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출근길에 나서던 평범한 회사원 김해붕은
마이티 트럭에 치이는 끔찍한 사고를 경험하게 된다.
정신을 그만 잃어버린 해붕은 꿈 속을 헤매던 중,
귀를 찢는 듯한 종소리를 듣게되고.. 그 순간, 잊고 살았던
한 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정신을 차린 그는 맨들맨들 깎인 밤톨머리를 한 채
어느 배의 갑판 위에서 눈을 뜨게 된다.
그렇게 수 년동안 가슴 한 켠에 꼭꼭 숨겨놓아
잊고 살았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그의 머리 속에는 '살아남아라!' 라는 생각만이 자리잡기 시작하는데...





-제 1장: 추억속으로 사라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밤이었다.
평범한 회사원 해붕은 오랜만에 만난 동기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해붕은 이미 군대를 나온지 꽤 된 몸이었지만.
동기는 아직 계속 군대에 남아 중사까지 진급 한 상태였다.
오랜 시간 많이 힘들었는지, 그의 손에는 온갖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비 오는날 참을 수 없다며 시킨 해물파전와 뜨끈한 어묵탕,
소주 한 병을 놓고 해붕과 그의 동기는 군대 이야기와
인생 이야기를 한참동안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무르익어가고 탁상 밑에는 소주병이 쌓여갔다.
그에게 다음 날 출근이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동기를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며
좋았던 시절로 돌아간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동기가 '해군 부사관의 재입대' 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했다.

"야 해붕아, 요새 사람 없다고 난린데
재입대라도 해봐, 이번엔 너도 장기 된다니까?
지금 사람 없어서 난린데."

"아 형 재입대는 뭔 재입대야 개소리는.
뭔 시바 해군은 맨날 사람 없다더라. 나 있을때도 그러더니."

"아니, 진짜 너 나이면 아직 들어와도 괜찮아, 지원해보라니까?
요즘 사람 없어서 너처럼 나왔어도
왠만해서는 다 받아주는 분위기라고."

"에이 됬어, 옷 벗은지 4년인데 무슨 군대야 군대는.
마시기나 하자. 간만에 보니까 너무 좋다."

라고 말하며 동기의 술잔을 채워주는 해붕이었다.
하지만 한창 대화를 하던 동기는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스마트폰만 두들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는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급한 연락을 받고있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한창 취해있던 청년의 눈에는
그런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다음날 아침, 해붕은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골목길을 달렸다.
속이 메스껍고 온 몸에 땀이 났다.
하지만 지각을 해서 겪을 고통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는 이를 악물고 골목길을 달려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신축 오피스텔 옥상에서 그를 지켜보던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는채로.

"1-3, 1-0. 목표물, 귀측에서 10시 방향으로 접근중."
"확인, 본측에서 10시 방향,
흰색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의 목표 육안으로 식별."
"목표물을 죽이지 않게 기어는 2단에 넣을것."
"확인."

오피스텔의 옥상에서 멀티캠 전투복을 입은
복면 쓴 사내가 망원경을 쥐고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렌즈 속에는 핸드폰을 바라보곤 바쁘게 뛰어가는 해붕이 담겨있었다.
이윽고 그는 계속 해붕을 응시하며 누군가에게 무전을 했다.
그의 오른팔에는 해군 최정예 특수부대로 이름 높은
UDT/SEAL의 휘장이 벨크로에 붙어있었다.

무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 골목길에 있던 에어컨 업체 차량에 시동이 걸렸다.
한편 바쁘게 역으로 뛰어가던 해붕에게는 비상이 걸렸다.

"헉헉...아 씨발 과장한테 존나 닦이는거 아냐?
하 진짜 내가 미쳤지 내가 왜 어제 술을 마셔서..."

끼이이이이익!

"어!!!어어!!!! 뭐야!!! 어어!! 밀지마라!!! 으아아아아!!"

쾅!

