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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 강남 개발 붐이 한창이던 시절. 압구정 인근 신축 아파트 같은 층 옆집으로 같은 날 이사 온 두 사람이 있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이준호와 백화점 바이어 최명희. 둘 다 배우자가 있고, 둘 다 번듯한 직업에 반듯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두 사람의 배우자들이 늘 집을 비운다는 것이다. 출장, 회식, 야근. 강남의 새 아파트는 넓고 조용하지만, 그래서 더 쓸쓸하다. 이준호와 명희는 엘리베이터에서, 복도에서, 주차장 입구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친다. 처음엔 가벼운 목례, 그 다음엔 짧은 인사,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귀가 시간을 알게 된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사실을 확인한다. 서로의 배우자가 서로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배신감도 분노도 있지만, 정작 두 사람 사이엔 이상한 고요함이 흐른다. 같은 처지라는 것, 같은 것을 모른 척해왔다는 것. 그 공통점이 두 사람을 엉뚱하게도 가깝게 만든다.

둘은 만나기 시작한다. 배우자들이 어떻게 만났는지를 '연습'한다는 구실로. 명희가 배우자 역할을 하고, 이준호가 상대방 역할을 한다. 혹은 반대로. 그렇게 역할극을 반복하는 사이, 경계는 조금씩 흐릿해진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선을 넘지 않는다.

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무언가가 끝날 것 같아서.
강남의 네온사인이 밝아질수록 두 사람의 시간은 더 조용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