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이다.


인생에서 이렇다 할 큰 사건 사고 없이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아왔다. 큰 행운도 없었지만 큰 불행도 없다는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 삶도 다 1분 전 이야기이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에어팟을 끼고 다음 들을 노래를 알고리즘 추천 목록에서 찾고 있었다. 곁눈질로 신호등을 보니 초록불이 켜졌다. 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발을 횡단보도에 내밀자 노이즈 캔슬링을 뚫고 옆에서 다급한 삑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인 건 오토바이 하이바에 비친 내 얼굴이었다. 곧이어 다시 소리가 났다. 이번엔 삑 소리가 아니라 쿵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먹먹한 소리와 함께 의식이 깨어난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정신이 드시나요? 여기는 병원입니다."


눈앞이 깜깜하다. 눈을 뜬건지 감은건지도 분간이 안된다.


"지금 출혈 때문에 머리와 눈 쪽 부위에 붕대를 감아서 아마 앞이 보이지 않으실 거에요."

"지금 막 의식을 차리셔서 매우 힘드실 겁니다. 조금 이따가 저희가 다시 상태 확인하러 올테니 안정을 취하고 계세요."


우선 어떻게 살긴 했나 보다. 너무 피곤하여 나는 다시 의식을 놓았다.


그 이후로 며칠 동안 내가 의식을 차리면 의사는 신체 감각은 어떤 지와 지적 수준의 손상이 없는지 확인한다며 간단한 질문들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의사가 이제 머리 쪽 출혈이 멈춰 곧 붕대를 풀 거라는 말을 하였다.


"환자 분. 눈이 안보여서 답답하셨을텐데 그동안 참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몇 가지만 할테니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솔직하게 답하라는 말은 처음 듣는거라 살짝 긴장이 됐지만 우선 알겠다고 말했다.


"머리카락이 없어도 사람입니까?"


순간적으로 이 사람 뭐라는건가 싶었다. 


"당연히 사람이겠죠."


의사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눈이 없어도 사람입니까?"


다음 질문을 들었을 땐 좀 섬뜩했다. 질문의 방향성에 대해서 불안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내가 눈을 잃었나? 그러면 앞에서 이제 붕대를 푸니까 안보여서 답답한 거 '참는다'라는 표현을 쓰면 안됐던 거 아닌가? 무엇보다 눈을 뜨면 붕대 사이로 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는게 보였다. 그래도 불안했던 나는 물었다.


"저 의사 선생님... 혹시 제가 시력을 잃은 건 아니죠?"


"아닙니다. 말했던대로 남은 질문 몇 개만 답하시면 붕대를 풀어드릴겁니다. 환자 분 시력은 지극히 정상이에요."


다행이다.


"장님도 사람이니까 눈이 없어도 사람이겠죠."


"그렇다면 팔다리가 없어도 사람입니까?"


여기서 내가 가진 불안함이 해소됐다. 내 팔다리엔 가볍지만 명확히 아릿한 고통의 감각이 지금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자꾸 이런 질문을 하는지 궁금하였다.


"그 누구였지. 닉 부이치치도 사람이니까 사람이죠. 당연히."


의사는 마지막 질문이라 하며 말했다.

"그럼 인간의 조건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이건 좀 어려운데. 앞에서 했던 답변들로 생각했을 때 몸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보다 이 의사는 왜 나한테 이런 철학 수업에서나 할 질문을 하는거지.


"저 근데 이 질문들은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의사는 자상하게 말했다.

"별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냥 흔한 의사와 환자와의 의사소통 과정이니 편하게 답해주시면 돼요. 그동안 했던 질문들과는 다르게 답이 정해지지도 않았으니 부담 

갖지 말아주세요."


예전에 환자와 의사 간의 의사소통을 통한 신뢰 확보가 중요하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귀찮지만 그동안 의사도 나름대로 힘 썼을테니 협조해야겠지.


머리를 좀 굴리다 나는 유명한 철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조건 아닐까요."


"좋습니다, 환자분. 아주 좋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좋다.


"김 간호사, 이제 붕대 풀어줘."


드디어 캄캄했던 시야가 환해졌다. 내 눈에 보이는 건 환하게 웃는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병상에 놓여있는 내 몸.

내 머리 속을 채우기 시작하는 한 생각.


'나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