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끝났습니다!”
언어학자가 크게 소리쳤다. 패잔병처럼 푹 숙이고 있던 일행의 고개가 동시에 그를 향했다.
“이 빌어먹을 아티클! 역시 우리가 원하는 내용이 있었다고요!”
왼쪽 눈가부터 턱까지 흉터가 난 사내가 놀란 얼굴로 답했다.
“맙소사! 200페이지가 넘어가는 글을 벌써 번역했다고? 그것도 처음 보는 언어를?”
“다행히 이 녀석이 작동해줘서 말이죠.”
그가 얼굴에 걸친 반투명한 고글을 톡톡 치면서 답했다.
“지구와 통신은 되지 않지만 규칙성을 찾는 기능 정도는 문제 없었거든요. 게다가 의외로 영어와 언어 구조가 비슷하더군요.”
“그래도 대단해. 카일, 자네 정도의 언어학자가 아니라면 고작 다섯 시간 만에 이 정도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거야.”
“고맙습니다, 리더.”
카일이 안경을 올리던 버릇처럼 고글을 가다듬으며 쑥쓰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덩치 큰 흑인이아니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지금까지 밥만 축내는 식충이었다면 그 정도는 해야지. 대체 외계인이 어디 있다고 먹물을 먹은 놈을 데려온 거야?”
흑인이 빈정거리며 답했다. 리더, 짐이 그를 툭 치면서 말한다.
“윌, 너무 그러지 말게. 카일도 기본적인 전투 훈련은 마치고 탑승한 몸이다. 카일, 번역한 내용을 읊어 봐라.”
카일이 대충 휘갈긴 종이를 내밀었다.
‘심각한 악필이군. 아니지. 그나마 이런 매뉴얼이라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짐이 눈살을 찌푸렸다. 글씨를 잘 쓰는 천재는 없다더만.
그러나 애초에 인간이 태양계를 벗어나 유인탐사를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전기 따위는 필요 없는 ‘종이’로 된 책이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운이리라.
그는 이윽고 카일이 번역한 <매뉴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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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 이실라프-132-알파 행동수칙>
이실라프-132-알파 정거장에 당도하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 정거장은 목표 행성으로 인원을 안전하게 복귀시키기 위해 특별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이 매뉴얼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신 여러분이 안전하게 귀환하기 위한 행동 수칙을 담고 있습니다.
이 수칙은 총 열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절차에 따라 진행하지 않을 시 일어나는 안전 사고 및 위험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1. 이실라프-132-알파 정거장은 총 네 개의 모듈 유닛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닛 간의 이동을 위한 승강기의 정원은 최대 4명이며, 정원을초과할경우치명적장애가발생할수있으음. 승강기 정원 초과로 인해 ------가 발생할 경우, 첨부된 <이실라프-132-유닛 리프트 사용 매뉴얼> 문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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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띄어쓰기가 안 된 부분은 뭔가? 게다가 이 공백은 무엇이고?”
첫 번째 항목을 읽은 짐이 카일에게 물었다.
“아, 그건 정말로 띄어쓰기가 되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거지요. 아무래도 일종의 설명서다 보니까요. 그리고 공백은…. 아예 번역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번역이 되지 않는다고?”
“그래도 앞뒤 문맥을 살피면 대충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저기에는 아무래도 고장, 장애 등이 들어가지 않을까요?”
흠. 카일의 말이 맞다. 아직까지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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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실라프-132-알파의 동작 전원은 항성 광에너지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에너지 확보를 위해 할당된 우주표준시각 2000부터 0200까지는 모든 시설 시스템을 절전상태로 유지해야 합니다. 에너지 확보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 동력 부족 상황이 발생할 경우, 각 인원에게 배정된 생명 유지 장치를 사용하기 전에 시스템 오류 발생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십시오.
3. 숙박동의 각 방에 설치된 생명 유지 장치의 사용 한계는 최대 2인입니다.정원을 초과할 경우 호----에 문제가발생문제가발생문제가발생문제가발생문제
4. 이실라프-132-알파 정거장에서는 독자적인 기술로 필수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주표준시각 0600, 1200, 1800에 한 시간 동안 식사동에서 음식을 섭취할 수 있습니다. 규정된 시간 이외에는 식사동으로의 출입을 금합니다. 이시간에출입시식사--
5. 중앙에 위치한 동은 ----동 입니다. 허가받지 않은 인원은 출입이 불가합니다. 만일 CCTV 등으로 미허가 인원의 출입을 확인한 후, 관측자에게 급작---- 기억 장애, 퇴행성 인지 불일치 증상을 포함하는 불상의 –가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해당 인원의 신원을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경우 즉시 프로토콜 크사이-람다를 발동하고 1분 이상 대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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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알아보기 힘든 부분이 늘어나는군. 5번, 중앙의 동은 대체 뭐가 있는 거야? <크사이-람다>는 또 뭐지?”
“크사이, 람다. 그리스 문자입니다.”
초췌한 얼굴로 한 동양인이 답했다. 입자물리학자, 카나코. 총 열 명에 달하는 우주인 중 두 명밖에 없는 여성이다.
“카나코. 리더가 그걸 몰라서 물어봤겠어?”
“시비걸지마, 카일.”
카일이 한심한 목소리로 핀잔을 주자, 카나코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카일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리더, 짐에게 말했다.
“이 아티클의 맨 앞 부분에 나오는 겁니다. <크사이-람다>는, 쉽게 말해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땅에 납작 엎드리는 것을 의미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글쎄요…. 생물이나 심리학 쪽은 영 전문분야가 아니라. 그래도 뭔가 무서운 것을 피하려는 아이같지 않습니까?”
