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아름답지 못한 결말을 맞이한 전 여자친구는 이별을 납득하지 못했고, 그 결과 뒤틀린 애정은 범죄의 형태로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제는 교도소에 들어가 있다지만, 아직도 밤길을 걷노라면 누군가에게 쫓기는 느낌에 몇 발자국 떼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정신과를 찾아갔지만 약사에게 건네받은 약은 아빌리파이, 바로 조현병 약이였다.








조현병을 앓는다는 것은 부정의 연속이다.


내가 믿어왔던 상식을,


느끼는 감정을,


선명한 기억을,


눈을, 귀를, 코를, 입을, 피부를 계속해서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부정을,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행위를 매 순간마다 반복할 수 있다면 조현병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처음엔 무척이나 두려운 사실이었지만, 어느 정도 적응한 지금은 꽤 멀쩡히, 어느 정도는 유쾌하게 살고 있다.


가끔 보아온 안전 수칙이 잔뜩 나열된 인터넷 괴담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규칙이 매일, 매 시간마다 바뀐다는점은 상당히 힘든점이지만,


적어도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목숨을 잃거나 하지 않는다는점에서, 나는 괴담 속의 그들 보다는 형편이 좋다고 볼 수 있다.






그날 받은 업무는 종이를 뜯어내 말리는 작업이였다.


핑크빛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내 상상, 하얀옷과 정장을 입은 사람들은 내 직장 동료들.


한참을 종이를 늘어놓던 도중 한 남자가 다가와 역정을 낸다.


죄송합니다. 조현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알려주시면 고치겠습니다.


남자는 당황한 듯 인상을 찌뿌리더니 종이를 말리지 말고 삼켜야 한다고 말했다.


뭐랄까, 업무가 점점 말이 안 되는 행위로 변해가노라면 묘한 충족감이 전신을 덮는다.


상식을 벗어나는 행위를 하는데서 오는 배덕감,


내 병이 이리도 심각했구나⸺약빨이 떨어진 것인가⸺곧 점심시간이 오리라⸺까지 생각이 닿으면


살면서 가지는 얼마 안 되는 '확신'에 대한 야릇한 만족감이 마음속을 가득 채워주는것이었다.






약을 먹고 나서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무엇이 내 상상인지, 어느 것이 믿어야 할 것인지의 구분이 애매모호 해지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하던 대로 종이를 입에 털어 넣자 차장님이 기겁하며 뜯어말리는 소동이 일기도하고,


핑크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의 말을 전부 무시했더니 알고 보니 거래처 직원이었다는 웃지못할 일들이 점심때가 지나고선 종종 일어나는 것이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여전히 부정의 연속이다.


저 사람은 감옥에서 탈출한 전 애인이 아니야.


차는 나를 향해 경적을 울리지 않았어.


불빛들은 총구의 섬광이 아닌 지나가는 택시의 헤드라이트.


횡단보도는 검은색일 때 건너는 것.


오돌토돌한 보도블록은 지뢰 매설지가 아닌 점자블럭.






그렇게 퇴근하고, 홀로 방에 앉아 식사를 마치고,


저녁약 옆에 나란히 붙어 있는 점심약과 아침약의 존재를 깨닫고서는


떨리는 손으로 알약을 입안에 털어놓고 내가 오늘 저지른 일들을 되돌아보고 나서야


차가운 이불을 끌어안고 다신 만나지 못할 여자 친구를 그리워하며 한참을 울고 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