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대리, 이렇게 글로 이야기하는건 처음이네요. 지금은 2075년 2월 14일 오후 3시 15분입니다.
거창하거나 대단한 뭔가는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그렇다고 소리내어 낭독하진 말고요.
계륵같은 정보가 될거거든요, 이 편지는.
아마 알고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모두에게 내려오는 공문은 늘 조금씩 다르고, 그걸 따르다보면 언젠가는 회사의 고마운 누군가로 남게 될거라는걸.
모른다고 잡아떼는건 이미 몸에 배어있죠?
앞으로도 명심해야해요.
이 편지는 앞으로도 임 대리가 L 등급의 공문편집팀으로 승진하기 전까지 받을 무수한 ‘서로 다른’ 공문들에 대한 대처를 도와줄거에요.
보통 사내 긍정 평가를 많이 받은 사원은 멀쩡한 문서를 받는 편이지만... 사람 일은 잘 모르는 법이잖아요?
임 대리는 내가 아껴 마지않던 소중한 부하직원이자 나의 동생같은 사람이니, 언젠가 이 회사 안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위해서라도 내가 아는 모든걸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꼭 다시 만납시다.
나도 임 대리와 다시 만날때 사지 멀쩡하게 손 흔들 수 있게 노력할테니까요.
--
1. 4층 간부직통전화는 되도록 사용을 피하기.
본사 ai는 최근에 교체되어서 괜찮은데 지사는 아직 교체가 안됐어요. 앞으로 한달간은 간부직통전화 사용은 피해요.
간직통이 차원 연결 회선 연구가 이루어지기전엔 생각보다 배선 전기를 많이 끌어다써서 사용횟수마다 부정 평가가 누적됐거든요.
새로 사용되기 시작한 차원 연결 회선이 우리 지사에도 적용되고나면 ai도 부정평가를 적용하지 않겠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위에도 말했듯이 부정평가는 안됩니다.
긍정평가 하나와 부정평가 하나는 동급의 가치를 지니지 않아요.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는게 어려운것과 비슷한 이치에요.
같은 이유에서 5층 탕비실과 4구역 3-A 비상호출벨도 사용하지 않기.
2. 3층 입구 사이보그 경비한테 얼굴 자주 비추어두기.
문명의 진보는 참 대단하죠? 불이 신화속의 업화처럼 미친듯이 번지고 한치앞도 구분이 안되는 안개속에서도 사람을 정확히 인식해내고 구출하는 경비라니...
회사가 이런것까지 의도한지는 모르겠지만 경비들은 의외로 자아가 있어요.
이것쯤은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이야기하는 자아는 그런게 아니에요.
전자두뇌속에 짜여진 회로를 따라 학습한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로 자아가 있어요.
사이보그 경비의 머리통 안엔 진짜 뇌가 들어있고, 사람처럼 말하는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말해요.
그러니까 자주 들러서 얼굴을 비춰요.
선물이나 덕담따위를 준비해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자주 얼굴을 비추고 인사를 하거나 공문을 전달해주거나, 그렇게 얼굴을 비추면 돼요.
뇌가 인간일지언정 그들을 움직이는건 프로그램에 의존하기 마련이고, 이 프로그램은 뇌와 결합하여 인간을 인식합니다.
뇌와 결합했다는건 무슨뜻인지 알죠?
물에빠진 어머니와 물에빠진 생판 남 중 누굴 구할지는 정해져있는거니까요.
3. 주머니에 사탕 세 개 쯤 넣어다니기.
굳이 사탕으로 지칭한건 사탕이 가장 효율적이고 좋은 간식이라 그런겁니다.
탕비실 사탕 말고, 개인적으로 사서 회사내로 반입한 간식거리면 괜찮아요.
회사 안에서 만들어졌거나 회사에서 사원들에게 건네준 간식거리들은 효과가 없으니까 꼭 개인적으로 구매한 간식으로 주머니에 세개 쯤 넣으세요.
여기서 한가지 맞춰볼게요.
임 대리, 3층의 복제술 실험 실패로 생겨난 개체를 관리해야할 때 위급상황시에 던져라~라는 문단이 아래에 있기를 예상했지요?
