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속에 살았다. 나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고 똑똑하다는 환상.

평범한 인간들 하고는 다르다는 환상.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서도 그 오만함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다. 다른 이들이 확률로서만 뚫고 나온 길을 그는 순수한 자신의 역량으로서 뚫고 나왔다.


3번 항목과 마주하였을 때 어린아이를 사자 무리에게 던지고, 늙은 노파를 악어에게 던져서 어디로 갈지 파악했으리라.


5번 항목과 마주하였을 때 그는 다른 인간을 먼저 보내어 비명 소리를 듣고 움직였으리라.


7번 항목에서 자신의 속셈을 알아차린 거구의 남성이 그를 죽이려 할 때, 금지된 항목을 이용해 그의 머리통을 터트렸었고

그 상황에서 분명 카타르시스가 느껴졌으리라.


마주친 9번 항목과 11번 항목의 모순도.


상세한 설명이 적혀있지 않은 12번 항목의 부족한 정보도


그는 때때로 괴이인 척 연기하며, 때때로 남을 속여가며 지금 이곳까지 뚫고 나왔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안갯속에 쌓인 갈림 길. 이 둘 중 한 곳은 분명한 정답이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와 같이 이 공간에 끌려들어 온, 그보다 열등하고, 한참 모자란 수많은 인간들이


마침내 그가 있는 공간 내에 발을 들이밀었을 때.


한참을 망설이던 그들은 저마다의 답을 내놓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직 그 남자만이 그곳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나도 남자의 발은 땅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허기도, 졸음도, 그 무엇도 요구되지 않는 이 공간 속에서 남성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항상 확신에 찬 길 만을 밟아온 그는 고작 확률 따위에 자신의 삶을 배팅 할 수 없었다.


해 볼 수 있는 짓은 무엇이든 해봤다. 사람을 던져도 어떠한 비명도 소리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남을 속여 들어갔다 다시 나와보라 하여도 들어간 이는 있어도 빠져나온 이는 없었다


규칙들을 천 번을 넘게 들여다봐도 이 마지막 순간은 그저 50%짜리 도박일 것이다.


결국 스스로에 대한 환상을 깨부수고 나아가려는 찰나 가슴속 작은 울림이 그에게 속삭인다.


이내 앞으로 향하려던 발은 멈추고, 다시금 그는 고뇌에 잠긴다.


남자는 공간에 갇혀 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우월했을 것이다.

다른 멍청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삼아 확률로서 뚫고 나온 길을 그는 타인의 목숨으로서 뚫고 나왔다.


수칙서의 모순을 파악하고 이곳에 갇힌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행동했으리라.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에 내려야 할 자신의 선택이 결단코 다른 이들과 진배없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우월함과 현명함을 끝내 버려 내지 못하고

그가 가장 멍청하다 생각해 온, 확률에 목숨을 배팅하는 어리석은 짓을 스스로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남성은 환상 속에 갇혀있다.


그는 아직도 그곳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