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130.
-언니, 지금부터 제가 하는 모든 말이 중요한 건 아니란 걸 명심해두세요. 아무리 제가 조사관이라고 해도 언제나 필요한 말만 할 순 없으니까요. 그래도 말 중에는 생각없이 뱉을 수 없는 말도 있잖아요.
-.......
-후, 어디서부터 말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사실 저는 그리 귀한 집에 자란 사람은 아니었어요. 하긴, 귀한 집에 자랐으면 이런 호화스러운 건축물에 살고 있었겠죠? 마치 베르사유 궁전을 떠올리게 하는 듯한 유럽 건축물처럼 말이에요. 저는 이런 데서 자라는 게 꿈이었거든요. 흔한 공주병이었을지 모르죠. 혹시 모르죠? 이런 곳에 진짜 공주가 살고 있을지?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금방 꿈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어요. 생각해보세요. 5살 아이에게 너무나 큰 집은 19살에게도 제법 큰 법이라고요. 그게 특히나 성처럼 큰 대저택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죠. 보폭이 얼마나 늘었다고 단번에 돌 수 있겠어요? 분명 그 압도적인 크기에 심란한 마음이 들 거예요. 밤에는 분명 혼자서 화장실도 못 갔을 거고요.
-누군가가 있을까봐요?
-흔한 얘기잖아요? 어두운 밤, 우르릉쾅쾅 치는 복도에 혼자 발걸음 소리 내며 다니다가 귀신이나 괴물에게 쫓기는 거요. 하지만 현실은 꽤 다르단 걸 알았죠. 사실 걷는 것 정도로는 소리가 그렇게 나지 않아요. 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게 아닌 거죠. 처음부터 거기 있던가, 아니면 다른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무서워해야 할 건 의외로 소리 내는 게 아닌 침묵이었던 거죠.
-계속 말씀하시죠.
-저는 이런 곳에 살라고 지금 말하면 그렇게 잘 살 자신이 없어요. 방이 너무 많잖아요. 이런 방들 문단속은 어떻게 할 건데요? 저희 어머니는 항상 방문 열어두라고 하는데, 이런 곳은 다 열어두면 오히려 미관상 보기 안 좋거든요. 그렇다고 다 잠그면 열쇠꾸러미는 얼마나 무겁겠어요. 물론 전자동 장치도 아닌데 몇 번 세게 내리치면 부서질 것 같은 문고리지만, 그런 짓하면 분명 어머니가 혼낼 게 분명하니까요. 수리비 내기도 싫고요.
-네, 일단 알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필수적인 방은 열쇠로 잠그면 안 되죠. 화장실이라든가, 부엌이라든가. 아,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큰 곳은 거실과 부엌이 붙어있는 그런 구조는 아니겠네요. 어쨌든 제 말은 중요한 방들은 잠궈선 안 된다는 거죠. 그게 잠겼다면 괜히 도둑 들까 호들갑을 떨면서 방문을 전부 잠갔을 게 분명하니까요. 그걸 일일이 다 여는 게 얼마나 불편할까요? 저는 상상만해도 끔찍해요. 저라면 적어도 침입자도 오줌은 싸게 화장실은 열어둘 거예요.
-네. 계속하시죠.
-그런데 이런 곳은 화장실도 그냥 화장실이 아니잖아요. 집 크기와 화장실 크기가 비례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흔히 사람 심리가 그렇듯 큰 집에서 좁은 화장실은 멋이 안 산단 말이죠. 근데 화장실에 뭘 들이겠어요? 정말 큰 욕조 하나 만들면 나머진 정말 더 챙길 게 없는데, 아, 혹시 부자들의 생각은 다를까요? 제가 중세 귀족이나 부자여본 적이 있어야죠.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그리 귀한 집에서 자란 사람은 아니거든요.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엄청 큰 공간에 욕조 하나만 딸랑 있고 거기서 거품 목욕하는 부자가 나오잖아요. 그런 걸 보면 저 사람은 그럼 알몸으로 방 끝에서 욕조까지 걸어들어간 거야? 나올 때도 그래야 하고? 라는 생각을 종종 해요. 아예 온천 같이 꾸며졌으면 모르겠는데, 욕조 하나만 덩그러이 있는 건 좀 기괴하잖아요? 거기에 혼자 물 채워놓고 거품 있어봐요. 저는 거기 못 들어가요. 거기 있다가 뭐가 필요하면 알몸으로 방을 가로질러야 할 텐데, 으, 그럴 바에 그냥 샤워나 하고 말죠.
-이해합니다.
