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에릭 도련님께.
안녕하세요, 도련님. 도련님의 전속 메이드였던 제니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계신다면 도련님께서는 아르텐 백작령으로 다시 돌아오셨다는 의미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도련님을 맞이해 주는 것은 비옥하고 기름졌던 영지가 아니라, 서대륙의 사막처럼 메마른 논밭과, 끔찍하게 변한 마을 사람들의 거주지일 것입니다.
크게 풍족하지는 않지만 늘 웃음이 넘치던 영지민들은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튼튼하던 영주성은 사람 대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폐허가 되어 있을 겁니다. 아마 도련님께서는 불길한 가슴을 억누르며 걸음을 재촉해 영주님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겠죠.
도련님.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편지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중앙 공작가의 따님과의 정략 결혼 문제로 영주님과 싸우고 가출한 뒤, 1년. 갑자기 마을에 그것이 나타나 영주님께 교회를 세워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언제나 묵묵하던 기사단장 클라운 경마저 목소리를 높이셨습니다. 하지만 영주님은 마치 무엇인가에 씌이기라도 한 것처럼 저희의 말을 모조리 묵살하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셨습니다.


영주님께선 영지민들을 총동원해 어지간한 건물도 작게 보일 만큼 커다란 교회를 세워주었고, 직접 그 교회의 신도가 되어 그것이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사랑과 평화로서 영지를 다스렸던 영주님이 직접 말을 타고 약탈하듯 세금을 걷어가고 영지민을 창칼로 찔러 죽이는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영주님께서는 마님에게 교회의 신도가 되라고 말씀하시자 마님이 거절하셨는데, 그 때 언제나 온화하게 마님을 부르시던 영주님께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함께 폭력을 휘두르셨고, 마님은 그 때 돌아가셨습니다.


영주성의 고용인들은 하루에 몇 명씩 목이 날아갔습니다. 그 때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영주님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영지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벗어나려 애를 써도 같은 자리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도련님. 서쪽 산을 보시면 커다란 교회 하나가 있을 텐데, 십자가의 방향이 이상할 것입니다. 절대 그곳으로 가지 마세요. 기사단장 클라운 경은 영주님을 위해 그것을 처치하러 교회로 향하셨지만 목만 돌아오셨습니다.


그것이 이 영지에 오고 6개월 후, 영지민의 반 이상이 그 교회의 신도가 되었습니다. 영주님은 도적 떼보다 못한 모습으로 신도들과 함께 신도가 아닌 영지민들을 본격적으로 약탈하고 학살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도련님께서도 영주님을 발견하시면 앞서 말씀드린 교회와 영주성 빼고 어디든 숨으세요. 영주님을 설득해 정신 차리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시길 바랍니다.


도련님도 장성하셔서 충분히 아시겠지만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 이건 도련님이 읽던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주님이 제정신을 차리고 도련님을 도울 것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죽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벨라 기억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졸졸 따라다니던 7살짜리 어린 소녀요. 그녀는 영주님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분명히... 목숨을 잃었었습니다. 저도 제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죽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도련님이 검술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은 저도 잘 아는 바이나 클라운 경보다는 약할 것이라 실례인 줄 알면서도 감히 말씀드립니다.


모습이 비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거나, 가능하면 파괴하세요.


부단장 아란 경께서는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다 물에 비친 자신에게 잡아먹히셨습니다. 모습이 비치지 않게 물을 드세요.
시종장 데일은 검날에 비친 자신의 손가락에 머리를 관통당했습니다. 검을 다룰 땐 부디 조심하세요. 검집에 넣고 다니다 필요할 때만 짧게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거울과 창문에 가까이 가지 말고 멀리서 전부 부수는 걸 추천드립니다. 가만히 놔두면 깨고 나옵니다. 저는 그 때 왼팔을 다쳤어요.


지하는 더욱 위험합니다. 그것은 그 큰 교회를 세워 놓고 각종 행사를 지하에서 진행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숨어 다니면서도 지하에 숨지 않았습니다. 지하로 향하는 길은 쳐다보기만 해도 그것과 마주했을 때만큼이나 몸이 떨려옵니다.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밤이 되면 경박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귀를 막지 마세요. 귀를 막는다는 것은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이고 순식간에 여자의 관심을 끌게 될 것입니다.
그 여자는 어디에든 있습니다. 절대 시끄럽다고 귀를 막지 마세요.


밤에 움직이지 마세요. 그것은 낮에 교회에서 행사를 진행하지만 밤이 되면 영주님과 신도들을 이끌고 영지를 한 바퀴 돕니다.


도련님의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진 모르나, 신도들과 마주치지 마세요. 뒤에서 단검으로 목과 등을 수십 번 찔렀는데도 멀쩡히 움직였습니다.
불을 붙이고 도망쳐 봤지만 일주일 후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몽동이로 머리를 깼지만 머리의 파편이 조금씩 이동하며 다시 제자리에 붙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수단을 써도 신도들을 죽일 수 없으니 피해 다니세요.


물은 비치지만 않으면 괜찮지만 음식은 아닙니다. 나무열매든 어딘가에서 운 좋게 발견한 고깃조각이든 산짐승이든 익혀서 드세요.


하지만 그냥 바짝 익히기만 하면 안 됩니다. 거의 탈 때까지 익히셔야 합니다. 맛은 없겠지만 도련님 속에서 자란 무언가가 배를 뚫고 나오는 것을 직접 보는 것보단 낫습니다.


도련님이 얼마나 착한 분인지 바로 옆에서 지켜보아 온 저는 잘 압니다. 개 한 마리가 다쳤을 때 손수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매주셨죠.


하지만 이곳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신도들에게 습격당하는 사람이 보여도 구해주지 마세요. 그냥 외면하세요. 지옥에서 베푸는 인정은 도리어 자신의 목을 죄는 밧줄일 뿐입니다. 명심, 또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폐허가 된 영지 중에서도 멀쩡한 집이 존재합니다. 손도 대지 않았는데 저절로 열린다면 절대 들어가지 마세요.
안에서 마님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제가 도련님이 슬퍼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면서도 마님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쓴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릭 도련님. 희망을 잃지 마세요. 마음 굳게 먹으시고 탈출할 방법을 생각하고 시도해 보세요.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존재합니다. 어떻게인진 모르겠지만 기사 몇이 영지를 벗어날 뻔했었습니다.


분명 방법만 알면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다 보니 도련님과 함께했던 나날이 떠오릅니다.


도련님은 다친 저를 다정하게 치료해 주신 것은 물론, 접시를 깬 저를 위해 허술한 거짓말을 하셨죠.
부모님이 아파 걱정하는 절 위해 희귀한 약을 선물해주셨고, 책을 읽고 싶어하는 제 의중을 읽고 보좌하라는 명목을 내세워 절 도서관에 데려가셨죠. 덕분에 저는 그 도서관에서 작은 마법 하나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 도련님. 너무나도 착한 에릭 도련님. 제가 생의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인 것 같습니다.


도련님. 와인 저장고에 가시면 왼팔이 없는 시체 한 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시체를 깨우고, 눈앞에 이 편지를 보여주세요.


그럼 그녀는 도련님이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아닌, 한 명의 여자로서 한 명의 남자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