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글은 모두 내 머릿속에서 오는 걸까?"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내는 싱크대에서 도마를 꺼내며 물었다. 


작가라는 종족은 저런 엉뚱한 고민을 달고 산다. 익숙해진 나는 아내의 혼잣말 섞인 질문을 적당한 웃음으로 흘려 넘겼다.



"왜 그래, 아직도 글이 안 써져?"

"그건 아닌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 생각대로 쓴 글이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갖다 쓰는 거잖아.

우리는 그걸 표절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부루퉁 내민 입술이 제법 귀엽다. 아내는 새끼 오리 같은 얼굴로 냉장고에서 다진 마늘과 생강, 양파 따위를 꺼낸다. 



"글을 쓰는 것도 요리와 비슷해. 우선 재료가 있어야 하고."



타닥 타닥, 도마 위에서 칼날이 춤출 때마다 양파가 곱게 다져진다. 아내는 조잘조잘 떠들면서도 능숙하게 재료를 손질한다. 나에게는 아내의 글솜씨보다 멀티 태스킹 능력이 더 신기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짜증을 내니까 끼어들지는 않았다.


아내는 채소들을 냄비 안에 털어넣고 육수를 붓는다. 불을 켜고 된장을 푼다. 도마를 씻고 정리한다. 그리고 다른 채소를 손질하는 일련의 동작을 이어가면서도 쉴 새 없이 말한다.



"작가들도 요리사처럼 소재를 잘 가공해서 다른 사람들이 먹기 좋게 만드는 거야. 여기서 말하는 가공은 다듬어진 문장력을 말해. 보기도 좋은 글이 대체로 맛도 좋거든."

"자기는 글쓰기도, 요리도 다 잘 하잖아. 심지어 예쁘기까지 하지."

"거짓말."



반은 입에 발린 칭찬이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상태로 찬장에서 중식도를 꺼냈다. 아내가 진짜 실력을 발휘하고 싶을 때 쓰는 칼이라 오늘 저녁 메뉴가 매우 기대되었다.



"뭐 만들어 줄 거야?"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아내는 저녁 메뉴를 절대 사전에 공개하지 않는다. 메뉴에 관해 물으면 항상 딴 소리를 한다.



"근데 얼마 전에 어떤 글을 봤어. 물건이 주인을 선택한다는 기담이었는데, 사연 많은 물건에 덕분에 나쁜 일을 피하거나, 반대로 물건 때문에 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이라 재미있더라고."

"그래?"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



오랜만에 꺼내는 중식도라 무뎌진 걸까, 아내는 칼 가는 기계를 꺼내 중식도를 갈기 시작한다. 위이잉- 칼 가는 소리가 된장찌개 냄새에 섞여 부엌을 채운다. 



"이 세상에는 글 쓰는 소재들이 무수히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그 소재들이 자기를 잘 써줄 수 있을 것 같은 작가를 선택하는 거 아닐까?"

"에이, 글은 물건이 아니잖아."

"음, 비유하자면 천을 짤 때 쓰는 날실과 씨실들이 무당이 신내림을 받는 것처럼 작가에게 강림하는 거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내는 싱크대 밑에서 간장과 맛술을 꺼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건 글 쓰는 사람들만 아는 감각이야. 하루 종일, 때로는 3일, 어떤 때는 일주일, 심지어 한 달 내내 한 단어도 쓰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벼락에 맞은 것처럼 뇌가 찌리릿 하더니 손이 멋대로 글을 써제끼기 시작하는 경우가 있어. 마치 누가 내 손을 빌려서 글을 쓰는 듯한 느낌?"

"그래?"



글쓰기는 젬병이고 소설도 잘 안 읽는 나는 죽었다 깨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아내가 쓴 글도 안 본다. 제법 잘 나가는 웹소설 작가인 아내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나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기 소설을 볼 생각은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남편에게까지 평가받는 삶은 비참할 것 같다나 뭐라나.


지금까지, 난 그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 어길 생각도 없다.



"글이 지독하게 막힐 땐 그런 순간이 오기만을 바라는 거야."

"그래서, 글쓰기 신께서 내려 오셨어?"



난 양념장을 만들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하며 물었다. 아침 나절에는 3일째 글이 한 줄도 안 써진다며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럴 땐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라 고양이를 피하는 쥐 같은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빠져 나와 출근길에 올랐다. 그리고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천지신명을 비롯한 온갖 귀신께 빌었다. 부디 저 여자가 어떤 글이든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더니 부탁을 들어주신 걸까. 

칼로 마늘을 다지던 아내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응, 오후에 기가 막힌 소재가 생각났어. 허공에 입자처럼 떠다니던 글감이 코 속으로 빨려들어가 뇌에 안착한 후 내 팔과 손가락을 조종해서 글을 쓰게 해 줬지."

"그거 참 기괴하네. 하지만 자기가 좋다면 OK입니다."

"그래서 글이 사람을 선택하는 거 아닐까? 하고 말한 거야. 평소 쓰던 스타일의 글은 아니라서."



아내가 평소에 뭘 썼는지는 모르지만, 난 적당히 맞장구쳤다.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해보는 건 좋다고 생각해. 얼마나 썼어?"

"도입부는 마무리했고, 이제 7000자 정도 남았어. 이 정도면 저녁 먹고 순식간에 쓸 수 있는 분량이니까 힘 내야지. 아, 밥 해야 되니까 팬트리 맨 아래에서 쌀자루 좀 꺼내 줄래?"

"쌀? 잠깐만..."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속으로 구시렁댔다. 그러게 대용량 쌀자루 좀 사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 기운도 없는 글쟁이면서 항상 20kg 짜리 쌀포대만 산다. 그게 싸다나 뭐라나. 하지만 포대를 들여놓고 쌀독에 옮겨 담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라 귀찮다. 



"자기는 천하장사니까, 도와주세요-"



아내는 냉동실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며 콧소리를 섞어 애교를 부린다. 고깃덩인가. 난 팬트리 바닥에 놓인 쌀자루를 꺼내려 무릎을 꿇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나서, 내친 김에 그녀가 쓰던 소설에 대해 더 물었다.



"그래서, 평소에 잘 안쓰던 소재가 대체 뭐야? BL인지 뭔지 그런 거?'

"에엑, 아냐! 나 그런 거 안 써. 전혀 다른 거야. 알고 싶어?"



내 뒤에 와 있는 걸까. 꿇고 있는 무릎 옆에 그림자가 비쳤다. 난 쌀포대 가장자리를 잡고 바깥으로 끄집어내려 했다. 돌덩이라도 들었나? 빌어먹을 쌀포대가 너무 무거워서, 난 낑낑대며 대답했다.



"응, 이번에는, 어휴, 이거 왜 이래. 좀 궁금한데."



팬트리의 하얀 타일 바닥에 비친 아내의 그림자가 웃었다.

뭐가 신나는지 두 손은 하늘로 뻗고 있다. 

내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보글보글, 찌개가 끓는 소리가 귓전에서 부서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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