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문학, 예술, 과학, 종교, 사회 가리지 않고 다 찾으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 결과가 유용한 거 같아서 늘 감사하던 여러분에게 공유하고 싶음.
1.인간의 보편타당한 공통 요소는 '고통'임. 각자 어느 분야에 어떤 강도로 고통을 느끼는지 다르지만, 결국 괴로움, 고통이라는 면에서 동일함.
2.그런데 '고통'은 본질이 아님. 인간은 누구나 '고통'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함.
3.인간의 보편 타당한 방향성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방향'인 거지. 그 방향성을 이루지 못하면 저항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것이 '고통'
4.인간은 근원적으로 '조화'를 추구하고, '조화 상태'에서 기쁨과 행복, 만족을 느낌.
5.'조화 상태'에 이르려는 근원적이고 자연스러운 방향에 저항이 생기면 '고통'
6.이런 관점에서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 상태를 찾지 못함.
7.심지어 인간을 넘어 모든 물리적 현상이나 상태 해석에 공통점이 있음. 기체의 근원적 속성은 확산임.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방향으로 확산하는 것이 근원 속성임. 이걸 강제로 어떤 상자에 담아 막으면 기체의 근원적 속성에 의해 '응력'이 발생함. '응력'을 영어로 Stress라고 함. 원래 속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강제로 막는 경우 Stress가 발생. Stress는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와 같음.
8.이건 열역학 엔트로피랑 동일한 설명임. 국지적 엔트로피 역전이 '본래 속성을 강제로 막는 것'에 해당하고, 이 과정에서 전체 엔트로피는 그만큼 증가해서 전체 엔트로피는 유지, 국지적 엔트로피 역전을 강제하는 지점에서 Stress가 발생.
9.심지어 해밀턴 역학도 같더라? 거기서 쓰는 개념은 '조화 진동자'고, 이름부터 '조화'임. 이게 그대로 양자역학으로 이어지면서 대칭과 보존을 설명함.
10.뉴턴 역학은 '관성'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역시 원래 물체의 속성과 외력이 가해지는 변화에 대해 기술함. 충격량이 Stress에 대한 뉴턴 역학 설명에 해당. 여기에 로렌츠 변환과 상대성 넣으면 상대성 이론이고,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며 대칭과 보존이 나옴.
11.그대로 유체 역학이나 동역학으로 옮기면 나비에-스톡스 방정식으로 나오고, 역시 같은 원리.
12.내가 찾아본 모든 것에서 동일하게 나옴. 해석 역학으로 봐도 모든 것은 대칭, 각기 변화하며 보존. 각 세부 분야는 물질과 에너지의 근원 속성인 '조화'로 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과정과 Stress를 기술함.
13.다시 인간으로 와서, 결국 인간은 조화를 향하는 것이 근원 속성임. 그 방향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저항이 생기면 Stress, 고통.
14.이 인간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생각, 감정, 언어, 문자가 개입.
15.인간이 고통을 느끼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기 위해서는 저항이 없어야 함. 하지만 생각-감정-언어-문자는 생각과 감정을 언어와 문자로 변화 시키면서 무제한 증폭하는 속성이 있음.
16.내가 어떤 생각을 하면 그 생각과 감정, 충격은 나 하나에게만 존재. 그걸 언어와 글로 기록해 남기는 순간, 불특정 다수가 보면서 각자 충격이 발생하며 생각과 감정이 엄청나게 늘어남. 그리고 당연하게 불특정 다수도 나와 같이 생각과 감정을 언어와 글로 기록해 남기는 것이 가능하므로, 이건 무제한으로 증폭하는 피드백임.
17.결국 인간이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근원 속성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증폭 피드백에서 부조화, 고통(Stress) 형태가 반복되는 것은 그 자체로 재앙임. 충격의 반복으로 무한하게 부조화와 고통이 증폭됨.
18.반대로 증폭 피드백에서 조화로운 무언가를 내놓으면, 실체가 없는 생각과 감정이 인간에게 무한하게 증폭되면서 영향을 끼침. 마치 정지 질량이 없는 광자, 단 한번도 검출하지 못한 중력자가 실제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자기파와 중력 형태로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음.
19.이런 관점으로 보면 생각과 감정을 억압, 강제, 위협, 검열 형태로 내놓으면 피드백 과정에서 부조화가 증폭되며 점차 현실 세계의 인간을 부조화로 이끈다는 결론이 나옴. 반대로 생각과 감정을 조화로운 형태로 내놓으면 피드백 과정에서 조화가 증폭되며 점차 현실 세계의 인간을 조화롭게 만든다는 것도 나옴.
20.뜬구름 잡는 사이비 종교적 망상이나 신비주의, 과학 오용이 아님. 실제 역사에 조화를 증폭한 증거가 있음.
오스카 쉰들러, 니콜라스 윈턴 경, 요한 반 헐스트, 이레나 센들러, 아돌포 카민스키, 한스 폴레, 얀 자빈스키-안토니나 자빈스키 부부, 장기려, 유일한, 이태석, 서재필, 안창호, 손양원,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넬슨 만델라, 틱낫한, 달라이 라마 14세, 알버트 슈바이처, 도로시 데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제인 구달, 마더 테레사, 마호메트, 크리슈나, 석가모니,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예수.