-언니는 욕조에 뭐 띄워두는 거 좋아하세요? 저는 어렸을 땐 오리 인형 같은 거 띄워두고 놀았었거든요. 거품 있으면 거품 가지고 막 장난 치고. 근데 커서 욕조에 몸 담그니까 오리 인형은 별로 생각도 안 나요. 거품은 거추장스럽고. 그래서 가끔 다 치우고 물 속에 비친 제 모습을 감상할 때가 있어요. 으, 솔직히 좋은 풍경은 아니죠. 언니는 몸에 자신 있어요? 저는 별로요. 정말이에요. 절대 오래 들여다 볼 수 없어요. 그래서 금방 시선을 돌리고 말죠.
-예,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여다봐서 자기 몸을 한 번 확인하는 건 나쁜 게 아닌 것 같아요. 어쨌든 물 속에 비친 것도 비친 거잖아요? 비록 약간 굴절돼고 못나 보일 순 있어도, 어쩌면 그게 진짜 몸일 수도 있는 거죠. 너무 헛소리 같았나? 하여튼 그렇게 목욕하고 나오면 몸을 씻어야 하는데, 수건도 매우 중요하죠. 어머니가 되게 자주 깜빡하시는 게, 걸레랑 수건을 같은 곳에 넣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 몸을 닦다가 냄새가 이상해서 맡아보면 으, 장난 아닌 지독한 냄새가 올라오는 거죠. 이상한 수건으로 몸 닦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것도 없잖아요.
-예, 그 말이 맞습니다.
-너무 화장실이랑 목욕 얘기에 집중했네요. 다시 큰 집 얘기로 돌아와서, 또 영화와 드라마 얘기인데, 사실 제가 부자와 귀족의 삶을 어디서 챙겨보겠어요? 다 영화랑 드라마덕이지. 아, 소설도 있는데 그건 텍스트니까요. 제가 상상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건 조금 다르잖아요. 어쩌면 많이 다르기도 하죠. 특히 식당이 그래요. 아주 긴 식탁에 굳이 제일 멀리 떨어져 마주앉아 식사하는 거. 저는 그렇게 앉으면 상대방 얼굴이 보이나 싶더라고요. 솔직히 그렇게 앉으면 제 먹을 거에 집중만 했을지 몰라요.
-그렇습니까?
-근데 이런 곳에 식사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저희 집에서야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하면 나와서 밥 먹으면 되고, 회사 다닐 때야 점심 식사 시간이 맞춰져 있으니까 그때 먹으면 되는데, 이런 곳도 식사 시간을 정해두는 걸까요? 아니면 누군가가 종 같은 걸 울려서 식사할 때가 됐다고 알리는 걸까요. 적어도 종루는 없는데 하인이 일일이 돌아다니며 도련님, 식사하실 때가 됐습니다. 하는 걸지도 모르죠. 근데 저 같으면 그냥 식사 시간 때 알아서 오라고 할 것 같아요. 가는 입장에서도 좋잖아요. 와보니까 식사가 딱 차려져 있는 거요.
-편하긴 하죠.
-하지만 그렇잖아요. 추리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상황이 보통 이런 곳에서 혼자 차려진 음식 혼자 먹다가 사망하고 그걸 가지고 남들이 추리하는 거요. 사실 생각해보면 딱히 그런 장면이 그렇게 많았나 싶으면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해요. 근데 그게 또 흔하다고 인식된다는 건 그만큼 사람들이 섬뜩하게 생각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누가봐도 수상하단 거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저택에 있어서 가장 수상한 장소라고 하면 뭐니뭐니 해도 서재 아니겠어요? 온갖 살인사건의 원조 장소랄까. 책들에게 둘러싸여 죽는 기분은 상상하기 힘들지만요. 솔직히 이런 큰 곳에서 큰 책장 들여 책을 가득 채우려면 몇 권이 필요할까요? 그 책들은 다 읽었을까요? 전부 유용한 책들일까요, 아니면 불쏘시개가 몇 개는 섞였을까요. 그 책들 자기만 가지고 있고 남들에겐 빌려주지 않는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런 책들을 잔뜩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런 사람 주위에 둔 적도 없는데 알 수 있을 리 만무하죠. 근데 또 말하다보니까 생각난 건데, 서재에는 또 비밀스러운 장치가 많기로 유명하잖아요. 특정 책들을 빼면 비밀 장소가 나타난다든지. 보통 그런 장소는 장르에 따라 용도가 되게 다양해지죠. 호러 소설에선 보통 음험한 사교도들의 비밀 회동 장소로 연결돼 있다든지, 스릴러 소설에선 비밀 출구로 이어진다든지, 로맨스 소설에선 비밀 약속을 지키기 위한 통로이기도 하죠? 아, 이건 스릴러랑 겹치나?
-뉘앙스가 다릅니다.
