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서를 쭉 읽어 내려간 그는 21번 문항에 도착하였다.


21. 위에 나온 규칙들을 너무 깊게 이해하려 하지 마.

그것들에서 모순을 찾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려 할 필요는 없어.

너의 노력과는 무관하게도 그저 너의 생사는 확률적으로만 결정될 것이야.


이것들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쉽게 말해 줄 게

너는 그저 사람 앞에 놓인 작은 개미에 불과해

누군가는 개미를 고통 없이 밟아 죽일 것이고, 누군가는 가지고 놀 것이며, 누군가는 무관심하게 지나갈 것이야.

어떤 누군가는 개미가 재롱을 떨면 죽일 것이고 자신에게 무관심하면 살려 둘 것이야.

다른 누군가는 개미가 재롱을 떨면 살려 줄 것이고 자신에게 무관심하면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야.


아직도 이해가 안 됐다면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이란 거야

너의 상상이 닿지도 않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개미와 사람 이상의 차이가 나는 존재들 앞에 네가 놓인 거야.

그것들 앞에서 네가 어떠한 행동을 하면 특별해질 것인가를 고민하지 마.

벌레를 보고 무관심하던 사람도 그날에 기분에 따라 그저 밟아 죽일 수 있어

또는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이 그날의 귀찮음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


물리 법칙마저 무시하는 초월적 존재 앞에서 네가 하는 모든 행동에 정답은 없어.

만약에 내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면 네가 읽어온 규칙서를 올려 봐


7번 문항의 네가 마주친 튤립의 색에 따라 너의 운명이 결정되는 건 너의 노력과 일체 상관이 없어.

네가 마주친 튤립이 하얀색이면 너는 살 것이고

네가 마주친 튤립이 노란색이면 너는 신체의 일부를 내어줘야 하고

네가 마주친 튤립이 붉은색이면 너는 죽는 거야.

이러한 불합리함이 왜 생기는지 내 말대로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애초에 규칙서를 다 지키려 해도 반드시 지키지 못하는 경우들이 왜 있을까?


깊은 우주를 그려내. 커다란 목성에 눈을 상상하고. 심해에서 만난 거대한 괴물을 떠올려 봐.

행성을 손으로 짚는 우주의 거인들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이들을

너의 존재를 벌레는커녕 우주의 먼지와도 같이 여길 그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네 힘이 닿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들임을 인지해


그러면 지금에 와서 고민하고 있는 2번과 11번 문항의 모순도 모두 이해될 거야.


이제 모든 걸 포기하고 운명에 자신을 맡겨

너는 너의 노력과 무관하게 확률적으로 살아 나갈 것이야.

그럼 이제 규칙서를 찢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면 돼.


21번 항목이 없다는 말은 믿지 말고. 그것들은 네가 발버둥 치기를 원해서 써놓은 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