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친구.

이 글 볼 때 왠지 익숙한 느낌 들지 않았어?

막 이상한 괴물같은게 나오는 장소에서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준 규칙서랑 비슷하다던가 말야.


익숙한 느낌은 드는데 그런 기억은 없다고?

축하해, 널 도와준 집단은 사람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있고 유능한 집단인가보네.

이 규칙서가 네게 보내지지 않을 정도로 유능하진 않았지만 말야.


...그래, 지금 네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아.

널 놓쳐버려서 화난 괴이들이 널 추적하고 있거든.

기억이 있다면 당연히 여기 적힌 규칙들을 따라야 한다는걸 알거고, 기억이 없어도 이 규칙들은 별로 어려운게 아니니까 부디 따라줬으면 해.

기껏 지옥같은 곳에서 살아돌아왔는데 허무하게 죽으면 슬프잖아?


네 주위 풍경도 사람도 평소와 똑같은데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들리는게 당연한건 아는데.

진짜로,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꼭 따라줘.




1. 지금 네가 있는 장소는 현실이 맞아.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이 네가 이상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게 하면 안 돼.

괴짜 취급하거나 평판이 떨어지면 그나마 나은거고, 친절한 사람들은 너를 정신병원에 넣으려고 할거거든.

알고 있겠지만 정신병원은 괴이들이 나타나기 딱 좋은 장소야.



2. 혼자 있는걸 가급적 피해. 자신의 영역 밖에 나온 괴이는 한번에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힘이 없거든.

그러니까 괴이들이 널 노리는건 네가 혼자 있을 때나, 다른 사람이 자고 있거나 취해서 주위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상태일 때야.

위험하다 싶으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도망치던가, 자고 있는 사람을 억지로라도 깨워.

미친놈 취급받겠지만 다시 거기로 끌려가는 것보단 낫잖아?



3. 어둠이 자연적인 어둠인지 진짜 어둠인지 확인해.

대부분의 어둠이 위험하진 않지만 괴이들이 널 삼키기 위해서 퍼뜨린 어둠은 위험해.

자기 전에 불을 끌 때 청각, 촉각, 시각을 이용해서 진짜로 불이 꺼진건지, 아니면 네가 불을 껐다고 생각하도록 괴이가 속인건지 확실하게 확인해둬.


불이 꺼질때 나는 전자음이나 탁 하는 버튼소리로 한번,

스위치를 만질 때 터치식이라면 감촉이 평소와 같았는지, 아니라면 제대로 '꺼짐'에 스위치가 위치해있는지 촉감으로 한번.

마지막으로 눈으로 제대로 스위치가 꺼져있는지 확인하면서 한번...이건 휴대폰을 사용하도록 해. 요즘 손전등 기능도 없는 휴대폰은 없잖아?


귀찮지만 반드시 확인하고, 햇갈린다 싶으면 불을 한번 켰다가 다시 꺼.

불 제대로 꺼졌나 확인하는 정도는 시간도 오래 안걸리고, 한번 켰다 끄는 정도는 전기세도 많이 안드니까 안전이 우선이야.



4. 마찬가지로, 물과 가스도 조심해.

보통은 어둠만 조심하면 되지만, 조금 강한 괴이는 어둠 대신 물과 가스로 너를 감싸서 자신의 영역으로 데려가려 할거야.


기억하고 있지? 청각, 촉각 시각.

이 세가지를 활용해서 수도꼭지가 제대로 잠겨있나 아닌가, 괴이가 물을 모으는 중인가 아닌가 확인하도록 해.

가스의 경우는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지만 꼭 확인해야 해.

옅게 자고 있으면 가스냄새를 맡고 깨어나서 도망칠 수 있지만 깊게 잠들면 가스냄새가 나는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5. 집열쇠나 현관 비밀번호도 끊임없이 확인해.

집열쇠를 자신의 영역과 통하는 열쇠로 바꿔치거나, 마찬가지로 현관 비밀번호도 자신의 영역과 통하는 암호로 기억 속에서 바꿔치는 일도 가끔 있거든.

특히 비밀번호가 위험해.

숫자 하나만 바꿔쳐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도 자칫 잘못 누르면 바로 이동되도록 만든다던가 수작부릴 여지가 크거든.


집열쇠 쪽은 물리적으로 바꿔칠 힘이 없어선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 현관 비밀번호를 꼭 확인해두도록 해.

정 불안하면 은밀한 곳에 문신이든 상처로든 새겨둬.

그 녀석들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면 사람에게 상처입힐 수 없으니 네 흉터가 네 안전을 보장해줄거야.



6. 괴이 관련 집단을 믿지 마.

초상이니 초현실이니 어쩌구 하는 정부기관이든, 기업이든, 민간단체든.

그들은 괴이들이 머무르는 장소를 관리하는 것만 해도 바빠서 널 애프터케어해줄 여력은 없어.

네가 괴이가 아니고, 괴이에 침식된 것도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면 그 다음에 네게 신경쓰는건 네가 죽거나 실종되었을 때 정도야.


