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석 머리받이에 기대자마자, “띠—잉” 하는 승무원 안내음이 울렸다. 굽이진 한강 다리를 벗어나던 열차가 곧 시속 300킬로를 찍었다.


나는 가방에서 막 갓끈처럼 꼬인 이어폰을 꺼내다가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크림색 셔츠에 체크 재킷을 걸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이로 치면 서른둘쯤? 


그는 열린 수첩에 쓰여 있는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삐뚤빼뚤한 글씨 사이로 ‘근현대사 특강 메모’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가 수줍게 말을 걸었다. 검은 볼펜 한 자루를 건네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뚜렷한 표준어로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발음이 또렷한데도 억지로 풀어쓴 듯 어딘가 딱딱했다. 순간 아, 사범대나 교대 출신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내 군번줄이 달린 지갑이 가방 입구에서 살짝 튀어나와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펜을 돌리며 물었다.


“혹시 휴가 복귀 중이신가요? 요즘 병사들도 KTX 많이 탄다던데…”


“아, 아니요.”


황당하다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복귀가 아니라 복학이요. 군대는 벌써 다녀왔습니다. 만기제대하고 이번 학기 복학이라, 내려가서 집 정리 좀 하려고요.”


“아! 전역 축하합니다.”


그가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는 전역하고 나면 석 달쯤 공백이 있던데, 여행도 겸하시나 보네요.”


나는 맞장구치며 대학에 돌아가기 전에 ‘세상 구경’을 조금 더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 말을 계기로, 대화는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그러니까요. 요즘 학생들은 전쟁 이야기를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합니다. 아무리 75년 전이라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저도 그 ‘요즘 애’였죠. 군에 가서야 ‘이게 내 일이구나’ 싶더라고요. 총만 잡아도 땀이 식질 않는데, 참.”


“그렇죠.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실감하기 쉽지 않죠.”


그는 창밖 풍경을 훑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래서 수업 때마다 ‘실제 거리감’을 강조합니다. 학생들보고 ‘그 방어선이 어디였는지 지도에 표시해 보라’고 하면 의외로 다들 손이 멈춰요.”


그가 캔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며 말을 이었다.


“가끔은, 숭고한 희생으로 나라를 지켜 주신 분들께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저는 역사 선생이니까요. 덕분에 우리가 이 땅에 서 있을 수 있는데 말이죠.”


나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네?”


“그분들은…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심하시지 않을까요? 전쟁을 잘 모른다는 건, 그만큼 평화롭다는 뜻이잖아요. 낯선 군사용어를 몰라도, 포성이 멀어졌다는 증거니까요. 저라도 후세대가 그저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평화롭길 바랄 것 같아요.”


콜라 캔을 내려놓자, 탄산이 작은 기포를 툭— 하고 터뜨렸다. 그는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


잠깐의 침묵 끝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게요. 편히 살아 준다면 분명 그분들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는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도 한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창에 비친 그의 눈동자는 기차 불빛에 잠깐씩 가려졌다가 드러났다. 마치 멀리서 기적(汽笛)이 켜졌다가 꺼지는 것처럼.


어색한 정적이 흐르자, 그는 일부러 가벼운 화제로 방향을 틀었다.


“부산 가시면 뭐부터 드실 건가요? 저는 일정 끝나면 밀면을 노리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갈치조림이요. 집에 가면 늘 식탁에 올라와 있거든요.”


그는 좋은 선택이라는 듯 약간 웃었다. 


“좋은 선택입니다.” 그가 웃었다. “저도 돌아가기 전엔 꼭 갈치조림을 먹고 갈 겁니다. 며칠 후 다시 돌아가야 하지만, 그 정도 시간은 있겠죠.”


“일정이 빡빡하신가 보네요.”  


“네, 몇 달 뒤 ‘75주년 기념 역사 강연’ 준비 때문에요. 전쟁이 일어난 당일을 기념하기 위해 침공이 일어났던 그날, 첫 포성이 울렸던 시간에 맞춰 방송하거든요.”


“TV에도 나오시나요? 저도 보고 싶은데.”


그는 수첩을 들여다보다 빙긋 웃었다.  


“방송엔 나오지만… 아마 못 보실 겁니다. 유명하진 않거든요. 마음만 받을게요.”


열차가 대구를 지날 즈음, 객실 조명이 한 단계 낮아졌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즉석카메라를 꺼냈다. 금속광택 대신 잔흔 없는 회색 무광이 눈에 박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창가 쪽 풍경이랑 같이 한 컷 찍어도 될까요? 나중에 수업 자료에 쓰일 수도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나는 몸을 살짝 비켜 창을 등졌다.


찰칵―,

  

얇은 사진지가 밀려 나오며 레몬 껍질 같은 향이 흘렀다. 그는 사진 아래 모서리에 날짜를 적었다.


‘07-02 / KTX 11호차’


“감사합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수첩 사이에 사진을 끼워 넣었고 우리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깨달음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 


문이 열리자, 훈풍과 함께 사람들의 대화가 쏟아졌다. 그는 객실 앞쪽으로 몸을 돌려 나보다 먼저 통로로 빠져나갔다.


“선생님!”


뒤에서 불러 봤지만, 이미 군중 사이에 묻혀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입안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