21.어떤 편견이 있는 사람은 저 목록 인물이 부조화를 늘렸다고 반박할 수도 있는데,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 종교적 관점이나 그런 것이 아님. 특정 종교 때문에 세상에 부조화가 늘어났다고 주장하려면, 반대로 그 종교 창시자가 존재하지 않는 역사를 가정하고 비교해야 함. 저들은 각자 역사에서 조화로운 증폭을 일으켰고, 그게 언어와 문자로 남아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 없던 역사와 비교하면 조화로운 영향력으로.
결론 :
인간의 보편 타당한 본성은 조화를 이루는 것, 반대는 고통.
본디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를 비판하는 것은 그에 의한 피해자, 부조화에 이른 사회를 걱정하는 조화로운 마음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사과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사과부터 떠올리는 것이 인간이다.
악한 것을 비판하는 순간 악한 대상과 그걸 공격하는 악의 형태 방법론이 언어와 문자로 남게 되고, 엄청나게 증폭한다.
결국 부조화한 생각, 감정, 언어, 문자를 쓰는 순간 스스로 증폭하여 고통과 저항의 굴레를 만든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를 비판하는 방식은 그들이 억압과 강요, 검열로 접근했기에 완전히 실패한 것과 동일한 이유로 실패하고, 심지어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고통과 저항의 굴레를 만든다.
더 나은 방식은 조화로운 모습을 생각하고, 말하고, 언어와 문자로 남기는 것이다.
행복하고 조화로운 관계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 해야 하는 것, 국제 결혼을 했는데 관계가 행복하고 조화로운 점에 대해서 이야기 하거나, 자신이 조화롭다 생각하는 모습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만이 당신들이 가장 싫어하는 자에게 영향 받아 가장 싫어하는 모습으로 닮아가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당신의 시간은 유한하고, 당신이 조화롭다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말하며 추구하기에도 항상 시간이 부족하니까.
저는 해딸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갤러들과의 문답을 모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장에서 담론의 장이 되었네요. 한국 인터넷에서 나오기 어려운 고명한 글과 댓글들입니다. - dc App
댓글을 읽으니 문득 일체유심조가 떠오릅니다
시발거 (대충 따봉도치짤) - dc App
위의 댓글들을 보니 확실히 업보가 보이기는 합니다. 저도 예전 기억이 납니다. 오래전부터 부조화에 앞장서신 분이 이런 글을 적으니 선입견이 없기는 어렵겠네요. 인간은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나 불교에서는 그렇게 설명하던가요? 확실히 파고들수록 약점이 많기는 합니다. 부조화의 입장에서 비판한다면 살아남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그 정도의 업보가 쌓여있으니까요.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사실관계네요. 기분을 고려하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 우주상의 티끌만도 못한 지구에 사는 미개하고 하찮은 인간으로서 그럼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마찬가지로 하찮은 가족이나 챙겨야겠습니다.
오히려 좋지요. 말하는 놈이 먼저 말을 바꿨는데, 다른 사람들도 생각을 바꾸기 쉽지 않겠습니까? - dc App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은 석가모니가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런 선언 전에도 원래 인간은 그럴 수 있었죠. - dc App
이분법을 벗어나면 저는 일관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모르며, 모르면서도 그 순간 쓰고싶은 똥글을 디씨에 남깁니다. 어떤 돈, 명예, 권력을 얻지 않는 대신 자유를 얻었죠. - dc App - dc App
저와 비슷하시네요. 다른 점이라면 저는 이 세계관과 가치관을 이슬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뿐입니다. 그냥 가족이 무슬림이라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걸 수도 있지만요ㅋㅋ 그게 이슬람의 전략이기도 하고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탐구한다는 게 하찮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보람찬 일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도달할 수 있으면 그건 진리가 아니고 공식일 뿐이라고 봅니다.
인간이 발견하는 공식이나 법칙들은 더 나은 패러다임을 찾으면 언제든지 갈아엎을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는 신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도달할 수 없기도 합니다. 이건 이슬람의 관점입니다. 이슬람철학 대부분은 '알라후아크바르' 즉 신은 위대하다로 설명이 가능하며 이슬람은 신이 진정 위대하다면 어떠했을 것이다 라는 접근법으로 객관성을 얻었습니다.
신이 정말 위대하다면 저 이기적인 유대인, 크리스천이나 이 하찮은 우리 인간들을 선택했을까? 신이 정말 위대하다면 그 어떠한 인공물이나 자연물도 신을 감히 대변할 수는 없겠지 따라서 우상은 의미가 없다. 신이 정말 위대하다면 인간 따위가 신성을 가질 수 없다 즉 예수도 성직자도 그저 인간일 뿐이다. 신이 정말 위대하다면 우리들은 신 앞에 모두가 하찮겠지 우리들은 모두가 평등하게 하찮으니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어야한다. 신이 정말 위대하다면 성경은 이슬람이 나오게 된 배경을 적어놓은 짤막한 책자일뿐 신은 신이고 책은 책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신이 정말 위대하다면 우리 하찮은 인간들은 신에게 도달할 수 없고 신과 소통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찮은 인간들끼리 스스로 지혜를 모아서 사회를 지속하기 위한 질서를 만들어야한다. 신은 정말로 위대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발전해봤자 신의 영역을 넘볼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하찮은 인간으로서 얼마든지 과학을 발전시켜서 지식을 탐구하고 인간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위대하신 신의 뜻은 인간 따위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 서로 논리와 힘으로 겨뤄보자 일단 살아남아서 번성하는 학파가 더 신의 뜻에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위대한 신 앞에 계급도 우열도 없이 모두가 하찮은 인간들이다 이 자살테러로 너와 나의 평등한 죽음을 보임으로서 그걸 증명하겠다.