진지한 편지에 이런 농담거리를 넣어서 미안합니다만, 단순히 종종 단 것을 먹고 힘을 내라는 의미입니다. 하하!
완전히 농담까지는 아닙니다. 회사 탕비실의 간식들도 부정 평가의 일환이 될 수 있다는것 하나만큼은 정말이에요.
알잖아요? 회사는 사원을 돕기보단 회사의 성장을 우선시합니다.
같은 조건의 문제사원이 있다면, 회사 비품을 하나라도 더 축낸 사람을 내보내는게 당연하겠죠.
되도록이면, 회사에 빚을 지는 일은 없도록 해봅시다.
4. 탕비실에선 묵언.
교부 공문이나 사칙, 행동규칙의 서로 상이한 문항들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언제나 단골처럼 상이하게 프린트되는 문항이 있어요.
탕비실 위치를 지정해주는 문항이에요.
L 등급의 직원들이 그 이하의 직원들 사이에 섞여들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돕는 문항이 바로 그 문항입니다.
섞여드는 직원은 구분할 수 없고 우리의 작은 수다와 푸념은 모두 활자로 기록되어 데이터실에 차곡차곡 쌓여갈거에요.
그러니 차라리 탕비실을 쓰지 않거나 쓰더라도 입 한번 벙긋하지말아요.
탕비실을 쓰지 않는다면 업무에 몰두하는 좋은 사원으로 비추어질것이고,
탕비실을 조용히 쓰고 자리를 뜬다면 회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원으로 비추어지겠죠.
우리가 목표로 하는건 좋은 사원이지, 좋은 동료가 아닙니다.
특히 매뉴얼이나 공문 이야기를 하는 사원들이 있으면 어서 탕비실에서 벗어나요.
연대책임의 비인간성과 비현대성은 이미 익히 알려져있다곤 하지만
인간성과 현대성이 적용되는 회사였다면 내가 이런 편지도 쓰고 있지 않았을겁니다.
5. 4대보험 외의 보험은 피하기.
회사에서 하는 일이 위험천만하죠?
처음 들어올때보다 직급이 올라가니까 그만큼 위험한 일도 많이 맡고요.
생체화학 복제술 실험 실패때 목숨으로 줄타기 했던것만 떠올리면
지금도 손이 좀 떨리고 그러네요 나는.
아마 그런 것들을 핑계삼아 많은 보험이나 산재처리 동의 각서들을 쓰게 할겁니다.
그것들 그 무엇에도 사인하지 않도록 하세요.
회사에 빚을 지지 않게 하라고 했죠? 이것도 그 일환입니다.
임 대리의 작은 문제들마저 커버해주는 고마운 보험이나 실비, 워크숍 등은 모두 공짜로 이루어지는게 아니에요.
회사는 언제든 사람을 치워버릴 수 있고,
그렇게 언제든 치울 수 있게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 평가를 붙여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부정평가를 받을 건덕지를 단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것만이
우리가 이 회사에서 오래,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겁니다.
L 등급까지 올라가고나서부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과장까지 달며 느낀것은 그게 전부에요.
6. 민간신앙과 비과학적인 존재들에게 의지하기.
복제술 실험 피해자들이 우리를 인지하는건
빠른 심박과 급해지는 생리현상을 통해서라는건 사내 긴급 교육 때 알려줬죠?
알려주지 않은, 정확히는 내가 알아낸 그들이 우리를 기피하게 만드는 방법이 하나 더 있더군요.
묵주나 염주, 십자가나 보살조각상, 무당이 써준 사제 부적따위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됩니다.
과학으로 점철된 발명품들로 위상을 얻은 회사에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놀랍게도 그것이 내가 발견한 허점입니다.
제국주의와 신대륙 개척의 시대부터 인간은 변한것이 없어요.
자신보다 열등하다 생각하는 존재에겐 한없는 혐오와 거부감을 드러내며 견디기 힘들어하는 그 태도.
수 세기가 지나서도 달라지지않은 그 태도는 복제술 실험의 현장에서 불운한 사고를 당한 것쯤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역시 갖고있었더군요.
그리고 그들의 사상과 사고는 이만큼도 변하지 않은채로
여전히 뒤죽박죽이 된 두뇌의 주름에 정확히 각인되어있어요.