다시 말해서, 네게 접촉해온 괴이 관련 집단은 괴이가 널 속이기 위해 만든 환각이거나,

운이 나쁘면 널 잡기 위해 괴이가 자기 영역에 들어온 사람을 세뇌해서 내보낸 공작원이라는거지.

이 녀석들은 널 상처입히거나 물리적으로 강압하는 것도 가능하니까 필사적으로 도망쳐.

상처는 최대한 입히지 마. 상처입힌다고 괴이의 영역에 끌려가는건 아니지만 자칫하면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거든.

알겠지만 감옥도 정신병원 다음으로 괴이가 나타나기 딱 좋은 장소야.


혹시 네가 얼굴을 아는, 널 구해줬거나 규칙서 덕분에 탈출한 다음 정보수집을 위해 너와 면담했던 사람이 찾아와도 믿으면 안 돼.

괴이 관련 집단에 속한 사람만큼 괴이의 영역에 들어갔을 확률이 높은 사람은 없다는걸 기억해.

그들은 구조활동을 하다가 괴이에게 잠식당한 불쌍한 영웅들이야.

네가 그들을 믿은 바람에 괴이에게 잡혀가면 틀림없이 엄청 괴로워하겠지.



7. 잠을 옅게 자. 가위눌리는 것처럼 몸은 자고 있는데 정신은 깨어있는 상태가 최적이야.

너무 깊게 잠들면 꿈을 통해 괴이가 널 자신의 영역으로 데려갈수도 있어.

가위눌리는 요령은 잠이 들락말락할 때 순간적으로 놀란 것 마냥 정신을 차리는걸 반복하는거야.


혼자 있을 땐 이런 식으로 반만 잠들고, 주위에 다른 사람이 많을 때 꾸벅꾸벅 졸든 대놓고 자든 해서 부족한 잠을 보충해.

전에 말했듯이 주위에 사람이 많으면 괴이들은 네게 손대기 힘들어.

영원히 잠을 안자거나 반만 잘 수는 없는 만큼, 다소의 평판 하락은 감수하는게 나아.



8. 여기에 적히지 않은 사항이라도 조금 불안하다 싶으면 경계해.

알고 있겠지만 규칙서에는 확인된 정보만 올라오고, 확인되지 않은 현상은 생환한 사람이 없거나 있어도 증언할 수 없는 상태로 돌아온 매우 위험한 것이란 뜻이야.

조금 불안하다거나, 위화감이 든다던가...


예를 들어서 엘리베이터가 평소보다 음침하다던가 방 구석에 뭔가 사이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다던가 책이나 인터넷의 문자가 평소와 다른 것 같으면 조심해.

5번에서 말했듯이 흉터가 네 안전을 보장해줄거야. 사실 흉터까진 낼 필요 없어. 고통이면 충분해.

다만 고통만으론 부족할까봐 흉터가, 피가 날 정도로 확인하는거지.



9. 여태까지 말한 내용은 별로 어려운게 아니고, 냉정하게만 있으면 죽을 일도 다칠 일도 없어.

그러나 이렇게 괴이의 습격을 신경쓰면서 사는게 귀찮다면, 혹은 힘들다면...

널 노리는 괴이가 있는 곳으로 다시 가보는게 좋아.


다시 가서 자신을 납치해봤자 네가 바라는건 이룰 수 없을거라고 증명해.

혹은 괴이가 너를 추적하기 위한 도구, 가령 네 피라던가 살점이라던가 네가 쓰던 물건을 회수하는 것도 좋겠지.

너 말고도 놓친 사람은 많을테니까 이렇게 증명하거나 찾아오기 어렵도록 하면 괴이도 너를 포기할거야.


만약 자신이 어디서 괴이와 관련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으면 네가 가장 기피하는 장소를 찾아가.

더러운 맨홀 뚜껑 아래라던가, 학교나 회사, 집 옥상의 난간 너머라던가, 지하철이 다니는 철로 한복판이라던가, 한밤 중의 바다라던가...

네가 가장 가기 싫어하고 끔찍하게 여기는 장소가 네가 괴이와 관련된 장소일거야.

아무리 기억을 지워도 괴이와 관련된 기억은 무의식 중에 남는 법이거든.


단, 냉정해져야해.

네가 찾아간 장소가 진짜로 괴이가 있는 곳이라면 몰라도 그냥 평범한 사람들도 위험하다고 거리낄만한 곳이라면...

음, 예를 들어서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리면 추락해서 죽고, 철로에 드러누우면 전철에 치여서 죽겠지?

...냉정하게만 있으면 죽을 일도 다칠 일도 없어.

아니, 괴이가 있는 장소로 가면 죽거나 다칠 일이 생기겠지만 적어도 현실에서는 죽거나 다칠 일이 없어.



마지막으로, 행운을 빌게. 혹시 이 현상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다면 어딘가에 적어줘.

우리처럼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에게 네가 얻어낸 정보가 자동으로 갱신될거야.

소정의, 혹은 상당한 포상금은 기대하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