신은 위대하기 때문에 인간 따위의 인지 밖에 있다 그래서 논지전개에 굳이 신을 넣을 필요가 없다. 위대한 신 앞에 저 이교도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인간들이니 자비를 베풀고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유지에 방해되니 세금이나 더 받자. 신은 위대하고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돌아간다 인간 따위가 알 리 없지. 이것들 전부가 알라후아크바르로 나올 수 있는 발상들입니다. 일단 지금 떠오르는 것만 적어봤습니다. 많은 발상들 중에서 이슬람의 학파에 따라서 어떤 건 채용하고 어떤 건 채용하지 않기도 합니다. 진리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에 각각의 학파의 관점에서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걸 채용하고 그들 사회에 적용합니다. 단 이것들 모두가 이슬람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는 하찮은 인간은 그런 과정에서 자살테러나 폭력까진 필요치 않으며, 그래서 완전히 제거는 어렵겠지만 줄이는 방향성이 아름답다고 한계를 가진 채 선언하는 것입니다.
자살테러는 주류 이슬람에서 권장되는 방법이 아닙니다. 물론 과학과 구조가 닮아있는 이슬람의 특성상 특정 파벌이 강성해지면 주류가 바뀔 수 있기는 합니다. 폭력의 경우에는 강력한 법치로 인한 폭력은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가족사회를 해칠 요소가 있는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모조리 처형시켜버리니 말입니다. 이것도 학파와 나라에 따라서 다르기는 할 겁니다. 이것을 자유와 인권에 제한이 걸린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슬람 관점에서 보자면 가정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 부정행위자들을 정당하게 처벌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모든 생물은 유전자 레벨에서 종 전체를 위한 기능과 개체 단위를 위한 기능으로 분별해 볼 수 있고 그렇기에 인간의 의식도 그러함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자아가 개체를 위한 기능이고 초자아가 전체를 위한 기능이겠지 프로이트는 초자아가 부모의 훈육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봤지만 나는 진화적으로 단세포 단계부터 전체를 위한 기능으로 기원이 있을 것이라 봄. 초자아가 너무 우세하고 자아가 열세이면 노예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자아가 너무 우세하고 초자아가 열세하면 사이코패스, 권력추구자가됨(dark traid). 전통적인 종교적 철학관은 초자아(전체)를 북돋아 두는 쪽으로 논리구조가 짜여져 있고, 니체철학은 자아(개인)에 방점이 찍혀 있음. 현대사회는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전체주의 파시즘에 대한 반발로 개인쪽으로 너무 많이 치우쳐 진것이 아닌가 생각중. 전체와 개인 구조의 프렉탈은 어디든지 존재하니까(세포-암세포 문제, 세포자살 등등). 다만 이 반동이 극단적인 전체주의로 발현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선과 악을 건조하게 바라보면 선은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고, 악은 개인을 위한 전체의 피해무시라고 봄. 그리고 인간이 악을 쓰는 경우는 결핍이 발생했을 때 결핍을 해소하기위해 쓰는 것이고. 그렇다면 여성은 왜 악에 더 가까운가? 아이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만족을 하기 어렵게 만들어 졌기 때문(이것도 역시 진화적 요인). 여성성은 평등과 자애를 바라지만 나의 남자에게는 높은 계급의 남자가 되기를 바래서 인간 사회가 구조적으로 계급사회가 되도록 만듬. 남성의 승부욕의 근본적인 동기는 높은 등급의 여성을 얻기 위한 성욕이기에.
positive feedback에 의한 어떠한 일탈도 더 큰 프레임에서 보면 결국 그 에너지가 다른 발발작용에 의해서 다하고 특정지점에서 멈추며 다시 해당 위치로 에너지를 가지고 돌아가는 순환을 이룸. 전체와 개인도,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내 관점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잘 함양하고(알아가는 것은 반작용이 그나마 적은 기쁨이니까) 본인의 삶의 의미를 찾아(게임에서 특정 플레이를 추구하듯이) 그걸 이루기 위해 사는것. 나는 개인적으로 인류의 복잡도 증대(엔트로피 감소)에 나와 내가 남긴것들이 최종적으로 얼마나 기여할지에 관심이 있음.
전체 집합으로 보면 결정론이지만, 개별 원소로 오면 비결정론이죠. 그래서 어차피 결정적이기에 의미가 없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유가 없으니 자유롭고, 기존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삶에서 전체(초자아)와 개인(자아)의 균형(중용/조화)을 찾는 것이 중요한것 처럼 개인의 인생에서 인생의 목표에 대한 질서(틀)와 혼돈(자유)의 중용을 찾는 것도 중요한듯함. 항상 건투를 빕니다. 제 가치관에도 영향을 주셨어요.
지금까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난다. 하지만 어쩌면 그 진정한 속 뜻은 글쓴이가 말한 증폭 피드백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부정의 것이 확산된다면 긍정의 것으로 재확산시킨다. 그동안 불확실성에 망설였지만 덕분에 이제는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이치를 깨달으니 삶의 방향성은 저절로 보이는구나
고정된 이치도 없고, 보이는 방향성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는 것만 있습니다.
님 직업이 뭐에요?
