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영이 엄마에요."
"순영이?"
"아 왜, 접때 그 학생 말예요. 똑단발에 키는 작구, 코는 납작허구."
"그 애 이름이 순영이였어 그래?"
"마을을 몇 번을 들락날락거림서 아직까지 애들 이름을 모르셔."
휴가 차 외할머니 시골집에 내려와
술에 잔뜩 취해 마을 어귀에서 골아떨어진 난,
두 사람의 대화에 슬며시 눈을 떴다.
주변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ㆍㆍㆍ덫을 놔두 진즉에 망가뜨려버리니까는."
"먹힐만 한 걸로 놔둬야지. 다 보이게 놔두는데 그걸로 어찌 할꺼야."
나이 든 여성과 남성의 것으로 들리는 목소리.
이렇게 어두운 날에,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마을 어귀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조금 스산하긴 했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누구는 산군님이라고 그러구, 누구는 집채만큼 컸다고 그러구."
"거 사람들도 참, 부풀리는 걸 솔찮이 좋아해. 집채만한 범이 어딨다구."
생각해보니, 예전부터 외할머니네 마을에서는 종종 호환이 난다고 했다.
덕분에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해가 지자마자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불같이 성을 내곤 하셨었다.
21세기 한국에서 호환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어떻게 방법이 읎겠어요? 젊었을 때는 사냥하신답시고
이 산 저산 쏘다니셨음서."
"거 참, 나이가 들었는데 사냥이 무슨 말야. 이젠 무릎도 쑤시구, 발도 쑤시구.
배겨나는 곳이 읎다구."
마을 뒷편에는 산이 있었다. 사춘기 무렵, 엽사 삼촌들과
멧돼지를 잡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거기서 엄청 큰 고양이가 찍은 것 같은 발자국도 하나 봤었는데.
삼촌들 말로는 호랑이 발자국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에 야생 호랑이가 진짜로 있긴 있구나.
"사람들이 그러는데, 이젠 밤에는 누가 이름을 불러도 세 번 까지는 절대 안나간대요."
"왜 또 그런짓을 한대."
"아 보통 범이 아니니깐은. 범한테 잡아먹힌 사람이 귀신이 돼서
가족들 이름을 부르는데, 세 번 안에 대답을 하면 홀려버린다는거에요. 글쎄."
"그런 귀신이 세상천지에 어딨어. 범한테 끌려간 가족이 살려달라구 막 비명을 지르는데,
그냥 무시해버리기에는 죄책감이 드니깐은. 저건 귀신이다. 귀신이 부르는 소리다.
나가면 안된다... 죄책감 덜라구 그러는 모양이지. 사람들도 참..."
옛날에 중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적이 있다. 박지원의 호질이였나?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면 그게 귀신이 된다는 내용의 소설이였다.
요즘 애들은 아마 알지도 못 하는 옛날 얘기일텐데.
"오늘은 어떻게 안출출허시우?
저번에는 이 시간만 되면 허기가 지다구 막 그러셨으믄서.
어떻게 애 시켜서 뭐라도 좀 차려오라구 할까요?"
"이 나이 먹구 매일 같이 가족 시켜먹으면 구박당하는 법야.
딸 애는 부르지 말어. 시켜먹는 것도 눈치 봐 가면서 시켜먹어야지."
"아유우, 알았어요. 알았어. 나두 딸애 손 맛이나 볼까 했더니.
가까운 데서 찾아볼게요, 그럼."
이 말을 마지막으로 두 부부의 대화는 끝난 듯 했다.
따님이 찾아오셨나보다. 시골 집 노부부와 휴양을 온 딸.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
이 얼마나 화목한 전원생활인가.
나도 나중에 가정을 꾸린다면,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를 데리고 다시 놀러와야지, 하는 흐뭇한 생각을 하면서 일어날 참이였다.
...
무언가 잘못되었다.
어느샌가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