일단 마저 읽어야겠군.
짐은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6번으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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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 항목에 따라 충분한 휴식을 취하신 여러분은, 귀환동에 출입하여 귀환절차를 진행하실 수 있습니다. 귀환 절차를 시작하신 이후 복귀할 수 없으니, 꼭 충분한휴식을취 하길바란다. 귀환 절차는 귀환동에 구비된 별도의 매뉴얼을 확인하라.
7.
종종 숙박동 내부에 위치한 전등이 불규칙적으로
점멸하는 경우가있으나,이는즉각 조치를 요구하는 이상 ---- 현상이
아니므로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AI유지보수 부서에서 해당 현상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에 있으므로 별도의
피드백은 불필요합니다.
한편, 만일 전등이 초당 2회 이상 규칙적으로
점멸하는 현상이 1분 이상 지속되는 것이 확인된 경우, 프로토콜
크사이-람다를 실시하십시오. 감각의 소실이나 부유감을 동반하는
이상 증상이 없는 경우 대피 자세에서 벗어나도 좋습니다.
7.1. 만일 프로토콜 크사이-람다 이후에도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면 지급 장비의 Tyler-Oxytocin 자가 주사 장치를 허벅지에 사용하십시오.
7.2. 만일 Tyler-Oxytocin을 주사한 이후에도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면 자유롭게행동------.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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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ytocin… 옥시토신이라면 호르몬의 일종이 아닌가?”
카일이 중얼거렸다. 중국계 미국인, 메이가 답한다.
“맞아요. 임신…. 여성호르몬과 관련이 큰 호르몬이에요. ‘사랑의 호르몬’이라고도 불린답니다. 저걸 민간인이 스스로 주사해야 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그녀는 생명화학을 전공했다. 언어학자 카일, 입자물리학자 카나코와 함께 일행의 브레인을 맡고 있는 셈이다.
머리를 쓰는 일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윌이 무기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젠장.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군. 크사이-람다니, 호르몬이니. 그리고 이 첨단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우주선 내에서, 빌어먹을 유령이라도 보인다는 말이야?”
“윌. 당신이라면 유령도 피해갈 것 같지만요.”
흥. 윌이 콧방귀를 뀌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한 명의 리더와, 세 명의 학술 담당. 나머지 여섯은 전투와 기계공학을 복합적으로 익힌 인재들이다. 윌은 그 중 전투에 특화된 인원이다.
“간만에 카일이 옳은 말을 했군. 뭐가 나타나더라도 내가 다 죽여버릴 테니, 걱정 말고 다음 항목을 읽어 주시오.”
“그러지.”
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매뉴얼을 다시 읽어 나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윌을 비롯한 전투원들은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전사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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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경우에는 휴식을 멈추고 즉시 귀환동으로 복귀하여 E-132 즉각 귀환 프로토콜을 실시하십시오. 이실라프-132-알파 정거장은 반영구적 --을 상정하여 설계되었습니다. 인지 밖의 사물과 현상에 대한 행동 수칙은 별도로 첨부된 --- -- --- ----. 관련 내용은 <6번>을 확인하세요.
9. 정거장 내에서의 번식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상주 인원으로부터 합당한 맥락이 없는 성욕의 증대 현상을 확인할 경우, 해당 인원을 즉시 중앙에 위치한 ----동으로 위치시켜주시기 바랍니다.
10. (추가) 5번 항목과 9번 항목이 대비되어 매뉴얼의 인지에 혼동이 온다는 메시지가 빈번하게 도착합니다. 따라서 이 항목을 추가하였습니다. 5번 항목보다는 9번 항목을 우선하여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11. (훼손이 심하여 번역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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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 <행동 수칙>이라는 거, 10번까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윌이 눈살을 찌푸렸다.
“10번 항목이 추가됐잖아요. 그러니까 11번으로 끝나는 것이 맞죠.”
카나코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여성 입자물리학자는 간신히 체력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체력이 약하다. 몸 상태가 엉망이라 그런지 머리속에 안개가 낀 듯하다.
“게다가 번식 행위라니. 이 털 난 인간들한테 무슨…. 어휴.”
“아직 이 아가씨가 진정한 남자의 맛을 모르네.”
“지랄하지 말아요.”
그녀가 능글거리는 윌에게 쏘아붙인다.
벌써 이틀째 굶고 있다.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모두의 신경이 날카롭고,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짐이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으며 <우주표준시각>을 확인했다. 열 두 시. 마침 점심 경이다.
‘뭐라도 먹이지 않는다면 살인이 나겠어.’
“이정도면 90%정도는 해석한 것이 아닌가 싶군. 카일, 좀더 연구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게. 일단 밥부터 먹고 시작하지.”
리더의 자질을 발휘하여, 연구원들과 전투원들을 넷, 셋, 셋으로 나누었다. 리더인 짐은 전투원 중 가장 뛰어난 무력을 지녔지만, 굳이 따지자면 연구원에 가깝다. 일종의 총괄 책임자다.
그들은 매뉴얼 옆에 첨부된 지도를 보며 승강기에 탑승해 <식사동>으로 이동했다.
식사는 쓸 만했다.
놀라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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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글 쓰는 사람입니다(좀 오래 씀).
소위 '규칙서'를 접한 우주인들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를 SF 형식으로 적었습니다.
마시따 마시서
더써줘 학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