해붕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어린 시절부터, 눈물로 마무리 해야 했던 부사관 시절,
그리고 어제 술을 마시던 자신의 모습까지...
이윽고 그는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몇 초 후 해붕을 친 트럭에 비상등이 켜졌다.
그리고는 트럭에 타 있던 작업복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
재빨리 해붕을 들쳐 매 뒷좌석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정신이 드세요?"
"어이 오 대리, 병원으로 데려가자고!"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해붕을 들쳐업은 사내들은
그를 뒷좌석 의자에 눕히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을 잃은 그를 앉힌 채 수갑과 안전벨트를 채웠다.
마치 원래 그 곳에 앉아있던 사람처럼.
해붕을 뒷좌석에 태운 그들은
곧바로 원래 자리에 앉자마자 외쳤다.

"퇴출! 퇴출!"
"시루봉, 여기는 부엉이, 목표 확보.
지점으로 퇴출하겠음. 예상시간 45 마이크."
"부엉이, 여기는 시루봉, 수신완료.
최대한 주의하여 퇴출 할 것."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해붕은 찢어질듯한 타종소리에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있는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공기는 그가 아는 병원의 공기가 아니었다.
불쾌한 비린내와 함께 섞여 들어오는 소금기 가득한 짭조름한 공기,
눈을 찌르는 강렬한 태양의 빛.
그리고 그 햇빛을 받아 잘 달궈진 철판 위에 널부러진 그에게는
하얀 환자복 대신 군청색의 츄리닝이 입혀져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어제 그와 술자리를 함께한 동기와
사내 셋이 함상복 차림으로 그의 옆에 서있던 것이였다.

신음소리를 내며 깨어난 해붕은
유일하게 그를 아는 사람인 그의 동기에게 나지막히 물었다.

"뭐야 여기가...어디야?"

"...."

동기는 고개만 푹 숙인채 말이 없었다.
해붕은 재차 물었다.

"형... 여기가 어디냐고 묻잖아...응? 대답좀 해 봐."

"....."

"어? 형 잠깐만...장난치는거지?
저 함상복 입은 사람들도 그렇고
지금 나한테 몰카하는거지? 그치?"

"정신이 들었나봅니다."

가슴에 뱃지를 단 원사가 대위에게 느즈막히 말했다.

"으음, 출항까지 얼마 안남았으니 자초지종은 나중에 설명하지."

함상복 차림의 대위 계급장을 단 사내가 목에 힘을 주고 이야기했다.

"뭐? 당신은 또 누구야? 이거이거 어떻게된거야...
아니 설명을 해봐요! 잠깐 이게 무슨 일이에요!!!!
사람 잘못 봤어요 저 민간인이에요!! 아니 나는... 나는..."

그 순간, 해붕은 머릿속에 종소리가 울려퍼지는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던 동기가 드디어 입을 열였다.

"여기는 강습 항공모함 태백함이야."

"뭐...? 이런 씨발 장난치지 마!!!
그럴리가 없잖아!! 난 전역한지 벌써 4년이나 지났단 말이야!!"

역정을 내던 해붕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어갔다.

"... 잠깐, 그럼 어제 술먹다가 한 이야기가 설마...?"

그는 곧 충격에 휩싸였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세트장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상황이 다 거짓말 같았다, 거짓말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의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배가 정박할때의 그 미세한 출렁거림을.
이윽고 동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해붕아 미안하다... 내가 돈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

"형...잠깐만.. 형!! 야 이 개새끼야!!
니가 어떻게 그럴수 있어!!! 니가 어떻게! 이 개새끼야아아!!"

그는 오열하며 자신을 배신한 동기가 있던 자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갑판사관에게 건네받은 종이봉투를 손에 쥐고
저 멀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난 억울해!! 난 억울하다고!!
이미 제대한지 4년이나 지났단 말이야!!!"

"장교 앞에서 군기가 굉장히 해이해졌군. '김해붕 하사.'"

"뭐...?"

"최 수병, 전입인원을 '사관실'로 안내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뭐...? 사관실..? 안 돼..! 안 돼!!!"

"야 이거 안놔? 놔!!! 당신 나가면 민원찔릴 각오해 알았어?!"

퍽!

독기로 가득차있던 해붕의 눈이
외마디 신음소리와 함께 스르르 풀려갔다.
눈 앞이 점점 희끄무레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건장한 수병 두 명은 오늘 저녁메뉴에 관해
열띤 토론을 펼치며 그를 사관실로 끌고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