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 글을 볼 때, 필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존나게 받아서 머리가 몇 가닥 빠져있긴 하겠지만.
방학이라 할머니 댁에 며칠 들러서 인사만 드리려고 했는데,
비는 안 그치고 산사태까지 나서 억류될 줄은 몰랐다.
조금 전에도 점장이 개지랄을 떨어서, 출근 못하게 된 사유를 다섯 번째 설명하고 끊은 참이다.
100% 짤릴 테니 개학하면 좆될 것 같다. 전역할 때까지 모은 돈 생활비로 까먹긴 싫었는데..
아무튼, 의도치 않게 전원일기를 찍게 된 사정을 어디 푸념할 데도 없으니,
혹여 이 좆같은 마을에 방문할 사람들을 위해 가이드를 하나 써 보도록 하겠다.
1.이 깡촌에는 오래 묵은 게 많다.
사람이나 집도 그렇지만, 사람 아닌 것들도 오래 묵은 존재가 많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면, 이것들 간에도 "세대 차이" 라는게 있다.
도심에 있는 놈들은 뭔가 눈물겨운 사연이 있어서 터를 떠나지 못하거나,
사람이라도 된 양 개인적인 이유로 해꼬지를 하고, 가위에 눌리게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헌데, 여기 있는 오래 묵은 것들은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한다.
터에 묶여 떠나지 못한다거나, 억울한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리에 붙박여 지내다 보니 제 집처럼 여기게 된 건지, 자기들이 거기 있는 게 당연하다 생각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 굿을 할 때도. 상 바리바리 차려서 달래는 식이지 대뜸 그것들에게 꺼지라고 하진 않는다.
(애초에 꺼지라고 한들 그것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이런 것들과 얽히지 않는 게 좋기는 하다만,
어쩔 수 없이 이 동네를 방문해 부대낄 일이 있을 때 알아두면 좋을 몇 가지 규칙을 소개한다.
2.마을 풍경이나 행사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지 마라.
마을 사람인 양 행동하면, 어귀에 있는 그것들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나도 이 놈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몰라서 그냥 도깨비다~ 하고 생각하긴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나라 설화에 나오는 그 친근한 놈들은 아닌 것 같다.
우선, 아무리 깡촌이라 한들 사람 살갗이 회색에 가깝게 타들어가진 않으며, 다 떨어진 저고리를 두르고 다니지도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라.
의식해서 보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멀리 시야가 트이는 느낌이 든다면,
눈에 보이는 사람들 무리에 백이면 백 이런 행색을 한 것들이 섞여 있을 것이다.
최대한 인파가 없는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코를 막고 숨을 불어 귀가 -잠시 막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실수로 그것들을 보더라도 재빨리 눈을 돌리고, 이목구비의 생김새에 되도록 집중하지 않길 바란다.
눈,코,입은 다 달려 있긴 한데... 최소한 필자는 사람 입이 그렇게 벌어지는 건 본 적이 없다.
3.동물들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라.
사람 좋다고 발발대는 동네 강아지, 어디서 주운 건지 모를 북어포를 문 고양이를 조심하라는 뜻이 아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 동물 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놈들이 몇몇 눈에 띄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늙었거나 아파서 둔하게 움직이는 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긴 혀로 모이를 핥아 먹는 닭은 없으며,
쇠 갈리는 소리로 짖고, 이빨과 잇몸이 다 보일 만큼 그르렁대는 까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할머니 말씀으론, 지들 딴엔 작은 동물 흉내를 내는 법을 배운 것 같다는데,
옛날엔 개 닮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고 한다.
하필이면 그거 잡아다 보신탕 끓이려던 사람 여럿이 광증으로 경을 치기도 했고..
원래 뭐였는지는 몰라도, 오래 묵어 조화를 부리는 짐승이니 원한을 사지 않게 주의하라 하셨다.
시장에 소를 내다 팔던 때 선지피를 던져주면 사람을 무시하고 제 할 일을 했다곤 하는데,
요즘에 날선지를 들고 다닐 사람은 없으니, 마주쳤다면 날카로운 물건이나 이빨로 피를 한 두 방울 흘려 공양하는 게 화를 피할 방법이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주인을 보면 밥을 보채듯, 이것들은 사람이 "당연히" 자기들한테 공양을 해 준다고 생각하니까.
4.안개가 짙게 낀 날에는, 물이 고인 곳에 가지 마라.
올바른 비유인지는 모르겠는데, 게임에서 전투 컨텐츠를 하지 않는 맵에 몬스터가 끌려들어오는 버그가 있다.