보이는 그대로 디씨 병신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dc App
페미가문제가아니라 문제는 정치권에서 합작해서 남성을 죽이고있다는것임 저건 나머지가 정상적일때를 전제하고 말하는내용 틀렸다고볼수있음
'내가 정상이고 상대방이 비정상이기에 내가 이러는 것이 정당하다'라는 관점은 상대성과 자기중심성으로 보면 상대방 또한 같은 논리를 구성한다고 보입니다.
지능이좀.. 남성 규제탄압하고 죽이고있는거 누가봐도 사실이고요 각종 여성할당제 혜택들이 즐비하고 산업재해 95퍼 남성사망 군강제징병 보상x 이게 동일하게 같다고 전제하고 말하는거자체가 ;;;
한국은 사기가 전세계에서 1위입니다 님말이 애초에 성립이안돼요
저는 절대적인 의미로 비교한 게 아닙니다. 그런 오해가 생김은 제 글솜씨가 부족한 까닭이니 미안합니다. 제 닉네임으로 개념글 검색하시면 확인이 되겠지만, 말씀하시는 그런 문제는 오랜 기간 제가 비판하던 부분입니다.
저는 주갤에서 그 누구보다 뒤틀린 나거한을 비판하고 조롱했지만, 결국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내가 그들과 닮아갔습니다.
페미를 비판하면 나에게고통이오니까 비판하지말라고들리는데요 이건 독재를 정당화하는거나 다름없습니다 ㅇㅇ 그런식이면 공부도하지말고 일도하지말아야죠?
사실 님이 저나 다른사람들에게 댓글을 다는것만봐도 님말에 오류가있어요 님말을지키려면 글을쓰시면안됩니다
이전에 저는 2030 남성 세대가 지금의 모습과 다르게, 향후 나라의 메인이 될거라 예상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결국 쭉정이만 남는 나라라도 그렇게 될거 같더군요. 그 시기에 지금 86세대나 페미세대와 비교도 하지 못하는 악귀가 될거라 말했었고요. 왜냐면 가장 경쟁력 있는 집단이 가장 강한 수준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강력한 정당성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정당성이 옳다 그르다는 부차적 문제입니다. 단지 역사상 가장 큰 악의 등장은 언제나 스스로 선하다 자신하고 정당성을 지닌 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스스로 피해를 입었다 여기고, 스스로 정의롭다 여기며, 핍박받던 자에서 핍박하는 자가 된 과거 사례가 떠오르더군요. 86세대, 페미니즘. 나는 그렇게 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저는 주갤을 한다, 안한다라는 이분법도 벗어납니다. 주갤을 하면서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고 말하며 나눈다면 그것도 행복이 될 수 있지요. 장소는 상관없는 거 같아요. '나는 어떤 것을 한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스스로 거는 속박이 되어 자유를 잃습니다. 어차피 본문 글과 생각도 선생님이 행복한 모습을 나누며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이니, 제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이 맞다면, 그러한 생각과 느낌이 들 때에, 소중한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나눠보는 것도 좋다고 여깁니다. 소중한 사람이 당신을 더 깊히 이해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됩니다.
당신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직 주갤에 필요해요.
다른 부조화스러운 것과 비교를 완전히 뺀, 순수하게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이야기만요.
우린 오직 스스로가 완벽하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변함을 인정함에도, 여전히 매 순간 느낀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최선입니다 - dc App
아 딸치고 싶다
팩트)) 치고 싶으면 언제나 칠 수 있다
진짜 주갤 철학관이노ㅋㅋ
저는 반항기질이 심해서 세상이 정한 틀을 조금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딱히 철학이라거나 뭐라고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안 좋아지더라도 나는 차라리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신앙과 사랑의 말로만 마음을 가득 채우고 죽기를 바랍니다. 어차피 만연한 악은 바뀌지 않기에 나는 내 안에라도 선을 채워 넣기를 바랍니다.
저는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이 없습니다. 투박한 아저씨라 사랑 같은 감정도 잘 모릅니다. 제가 뭘 채우는지 저도 모릅니다. 다만 결국 제가 해야 하죠. 본문은 세상에 만연한 악(부조화)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조화를 채우면 세상도 정직하게 그만큼 찬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개소리 닥치고 수리철학이나 공부혀
감사합니다. 수리철학이란 것도 적절한 때에 찾아보겠습니다. 사실 그런 개념이 있는지 수리철학이란 단어 자체도 몰랐습니다. 부족함을 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스껄...