그들에게 우월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토속적이고 주술적인 비과학적 존재들은 언제나 기피의 대상입니다.
3층에 가지 않을수는 없을겁니다.
매뉴얼의 수상한 부분을 알아채고 가지 않으려해도 명령에 대한 불복종은 힘들겠지요.
그럴땐 부적 하나라도 들고가면 될겁니다.
잊지말아요. 품에 넣어둔채로 다녀요. 방탄조끼의 안쪽 깊숙한곳에 넣어두면 딱 좋아요.
7. 세미나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을것.
내가 봐온 임 대리는 배움에 대한 열정과 욕구가 충만합니다.
학자로서 무척 훌륭한 태도이자 연구원에게 요구되는 사고방식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사원이자 주어진 매뉴얼과 사칙, 공문들에 맞추어 행동하면 되는 존재에요.
그런것은 모두 필요없습니다.
그러니 매 주 개최되는 세미나에선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말아요.
교수들의 연구에 대한 질문도, 의문도 품지 말고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적고 머릿속에 쑤셔넣는데에 온 심혈을 기울여요.
오류와 문제가 있어뵈는 행동강령들에 대해 다른 불쌍한 직원이 질문을 던져 올바른 정보를 얻고 다음 달에 퇴직해주기를 기다리도록 하면 됩니다.
잔인하고 이기적인 태도야말로 우리가 갖추어야할 태도일겁니다.
우리가 나누는 어떤 유대도 그 태도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못할겁니다.
이런 태도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일 마저 이런 태도를 배반하는 태도이기에
나는 이 편지를 한 자 한 자 적을때마다 배덕감과 불안함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디 임 대리가 알아주길 바랍니다.
8. 개인 면담에서 그 어떤 사적인 이야기도 삼갈것.
회사는 사적인 이야기를 싫어합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더군요.
내가 줄곧 받던 추가 매뉴얼에는 신규 사원이나 인턴을 대상으로 하는 개인 면담에서 최대한 그들의 사적이고 예민한 이야기와 어디에서도 말할 수 없던 비밀을 캐내라는 지시가 출력되어있기 마련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많은 젊은 사원들의 비밀을 캐냈고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을 명예롭게 퇴직시키는데에 활용하곤 했어요.
그렇게 임 대리의 이야기도 알아낸거니 궁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 믿어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그 날 들은 모든 것은 파쇄기에 남김없이 갈아넣었다는 겁니다.
그것도 내가 집에서 가져온 파쇄기로 갈아서 말입니다.
사적인 이야기의 기준을 모르겠다면 그냥 최대한 입을 다물거나 간단히 대답하면 그만입니다.
그들이 임 대리의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지, 오늘의 아침 메뉴는 뭐였는지조차 모르게 하세요.
임 대리의 모든 정보를 가능한 한 최대한 숨기세요.
임 대리가 베일에 싸여있을수록 회사는 당신을 더욱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줄겁니다.
당신의 모든것을 알아내고싶어 안달을 낼겁니다.
내가 지금 팀 이적을 하며 승진을 했듯이요.
우리는 그걸 이용해 높이 올라가고, 그만큼 우리의 정보를 더욱 철저히 숨겨버리면 됩니다.
정보를 알아내기 전까진 회사는 우리를 특별히 대해줍니다.
가치는 곧 비밀에서 탄생합니다.
알려주려는 것은 이것정도면 충분할거라고 생각해요. 임 대리는 내가 알려준 이 정보들로 더욱 깊은 부분들까지 꿰뚫을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않습니다.
날이 따스해지고있지요. 춥게 입어 감기에 걸리는 일 없이 부디 몸 건강히 지내길 바랍니다.
그럼,
몸 건강히 다시 만납시다.
추신
내게 준 만년필은 아직도 잘 간직하고있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의심에 가득 차 분해해보긴 했습니다.
- dc official App
뭔가 깔끔하고 재밌다
지저분하게 썼다 생각했는데 고마워 - dc App
와 엄청 신선하다 다음 편도 궁금해
마지막에 만년필 분해해본거 ㅋㅋㅋㅋㅋㅋㅋ 나같아도 저런 회사 다니면 의심병 말기일 거 같긴 한데 웃기다
설정 좋고 분위기 좋고, 문장까지 좋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