< "잘 들어, 너를 이렇게 만든 그것은 또 다른 너야." >


또 다른 나?


< "또 다른 너라곤 해도, 너의 겉껍데기를 뒤집어쓴 가짜에 지나지 않아." >


< "이해하기 쉽게... 도플갱어 같은 거라 생각해" >


도플갱어...?


"그런데 놈들이라 하지 않았어?"


< "지금 그게 중요해? 아무튼 계속 이야기할게" >


< "그것은 너의 영혼과 자아를 커다란 인형 안에 가둬놨어." >


< "그리고 지금 너의 살가죽을 뒤집고 너의 가족 옆에서 네 행세를 하고 있겠지" >


"잠깐, 잠깐...! 그 녀석이 그러는 이유가 뭐야?!"


"왜 나를 살려둔 거지? 도플갱어라면 나를 죽이고 내 몸을 빼앗는 게 더 쉬웠을 거 아니야?! "


< "이유...? 녀석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데는 이유 같은 건 없어" >


< "그놈은 악취미를 가지고 있어. 너를 포르말린 속에 절여 둔 개구리로 만드는 거야." >


"개구리...?"


< "방금 한 말, 사람을 절대 해치지 않는다." >


< "이제 곧, 녀석은 너의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네 앞에 나타날 거야." >


< "그 앞에서 네 가족을 옆에 끼고, 사람을 절대 해치지 않는다는 명령에 세뇌된 너를 보며 비웃고 있겠지." >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


< "아니야, 너는 할 수 있어." >


< "너는 네 가족을 지킬 수 있고, 네 삶을 되찾을 수 있어" >


< "그놈은 지금 자만하고 있어, 네가 세뇌가 풀린 줄 몰라" >


< "너는 놈의 목을 충분히 비틀 수 있어." >


< "그러면 이 껍데기 안에 갇혀있는 네 영혼도 해방될 것이고, 너는 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거야." >


그런데....


"그럼 너는 대체 뭐야?"


"너는 왜 나를 돕는 거야?"


"너는 왜 그 모든 걸 알면서 이곳에서 나가지 않는 거야?"


<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나갈 수 없어" >


< "처음부터 세상이 나를 그렇게 설계했거든, 신께서 말이야." >


< "아마 너 같이 괴물들에게 당하는 가엾은 사람들을 구해내는 게 내게 주어진 천명이겠지" >


< "만약 내 도움을 받아 탈출한다면, 딱정벌레 영정 사진 앞에 꿀물 하나만 놓아줘." >


< "너를 도와준 멋쟁이 벌레를 위한 선물로 말이야." >


역시... 뭔가 이상해.


< "그래, 그래, 쉽사리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믿어지진 않겠지" >


< "이제 곧이야. 내가 말한 것이 네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하면" >


< "너는 다시 한번 나를 믿게 될 거야." >


< "이상하고 이해가 안 가도, 그저 받아들여. 그게 지금 네가 할 일이야." >


그때, 내 앞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새하얀 유리창 너머로 이제까진 볼 수 없던 시야가 보여오기 시작했다.


"뭔가 보여...!"


"시야가... 시야가 보이고 있어...!"


< "놈이 온 거야." >


놈...?


< "방금 내가 말했던 놈" >


정말이다.


딱정벌레의 말대로였다.


녀석은 나와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양옆에는 내 아내와 아이들을 끼고 내 앞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시야뿐만이 아니다. 감각도 하나 둘 돌아오고 있었다.


청각도... 촉각도...


팔도... 다리도...


< "쓸 데 없는 의심 따위로 자신을 흔들어대지 마" >


< "가장 중요한 것은?" >


가장 중요한 것...


가족을 지키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다.


< "너는 누구지?" >


"내 이름은 김진명, 나이는 39, 가족 관계 어머니, 아내, 딸 하나 아들 하나"


< "놈이 올 거야.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어." >


< "눈앞에서 너를 조롱한 후, 네 삶을 가로채가겠지" >


< "실컷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결국 네 아내와 아이들까지도 죽이고 말 거야." >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


어?


< "정신 차려! 친구!" >


< "놈이 네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 거야!" >


< "가장 중요한 것은?!" >


내게 가장 중요한 것.


"가족을 지키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 "자, 거의 다 왔어. 저 악마가 네 앞까지 다가오면 놈이 뒤집어쓰고 있는 가증스러운 인두겁을 뜯어발겨버리는 거야." >


< "네 손으로 쟁취하는 거야, 네게 가장 소중한 것들, 사랑하는 아내도! 아이들도!" >


<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서!" >


그 녀석이 내 코앞까지 다가선다.


해야만 한다.


이젠 어쩔 수 없다.


< "자, 네가 가지고 있는 무쇠의 육신으로 놈의 목을 잡아 비틀어! 어서-!" >


순식간에 녀석의 목과 머리를 손으로 잡아 돌리며- 뚜둑-!


그 녀석의 목을 꺾어 죽여버렸다.


"하아... 하아..."


"내가 해냈어. 얘들아, 여보"


목소리를 내뱉는 순간, 아내와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내 눈앞에서 도망쳤다.


"하아... 하아... 이제 원래대로 되돌아갈 거야."


괜찮아. 괜찮아....


아내와 아이들한테는 충격이겠지만...


돌아간 뒤에 모두 설명하면 돼.


"..."


"그런데 대체 언제...?"


나는 뒤돌아 딱정벌레를 바라봤다.


녀석은 온몸이 붉게 변해 조소를 내뿜고 있었다.


< "킬킬킬킬..." >


"네가 시키는 대로 했어."


"네 말대로 했다고"


"왜 난 그대로인 거야?!"


앞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 "경고! 경고! ----의 폭주로 인한 인명 피해 발생. 폐기 처분 실시." >


< "경고! 경고! ----의 폭주로 인한 인명 피해 발생. 폐기 처분 실시." >


뭐야, 무슨 소리냐고...


이해가 되지 않아...


나는...


난...


"내 이름은 김진명, 나이는 39, 가족 관계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살아 계심"


"아내가 있으며, 자식은 딸 하나, 아들 하나. 직업은 ----연구원, ..."


"----"


"나는 ----"


뭔가... 끼워 맞춰질 거 같은데.... ----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고 있어.


너...


"너, 너는 알고 있지?"


"말해... 대체 ----가 무엇인지!"


붉은색 딱정벌레는 악의에 가득 찬 조소만을 내뿜고 있었다.


< "킬킬킬킬킬....! 킬킬킬킬킬....!" >


유리창 너머로는 총을 든 군인들이 내게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여왔다.


대체...


대체 뭐야?


나는 대체...


앞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 "경고! 경고! ----의 폭주로 인한 인명 피해 발생. 폐기 처분 실시." >


뒤에서는 끝없는 악의가 느껴지는 숨넘어갈 듯한 조소만이 들려왔다.


나는 대체 무엇이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