덕분에 신조어를 새로 알아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ㄴ넵ㅋㅋㅋㅋ
이전과 다르게 무언가 벽 하나를 넘었나 보네 축하 드림 ㅋㅋㅋㅋ
한수 배우고 갑니다....궁금한게 있습니다. 조화로운 생각, 조화로운 감정, 조화로운 삶. 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조화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그건 사람마다 다르기에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진실된 자신, 나를 속이지 않으면 나만의 추구와 내가 아름답다 여기는 것이 계속 보이며, 우린 끊임없이 바뀌는 그것을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 dc App
확실한 사실은 조화로운 진실된 자신이란 정신적 괴로움이 없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 dc App
한마디로 이재명은 씨발새끼라는거군 - dc App
10연딸 정도는 한 글이고
못생기고 무능한 한남한녀가 도태되어 자기들끼리 싸우다 사라지는것도 진리입니다
잘난척 떨지말고 진짜 잘났으면 탈조를 빨리 처해라 여기 조선 커뮤에서 개똥철학 씨부리지 말고. 알겠어? - dc App
완전 허수아비 때리기의 논증오류네 - dc App
최근 주갤에 증오만 가득가득해져서 지쳐가던 도중 이렇게 정해진 답만 요구하지 않고 다들 생각쓰게 하는 글 있으니 너무 좋네 주갤 오래오래 안그만뒀으면 좋겠음 물론 앞선 댓글처럼 이상한 물리적 비유들을 사용해서 읭? 싶어지고 결국 주장하는 '조화' 가 그래서 무슨 의미였는지 햇갈리게 만드는, 원관념이 보조관념에 끌려가버린 그런 느낌이긴 함. 조화는 대칭성(보존성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관성등 etc) 개념인가? 아니면 무질서도의 상승인가? 아니면 뭔가. 물리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라도 조화롭지 않음이 고통이라는데 그것만으로 조화를 설명해 버린다면 조화의 개념은 뭔가. 조화는 고통이 없다는 것인가?, 스트레스가 없는 것? 이건 너무 생리적으로 들어가서 개념에 맞지 않겠지, 이 방향성이면 어그러질것임. 조화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 없이 우리 인간 모두에 내재된 이상향적 유토피아에 의존해 읽게 되어서 읭 스러움이 있음.... 조화가 무엇인지는 철학자들이 미리미리 다 생각해 놓았으니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정리하고 생각해가며 알아가면 될 것인데 이 글에는 그 노력과 과정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아쉬워요. 글에서 조화는 완성적인 방향에 대한 이동으로 설명되는것이 대부분이고, 특히 물리적 비유에서 그 방향의 대상들이 제각각인데 모든것을 조화로 설명하려 한것에서 더욱 느꼈음.. 조화의 외연이 너무 넓음. 외연이 너무 넓어서 많은것을 포함하게 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것. 물론 글의 표현의 한계와 내 이해력의 한계로 각각의 조건과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그 조화를 내가 캐치하지 못했을 수도 있음. 적어도 글쓴
이 머릿속에는 그 개념이 있을듯. 그래도 이 글이 정말 좋은게, 그리고 사람들이 결과를 정해놓고 글을 쓰는 것 같아 아쉽다고 한 게 결말부분이 좋고 동의할만 한 정말 완성된 논리같다는거임. 증폭 확산 과정을 가져와서 우리의 태도를 말해주는 글은 되게 너무좋았음. 조화로움에 대한 개념 없이도 설명될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하지만 조화로움에 대한 개념으로의 확장이 님이 가고싶은 다음의 방향성이라고 생각하면서 보게되었음. 기상 모델에서 소수점 몇자리 뒤를 생략했을 뿐인데 모든것이 바뀌어버리는 그 심오함이란! 복잡계에 대해서 쓴 이전의 글과 이어지는 흐름의 좋은 결론이라 생각함. 미시적인 부분에서 거시적인 부분이 창발되고 분야에 따라선 그 인과성을 도저히 기술할 수 없을정도로 복잡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심한 경우는 창발의 개념에서 전체와 부분의 인과성을 잃어버려 논리적으로 분리되듯 생각해 버려서, 개인으로서의 전체에 대한 책임감과 자기 피드백을 잃어버리고 정말 그래, 글에서 적힌 부조화 증폭 피드백을 끊임없이 실행해버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이런 글에서 희망을 얻고 감. 나는 철학도 수학도 과학도 좋아하지만 내가 그 학문에 일조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자신감은 없고 어릴떄부터 그런 천재들과 하도 엮이면서 스스로 얻어맞고 그 한계를 계속해서 인지받아서 어쩌면 내적으로 그 세 분야에서 스스로 단념해버린 사람임. 지금은 의대 파업땜에 생각할 시간이 생겨서 다시 이런것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중인데 그래서 님이나 댓글러처럼 이런 세 분야에서 스스로를 계속 담금질하는 사람이 주갤에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에 닿을지 모르는 글을 남깁니다. 세상이 주입한 고정관념, 편견에서 벗어나서 나 스스로를 진실로 사랑하고 믿어야 합니다. 과거 세상이 판단한 것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 불완전한 판단이 다시 어린 시절의 당신에게 주입된 과정에서 또 추가적인 연산이 일어나므로 당신의 과거에 주입된 고정관념이나 고정된 상 또한 오류가 많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동적으로 변했고, 과거의 부정확한 상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시 고정된 상으로 저장되며 무한하게 오류를 가진 상으로 자기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고 속박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과거를 용서했습니다. 과거의 나와 세상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여 내 과거를 자비로 보고 그대로 수용한 시점에서야 나를 속박하는 많은 고정관념과 편견, 상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점에 현실을 바라보면 이전보다 편견이나 고정관념, 자동적 사고가 더해진 시선이 아닌, 더 정확한 현실이 보입니다. 과거를 용서하고 긍정했으니 현실도 동일하게 용서하고 긍정할 수 있으며, 이 시점에 나는 미래를 단지 모른다고 용감하게 외칩니다. 그건 한계를 가진 나와 세상을 용서하고 긍정하는 것이죠. 말씀하셨듯 카오스 이론처럼 초기 부정확한 값은 재귀연산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오류를 만들어내며,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그게 자명하므로 미래를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지 과거를 용서하고 수용, 현재를 용서하고 수용,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나 자신과 세상이 그런 존재임을 인정하며 그런 인지수정 과정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죠. 이제 전체 집합으로 보면 대칭과 보존이 유지되는 결정론이지만,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는 개별 원소인 나로 보면 비결정론이고, 결정론-비결정론 이분법에서 벗어나 둘 다 맞는 말이고 공존 가능하다는 것을 긍정하게 됩니다. 이럼 모든 것이 정해진 완전한 질서의 세계에서 개별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긍정하게 되며, 비로소 외부나 내부에서 부정확한 근거로 내 한계를 규정하지 않게 됩니다. 존재에 이유가 없다고 해서 가치가 없지 않고, 오히려 존재에 이유가 없음이 근본적 자유를 제공합니다.