-그래서 말이죠. 그런 비밀 통로는 함부로 개방하면 안 되는 거기도 하거든요. 누가 보고 있을 때 열면 그 누가 똑같이 따라해서 열고 들어오잖아요. 그러니까 혼자 있는 걸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이런 비밀 통로 이용할 때 그렇게 뒤를 돌아보고 이리저리 눈치를 자주 보는 건가봐요. 근데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저는 이런 도서관 같은 분위기에 있다보면 막 샤우팅해보고 싶어지는 거 있죠? 와아아악!!!
-.......
-잔인한! 여자라! 나를 욕하지는 마! 잠시 너를 위해 이별을 택한 거야!!!
-.......
-잊지는 마! 헤이! 내 사랑을! 헤이! 너는 내 안에 있어!!!!!
-그만하면 됐습니까?
-길진 않을 거야. 슬픔이 가기까지!!! 영! 원! 히이!!!이!!!
-.......
-들어갑니다.
-네, 조심하셔야 합니다.
*****
*이후 130번째 조사관의 통신이 끊겼으나 생명 신호는 계속해서 잡힘.
*관측기록사무 2팀 구혜령, 5일 휴가 신청. 승인됨.
*389번째 조사관 투입때까지 130번째 조사관의 생명 신호는 계속해서 잡힘. 발견 사례는 전무.
*3번째 조사관(관광 가이드)과 달리 땅끝마을에 누구도 진입하지 않았음에도 생명 신호는 꾸준히 잡힘.
*130번째 조사관 구출을 위한 몇 차례의 대저택 탐사 이후 조사 방향을 돌려 마을 구조와 변수 통제에 주력.
*201번째 조사관 이후 주민센터의 등장으로 인해 130번째 조사관 구출은 잠정 보류.
*폐쇄 이후 대응제거적출팀에서 130번째 조사관의 외형과 특징, 성격, 말투 등을 상세히 정리해 변칙 개체로 등록.
*2023년 1월 1일. 130번째 조사관의 공식적인 사망 처리.
-----
130번을 다들 어떻게 상상했을지 모르겠네ㅎㅎ
다들 읽어줘서 꺼마워.
정통 나폴리탄(?)도 쓸 수 있으면 써보려고 노력해볼게.
원래 말이 많은 것도 있는데, 대저택 탐사 앞두고 긴장해서 아무말 대잔치하는 느낌도 있네 구혜령은 왜 5일 휴가 쓴거야? 정들었어서 긍가 - dc App
처음에 한 대사가 중요함. 모든 말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생각없이 내뱉는 말은 아님. 그리고 황야편에서도 묘사됐지만 얘네도 사람임... 130번의 경우 땅끝마을 기준 한달 실제 시간 기준 약 두 달 가까이 통신하고 지냈음. 정신적 충격이 없을 리 없지. 물론 그래도 복귀해서 작전 수행해야 하지만.
철물점에서 입터는 장면때문에 남자일줄 알았는데 여자였네 ㄷ 깡이 상당하구만
한달버티는 씹에이스인데 초반투입이라 정보가 부족해서 허무하게 죽엇네
여기 저택이 호화롭고, 식탁이 넓고, 서재가 있는데 비밀 통로가 있다는 걸 저런 말들로 돌려 말하는 것 같은데 맞나?? 130번 남자일 것 같았는데 여자였구만.. 씹에이스다
오 좀 추리해냈구나 사실 그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전달했음ㅋㅋ
누군가가 쫓아오는데 침묵할 시에 쫓아오고 떠들면 안쫓아오는건가??
정확함 침묵을 쫓아옴
잘 봤다 개추
누군가가 대화 듣고있어서 저렇게 둘러대며 내부 설명해주는거야? 아님 정신 안 잃으려고?
윗윗댓이 맞춤
130번 결국 뒤지거나 마을 주민 된거임?
대저택의 메이드가 되었ㄴㅏ? 아님 살아있는 박제품이 되었나?
쭉 보고 있는데 재밌다 마지막에 티얼스 가사가 꼭 혜령이한테 하는 말 같네 잘봤음!!
저택에 방이 많다. 한번에 돌아볼 수 없을정도로 크다. 소리를 듣고 찾아오는게 아니라 침묵하면 찾아온다. 방문은 닫혀있는것 같고 문고리를 내리쳐서 열 수 있다? 확실하지 않음. 식당과 화장실 언급. 들어가본듯.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욕조가 있음. 오리 인형과 거품을 치워봄. 좋은 풍경이 아니었다. 수건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
식당 진입. 식사가 차려져있음. 수상해서 먹지 않음. 서재에서 비밀통로 발견 진입하고 통신 두절
해석이 있었구나 이런 ㅋㅋ 몰입해서 찾아보니 더 재밌었음 재밌게 정주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