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 사귄 한 친구는 문득 나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


- 그거 알아? 비명은 빨강이고 눈물은 파랑이야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그 여자애는 감정을 느낄 때 색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화나면 온 세상이 희미하게 빨갛게 보이고, 슬플 때는 또 희미하게 파란색으로.


마치 눈앞에 셀로판지를 겹쳐놓은 것처럼, 어떤 감정을 느끼면 그에 맞는 색으로 세상이 칠해진다는 말이었다.



- 언제부터 그렇게 보였던 거야?


라는 질문에, 친구는 태어날 때부터라 답했고 처음에는 모두가 자신처럼 감각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 애는 평소 이야기를 깊게 들어주던 나한테 처음으로 말해준 것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를 반신반의했지만 고민 끝에 밝힌 것이란 말에 믿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일로 거짓말할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이야기는 어렸던 나의 흥미를 끌기엔 충분했다.


마침 그 애도 자신의 감각을 더 알아보고 싶었는지, 며칠이 지나 방학을 앞둔 날,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태평하던 우리는 햇빛이 쨍쨍하던 여름을 헤매며 색깔을 찾아다녔다.




우리의 색깔 모험담은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그 아이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즐거웠다.


우리의 은빛 여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회색을 배웠고, 학교 도서관에서 같이 소설을 읽으면서 주황색을 알아냈다.


하천물에 발을 담그며 청색의 의미를 되짚었고, 


부모님 몰래 집을 나와 깊은 밤 별구경을 하던 날은 끝없이 푸르렀다.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너에게 품었던 감정이 진홍색임을 고백했을 때 나는 둔탁한 흑청색이었지만


이후 손을 잡았던 나날은 화사한 노란색, 입을 맞추던 그 순간만은 찌릿한 주홍색.


너를 처음 껴안았던 날, 우리는 옥색이 무얼 뜻하는지도 알아버렸다.


우리는 매일같이 세상을 금빛으로 칠하고 다채로운 팔레트를 하나하나 채워갔다.


고작 여정이 시작된 지 열두 달이 지났을 무렵, 우리의 소중한 스케치북은 어느새 마지막 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정의 끝에는 오직 청록색만이 남아있었다.




너는 분명 청록색을 느껴본 적이 있다고 했지만, 그게 대체 언제였을까.


우리는 그 애증의 청록색을 다시 피워내기 위해 다양한 것을 함께 했으나 결국에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웃었다.


우리의 청록색은 마지막 과제, 그걸 알아내기 전까지 이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빨간색이던 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노랗던 날이 더 많았잖아. 가끔은 주홍색을 즐기면서.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파릇한 미래를 꿈꿨다.


그건 정말이지, 그저 달콤한 꿈일 뿐이었다.








나는 네 전화를 받고 곧장 너의 집으로 뛰었다.


- 사방이 온통 빨간색이야


빨간색의 목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떨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의 색을 물었다.


- 무슨 일이야? 짜증 나는 일 있어?


그 말에 너는 이렇게 대답했다.


- 아니.. 이제는 보라색만 보여.


그 뒤 전화는 끊어졌지만, 난 고민도 않고 집에서 뛰쳐나갔다.


당장 너를 만나지 않으면 우리의 색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흑청색이 회색이 될 때까지 뛰었다.


회색이 검정색으로 변하지 않기를 빌면서 뛰었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네 집은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너의 세상이 드디어 나에게 전염됐던 걸까.


왜 내 눈에도 사방이 온통 빨간색 뿐이었던 걸까.


그 순간 이해해버린 너의 보라색은,


대체 어떻게 떨쳐내야 할까.


검정색 마침표가 찍히기엔 너무 일렀는데.


.


.


.


.


,



많은 시간이 지난 요즘이지만, 난 아직도 우리의 여정을 떠올려본다.


빛바랜 아이보리 추억을 꺼낼 때마다 풍겨오는 아름다웠던 어린 날들의 향취는.




하나 더 고백하자면,


너를 떠나보낸 이제서야 청록색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것 같다.


설명할 수 없는, 이 감각을 너는 느껴봤던 걸까.


그럼에도 나는 청록색을 부정했다.


우리의 여정을 이렇게 끝맺어버리면 그만 펑펑 울어버릴 것만 같았기에.






이건 녹슨 지저분한 청록색이 아니다.


노을 지는 금빛 하늘 위, 파묻혀버린 파란색이다.


그저 한없이, 그렇기를 바랄 뿐이었다.







비명은 빨강, 눈물은 파랑,



너는 틀림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