이러면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는 것에서 어느정도 벗어나며, 나와 세상이 한계가 있으며 부정확함조차 그대로 인정, 긍정하고, 나아가 내가 잘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의 구분도 벗어나 그 둘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거나 상충하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편견 없이 추구하다 보면 더 오래 집중하게 되고, 심지어 그 과정도 재밌고, 나아가 빨리 배우게 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잘하게 되고, 잘하면 돈, 명예, 권력 따위는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되며, 심지어 그런 사람에게 피상적 가치는 의미를 가지지도 않습니다. 편견이 없이 바르게 보고 즐기므로, 세상의 기술 발전과 혜택을 그대로 즐기고 누리며, 이러면 내가 추구하는 방향성에서도 엄청나게 앞서가죠. 심지어 빨리 잘하게 되고, 재밌죠.
[학문에 일조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자신감은 없고 어릴 때부터 그런 천재들과 하도 엮이면서 스스로 얻어맞고 그 한계를 계속해서 인지해서 어쩌면 내적으로 그 분야에 대해 스스로 단념해버린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모든 지적 존재는 근본적으로 자유로우며, 자유를 행하면 누구도 막지 못하고, 그 누구도 관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세상의 즐거운 것들(내가 욕망하는 것)이나 아름답다 느끼는 것을 즐기고 추구하는 과정과 학문에 일조하는 것은 독립적이지도 않고, 개별적이지도 않으며, 상충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러한 고정관념이 너무 많이! 본인 스스로를 제한하고 규정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개인이 아름답다 느끼는 것, 사랑하는 것, 욕망하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쓰는 행위는 그 자체로 삶을 충만하게 즐기는 것이며, 그 자체로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하게 되고, 잘하면 학문에 도움이 될 수도, 내가 아예 학문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복잡계 피드백 과정으로 보면 모두 동일한 효과입니다. 그건 지적이고, 효율적이고, 윤리적인 형태입니다. 이게 제가 아름답다 느끼는 인간 개인이 자신의 삶에 진실되고 충만하여 자기 스스로 조화로운 상태고, 그렇게 자신이 조화로우면 세상과 상호작용에서도 조화로우며, 그게 연속적인 되먹임으로 조화를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리학 예시나 한글로 쓴 것이나 글 구성은 전부 피상이고, 본질은 내가 아름답다 여기는 것, 조화롭다 여기는 것, 내가 진실되게 욕망하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하며 욕망하는 것이기에, 남들에게 나누면서 나 스스로 충만하고, 그걸 듣는 사람도 조화롭고 아름다움을 그린다면 개인이 진실되고 조화로운 상태에 이르러 타자와 상호작용에서도 그런 아름다움과 조화가 늘어나는 형태인거죠. 역시 이런 댓글로 피드백을 해주면서 서로 아름다운 것들, 욕망하는 것들, 사랑하는 것들이 나오며 서로가 서로의 아이디어를 차용해서 점차 더 완성되고 거대한 아름다움, 욕망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모든 발화의 시작은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그건 남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실로 내가 아름답다 여기는 것을 남도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며, 타인 역시 마찬가지인거죠.
학습된 무기력! 어린 시절에 묶여있던 코끼리는 수없이 벗어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그런 실패의 경험이 고정된 상이자 불변하는 요소로 기억에 저장된 시점에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남아 성체가 되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환경에서도 시도조차 하지 않게 만듭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에 겪은 경쟁과, 그 과정에서 상대를 천재라 판단하고 인식한 것이 정확합니까? 그들은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릅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을 타인이 재구성해서 인지하는 것이 어떻게 정확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사람마다 개화하고 발전하는 양상은 다르며, 성인이 되어 더 빠르게 발전하는 경우도 나옵니다! 우린 모르는 것을 단지 모른다고 인정하지 않은 죄값으로, 나 자신의 한계를 규정한 것입니다
남들이 정해 놓은 최적화 된 길로 통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내가 늦었다고 판단하는 것도 부정확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 판단하는, 공부와 별개라고 여기는 쓸데없는 짓이 나중에 엄청나게 어려운 공부 과정에서 도움이 될지 어떻게 확신합니까? 모르는 것인데 우린 그걸 판단한 결과, 매 순간 즐기고 노는 시기에도 공부와 연관이 없는 쓸데없는 것이라는 자동적 사고가 발생하며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중에 공부를 하는 시기에도 연결이 되지 않아 가능성이 닫히고, 반대로 공부를 하면서 즐겁지 못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이분법과 고정관념, 편견, 세상과 나 스스로 주입한 자동적 사고만 벗어나면 나와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과 본질적 자유가 이미 있다는 점이죠.