이 마을에서 이걸 겪고 싶지 않다면, 사실 물이 고인 곳만 피하는 게 아니라 외출을 삼가는 게 나을 것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잉어가 신선이 돼서 놀러오는 날이다" 고 농을 띄우곤 하시는데,
내 생각엔 이 새끼들은 그냥 경계선 너머 어딘가에 존재할 뿐이고,
날씨가 좆같아질 때마다 이 마을 안에서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것 같다.
2번 문항에 나온 예처럼 굳이 먼 곳을 보려 집중하지 않았음에도,
짙은 안개가 낀 날에 물 표면이 선명히 보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임에도, 물 표면에 비친 길엔 무리지어 다니는 검푸른 형체들이 나타난다.
이것들이 당신을 일부러 쫓거나 잡으려고 들진 않지만, 당신이 인지한 시점에서 그것들은 현실에 존재하게 된다.
고래 심줄 끊어지는 소리를 제외하면 말을 하는 걸 본 적도 없고, 사람에게 친절한 놈들은 더더욱 아니다.
정말 불가피한 일이 있어 안개 낀 날에 밖에 나왔다면, 아예 흙으로 덮인 길에만 의식적으로 시선을 고정하길 바란다.
5.밤에 외출할 때는, 보이는 것에 주의하라.
위 항목과 마찬가지로, 애초에 밤에 어디 나다니는 걸 추천하지 않지만,
무언가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식별된다면 잠시 멈춰 곰곰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우면, 그림자처럼 인영만 보이는 게 자연스럽지 팔목이나 다리만 훤하게 보이지 않는다.
밤에 외출할 일이 있다면, "이게 이렇게 보일 리가 없는데?" "왜 보이지?" 같은 의문을 항상 잊지 말아라.
그것들은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일이라, 당신이 관심만 갖지 않는다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정신만 차리면 사람과 그것을 분간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키가 큰 사람이 많지만, 머리 위치가 2미터보다 위에 있고 손바닥을 바깥으로 돌린 채 심야 길주변에 서 있는 사람은 드무니까.
6.여기서 자살하지 마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진짜 개시발 깡촌이라 그런지, 부정적인 목적을 품고 방문하는 이들도 있다.
상담원이 된 것 마냥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많다. 행복이 가득하다!" 하고 훈수질할 생각은 없는데, 최소한 이 마을에서 자살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죽어서 귀신이 된다면, 차라리 똑같은 귀신을 만나는 건 별로 무섭지 않겠지만,
죽자마자 여기 붙박인 그것들을 봐야 한다면 그냥 사는 게 나을 것이다.
7.잠에서 깼을 때, 닭 울음소리 반 박자 뒤에 다른 소리가 섞이는 것 같다면 그냥 다시 잠들어라.
생업이나 약속보다 더 우선해야 할 문제다.
핸드폰, 전자시계 등 시각을 숫자로 표시해 줄 기기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시계의 바늘이 몇 시를 가리키건, 전자기기에 표기된 숫자가 몇이건 아무 상관이 없다.
닭 울음에 섞인 괴성은 모두가 듣는 소리가 아니라 당신만 듣는 소리이며,
어디에 가고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들 중 하나가 흥미를 가졌기 때문에 당신에게 들려주는 소리이다.
창에 빛이 들고 사람들이 오가는 느낌이 들더라도, 새벽 세 시가 안 됐다고 생각하고 얌전히 다시 잠들기를 바란다.
일단 방에 누워 소리만 들을 땐 괜찮지만, 대문을 나가는 순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8.끝으로, 주변 안전에 확신이 안 선다면 주변에서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 때까지 기다려라.
사실 제일 기본적인 팁이긴 한데, 이 마을의 오래된 것들은 말을 하거나 알아듣지 못한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현대에 쓰는 말"을 잘 구사하거나 알아듣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게 정말 사람인가 의심이 드는 상황이면, 상대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당신 이름을 부를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일 것이다.
그것들이 말을 잘 모른다 한들, 당신이 뭘 보며 말을 하는지는 다 눈치채고 있으니까.
일단 한 주간 지내면서 겪은, 마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을 정리해 보았다.
이걸 인쇄해서 어디 배포한다 한들 이런 데 들어올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장덕이 삼촌한테 부탁해서 삐라처럼 추레라에 싣고 뿌리면 누군가는 줍겠지.
며칠 뒤 햇빛이 난다고는 하는데, 예보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비가 그친다는 것도 의심해야 할 판이다.
아..집 가고 싶다.
대체로 안전할거같으면서도 계속 긴장하고 있게 되는 점이 좋네
막 위험하지는 않으면서도 삐긋하면 망한다는 점이 좋다. 결국 다 사람 사는 곳이라는 것도 글 잘 쓴다
긴 혀를 가진 닭이라는게 확 무서웠으 재밌게 잘 봤당
우와… 존잼
일주일만에 많이 알아냈네... 너무 위험하지도 그렇다고 마냥 안전하지만도 않아서 좋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