학문에 기여하는 자, 혹은 그런 성취의 명예라는 가치는 누가 만들고 규정한 것입니까? 당신 스스로입니까? 아니면 세상이 규정한 것입니까? 당신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아름답다 여기고 욕망하며 사랑했던 가치는 그런 부정확하고 피상적인 명예가 아닌, 사람들이 그런 성취를 보며 아름답다 느끼고 표현한 것, 당신이 그들의 기록을 보면서 아름답다 느끼고 표현한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당신이 욕망하는 것은 당신과 세상이 조화로운 지점이며, 나의 욕구가 세상과 조화롭고, 내가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이 세상과 조화로운 지점입니다. 명예 같은 피상적인 것을 벗어나, 당신의 삶이 매 순간 즐겁고, 충만하고, 자신의 독특한 욕구를 해소하는 방향이면서, 그 결과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조화로운 형태라면
그런 삶은 외부 평가에 좌우되지 않고 당신 스스로 충만하게 '잘 살았다'고 평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런 삶은 세상의 평가 또한 동일하게 '훌륭하다'고 나옵니다. 제가 그리는 조화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이런 감정 받으니 부끄럽네, 이미 증오적인 구조로 적응해버린 인터넷에서 내 이야기를 여기서 더 쓰는건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지금 나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아진건 다 내가 해야할 업무니까 여기에 왁왁 올리기도 그렇고 생각 정리가 되지도 않기도 했음. (이후에 쓸 글은 크게 의미있지는 않음) 인생 자체가 복잡성의 끝판왕이니까 뭐. 인생에는 이 상호작용에 노이즈가 있고 중요한건 절대 수렴되는 구조는 아니고 오히려 더 부조리한 복잡성을 증가시키니까. 인생에서 개인이 순간을 지향해야 하는지 전체를 지향해야 하는지 요사이 고민이 자꾸 된다. 당연히 전체를 지향하길 원하고, 순간을 지향한다는건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처럼 인과성을 잃어버리고 채념하듯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미시적인 존재인 인간이 감히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이 세상에서 거시적인것을 꿈꾼다는건 너무나 힘든 일이 아닌가 싶음. 그럼에도 나 자체도 나의 안에서의 복잡성 속 거시적인 결과물이니까 어쩌면 이 곳에서는 거시적인 목표를, 나 자신에 대해 한정된 목표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싶음. 어쩌면 이게 자아 실현이고, 이게 심해지니 나의 내면에 자꾸 파고들게되고 내부로 숨어들어가게 되는것 같기도 하고.... 물론 정도의 문제지 미시적인 개인과 거시적인 나를 잘 타협 시키는 어느 어딘가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인생이 그 두개의 조합인데다 그 두개가 미시적 성격과 거시적 성격을 띄어 두 방향성이 반비례한다면, 반비례하는 두 부분의 조합이 인생이라면 완전 불확정성 원리의 식이 아닌가? 내 기대를 낮추지 않는다면
[이후에 쓸 글은 크게 의미있지는 않음]은 지금 시점에서 스스로 가진 찰나의 생각과 느낌의 표현이자 고정불변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 [개인이 순간을 지향해야 하는지 전체를 지향해야 하는지]라는 이분법 또한 완전하지 않지만 지금 가진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 해서 생각하고 느끼고 표현한 것이기에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그 자체로 충만하고 완전한 것! 난 이 모든 것을 아름답다 느끼고 조화를 향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어떤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도 됩니다! 우린 단지 지금 당장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그대로 둘 수 있습니다! [개인이 순간을 지향해야 하는지 전체를 지향해야 하는지]라는 이분법 구조에서 빠진 부분이 그거죠
[개인이 순간을 지향해야 하는지 전체를 지향해야 하는지]라는 이분법 구조에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반드시 어떤 행동으로 시행해야 하는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뭐가 더 나은 선택인지 모르는 시점에서는 단지 모른다고 인정하고 기다리는 선택도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우니까!
그래서 어떤 주입된 편견과 고정관념처럼, 우린 당장 선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강요된 선택이니까요! 단지 모른다, 그러니 더 알아본다거나, 머리 아프니까 일단은 기다린다거나 하는 것도 가능하죠!
나는 둘중 어느것도 내 기대치만큼 성취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하나의 기대치를 위해 둘중 하나를 엄청나게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음. 나는 욕심은 많아서 기대치가 높고 이게 큰 인생의 수업 없이는 내려가지질 않아서.... 별로 뜻도 없는곳에 진학을 하고 계속 물량 공부하고 나 스스로의 순간의 선택으로 이후의 내 전체의 방향성을 영향을 주고 그게 다시 계속된 나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 하다가 요사이 강제로 "너 쉬어" 이러니까 생각이 너무나도 많아진다. 기대치는 점차 스스로 줄어들 것 같고 어쩌면 이후에 계속 책을 읽고 자기공부를 하고 하는게 나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음 그냥 별 의미 없고 나에 대한 질문을 받아서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하는거라 남들 향해 쓴 댓글은 아닐 수 있음
의미없는거에 의미를 자꾸 새우고 자꾸 분류하고 그런것에 비해 인생이 훨씬 넓기도 하고 그냥 자꾸 이런걸 자극하게 해주니까 좋다요
어느것을 선택하든, 그게 미래에 돌이켜 판단하기에 별로 효율적이지 않았더라도! 지금 시점에서 최선을 다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 충실히 한 것이므로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름답습니다! 그게 과거를 용서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과거의 고통으로 지금의 내가 온전히 승화시켜 더 나아지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같은 삶을 살더라도 그 자체로 완벽하며! 어느 시점에 생각치도 못한 변화나 아이디어로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과 긍정을 남겨두는 것입니다!
보존과 대칭! 어린 시절부터 쉬지 않고 많은 것을 배우는 일, 그런 괴로움의 이면에는 그만큼 풍부하고 다양한 지식을 얻음과 동시에 내가 잃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에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 그 과거의 교훈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 과거를 후회나 효율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최선이며 불완전한 인간이 했던 가장 아름다운 완전함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효율적이었고, 어떻게 해서 실패했다는 피상적인 판단이 아니라, 그 환경을 걸어온 과거의 나를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여기며 아름답게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제가 보기에 그건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인간의 삶이거든요!
많은 욕심을 가졌다 여기면서 욕심 자체에 집중하면 안됩니다! 그 욕심 이면에 있는, 욕심을 가지게 만든 어떠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건 내가 더 나아지는 모습, 내가 추구하는 이상향에 도달하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이자 욕구,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스스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자체로 완벽하며 아름답습니다! 다만 스스로 그걸 모르고 있을 뿐!
암튼 고마움 밤늦게까지 댓글 단것 둘째치고 그냥 이 자체가 재밌어서 좋다
제가 느끼기에, 스스로 영혼이 지향하는 방향에 가까워지기에 마음이 좋고, 아름답고, 재밌다고 느끼는 것이에요. 때론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아무리 머리로 안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세상을 용서하고 둘 다 긍정하지 못하거든요.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외부의 사랑인거죠.
인류 역사 내내 반복된 최고의 성자, 최고의 가르침, 최고의 종교들이 하나같이 용서, 자비, 신뢰, 사랑, 선함, 빛이란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러한 가치 뿐만 아니라 행위로 실천을 강조했죠! 나와 타인을 나누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왜 남겼을까 의문을 가진다면 그게 보이는거죠! 정말 개별적인 문화, 개인 특성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다르게 이해되지만, 저런 자비와 사랑, 신뢰를 조건 없이 나누는 것 만은 아무리 역사가 흐르고 인간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더라도 여전히 공통적으로 작용하여 개인이 원래 자신이 되는 삶, 세상과 조화가 되는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실제로 아무 종교도 믿지 않고요, 세상 기준으로 보면 종교인이 아니에요. 오히려 최근까지 과학만능주의자였고, 그게 어느 지점에 이르니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불가지론에 도달했고요, 이후에 철학, 예술, 역사, 과학, 종교까지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 보다가 지금과 같은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 결론도 지금 순간 최선이라 느끼는 것일 뿐이고, 계속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수정되는거죠
우리는 수식과 과학, 엄청난 복잡성을 지닌 연구의 결과로 나타난 기술이나 의료기기, 신약 등에 대해서 그 피상만 보고 진짜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기저에는 타인도 나와 같은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비록 자기중심성이란 인간의 한계가 있지만 그 자체로 완전하게 '타인은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순수한 형태의 이타성, 자비, 사랑, 신뢰와 같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바꾼 것은 학문도 명예도 돈도 권력도 아니고, 그런 것은 단지 피상적인 요소이자 판단주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조화롭게 바꾸는 진짜 본질은 이타성과 자비, 사랑, 신뢰인거고, 그건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게 되는 지점인거죠
워렌 버핏이 기부한 돈의 양으로 판단하면 그건 피상이자 사람들마다 다르게 해석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부자니까 그런 것이라며 무시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있으면서 겨우 저걸 내느냐고 오히려 뭐라 하겠죠! 하지만 그는 세상을 조화롭게 바꾸는데 기여했으며, 그건 어떤 팩터로 정량화하지 못하는 순수한 이타성과 자비, 사랑, 신뢰의 형태입니다. 그래서 제가 비교도 할 수 없는 작은 양의 돈을 기부하더라도, 그건 동일한 것이고 동일하게 해석됩니다.
좀 무미건조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다음글을 기대함. 이원론을 넘어선 변증법과 다원적 해석,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스펙트럼적인 무언가는 내가 계속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고 이타심과 사랑으로 접근하는 해석과 종교적인 가르침은 나에겐 거리낌이 있고 잘 모르는 분야라서...... 이타성과 이기심의 공존을 인정하지만 이기심 신봉자라... 인과 관계에서 이기심에 대한 우위를 지켜주는게 더 편해서..... 비교종교적, 인문학적 공부를 한 다음 글을 쓸 볼 때의 그 순간의 나와 그때의 글을 기대하며 이만 자겠음...... 일어나서 좀 더 고민할 것 같네.
그 고민의 순간이 조급하지도 두렵지도 괴롭지도 않고, 결국 괴로움을 해소하려는 스스로의 방향성이자 아름다움이길 바람
남아있었으면 좋겠음
걍 개소린데. 국지적 엔트로피 역전이 엔트로피 증가가 된다는 건 무슨 개 소리냐. 물질의 기본적 특성이 확산이라는 건 뭐. 앤트로피 증가로 인한 열정 평형을 의미하는 거라면 결이 맞다만. 국지적 엔트로피 역전이라는 건 엔트로피 감소를 의미하겠지. 하지만 그것도 반응 system과 외부를 고려한 전체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아님
문재인 사형 ㄱ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