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가락국기 허황옥과 수로 사망 부분
//사료 A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과 왕후가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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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靈帝)註 001 중평(中平)註 002 6년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죽으니註 003 나이는 157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고 구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였다. 드디어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처음 와서 닻줄을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잉신 천부경(泉府卿)註 004 신보(申輔)와 종정감(宗正監)註 005 조광(趙匡) 등은 나라에 온 지 30년 후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부부는 1, 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밖의 노비들도 이 나라에 온 지 7, 8년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품고 고향을 생각하다가 모두 죽어서 거처하던 빈관(賓館)은 텅 비고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이에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내고 헌제(獻帝)註 006 입안(立安)註 007 4년 기묘 3월 23일(199년)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 왕후가 죽은 날보다 더하였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이고 둘레가 300보였고, 거기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 구충왕(仇衝王)註 008까지 이 묘(廟)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을 기다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霊帝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后崩, 壽一百五十七. 國人如嘆坤崩, 葬於龜㫖東北䲧. 遂欲忘子愛下民之惠, 因號初來下纜渡頭村曰主浦村, 解緩袴髙岡曰綾峴, 茜旗行入海涯曰旗出邊. 媵臣泉府卿申輔·宗正監趙匡等到國三十年後各産二女焉, 夫與婦踰一二年而皆抛信也. 其餘臧獲之軰自來七八年間未有兹子生, 唯抱懷土之悲皆首丘而没, 所舎賔舘圎其無人. 元君乃每歌鰥枕悲嘆良多, 隔二五歳以献帝立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而殂落, 壽一百五十八歳矣. 國中之人若亡天只悲慟甚於后崩之日. 遂於闕之艮方平地造立殯宫, 髙一丈周三百歩, 而葬之號首陵王廟也. 自嗣子居登王洎九代孫仇衝之享是廟, 湏以每歳孟春三之日·七之日·仲夏重五之日·仲秋初五之日·十五之日, 豊潔之奠相継不絶.)
註) 001
후한(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68년~189년이다.바로가기
註) 002
후한 영제의 연호로 184년~188년에 사용하였다.바로가기
註) 003
죽음에 대한 표현은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각기 차등이 있어서 崩·薨·卒·亡·死로 표현한다.바로가기
註) 004
중국 고대의 관직명. 천부(泉府)는 주나라 시대에 시세를 받는 일과 공비로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물품을 사들여 다시 그것을 원가로 파는 일을 맡아 물가를 조절하던 관아였다.바로가기
註) 005
종정(宗正)은 주나라의 관제의 소종백(小宗伯)으로서, 진나라 때에 종정이라고 하였고, 후한대 이후에는 종정경이라고 하였다. 황족의 일을 담당하고 모두 황족으로 그 직에 임명하였다고 한다.바로가기
註) 006
후한의 제14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190년~220년이다.바로가기
註) 007
고려 태조의 이름인 建을 피휘한 것이다.바로가기
註) 008
가락국기 뒷부분에는 '구형왕(仇衡王)'으로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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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옥은 157세를 살고
'수로'는 158세를 살았다
허황옥은 한나라가 서남이를 식민지배하는 군현에서
낙랑군으로 수출된 인도,동남아 출신 여자 노예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런 노예가 각종 진기한 구슬들과 함께
변진의 구야한국 김해 양동리 집단의 수장 진한 우거수 '염사치'에게 수출되었을지도 모른다
염사치가 1대 수로일지도 모른다
염사치는 염사읍의 치 즉 지배자 즉 신지인데
'우거수'라고도 불렸다 굳이 '우거'를 쓰는걸 보면
위만조선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염사치의 신격화된 칭호가 '수로'일지도 모르고
그가 대대로 통치자 직위를 세습시키며
변한 구야국의 통치자는 '수로'라고 불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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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B
//삼국유사 卷 第二 紀異第二 駕洛國記 수로왕이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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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이에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본래 모르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서로 따라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그렇다고 여겨 유사(有司)를 이끌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의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는 비단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山神靈)에게 바쳤다. 그 밖에 시종한 잉신(媵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申輔)·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慕貞)·모량(慕良)이라고 했으며,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된 장신구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은 나아가 그를 맞아서 함께 유궁(帷宮)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에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인도하게 하고 말하였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옷과 비단과 보화도 주었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註 496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황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 황천은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재갈을 나란히 수레를 함께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되려 하였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어가게 하였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屬建㱏校勘 193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干等朝謁之次献言曰, “大王降靈已來好仇未得, 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選入宫闈俾爲伉儷.” 王曰 “朕降于兹天命也, 配朕而作后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押軽舟持駿馬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就乗岾望山島京南島嶼也, 乗岾輦下國校勘 194也.. 忽自海之西南隅掛緋㠶張茜旗而指乎北. 留天等先舉火於島上, 則競渡下陸爭奔而來. 神鬼望之走入闕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整蘭橈揚桂楫而迎之. 旋欲陪入内, 王后乃曰 “我與等素昩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等返逹后之語, 王然之率有司動蹕, 從闕下西南六十歩許地山邊設幔殿祗候. 王后於山外别浦津頭維舟. 登陸憇於髙嶠, 解所著綾袴為贄遺于山霊也. 其地侍從媵臣二貟名曰申輔·趙匡, 其妻二人號慕貞·慕良, 或臧獲并計二十餘口. 所賷錦繡綾羅·衣裳疋段·金銀珠玉·瓊玖服玩噐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同入帷宫. 媵臣已下衆人就階下而見之即退. 上命有司引媵臣夫妻曰. “人各以一房安置, 已下臧獲各一房五·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醑, 寢之以文茵彩薦, 至於衣服疋段寳貨之類, 多以軍夫遴集而護之. 於是王與后共在御國寢, 從容語王曰. “妾是阿踰陁國公主也, 姓許名黄玉, 年二八矣. 在夲國時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 ‘爺孃一昨夢中同見皇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天所降而俾御大寳, 乃神乃聖惟其人乎. 且以新花家邦未定匹偶, 卿等湏遣公主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其猶在耳, 你於此而忽辝親向彼乎徃矣.’ 妾也浮海遐尋於蒸棗, 移天夐赴於蟠桃, 螓首敢叨龍顔是近.” 王荅曰 “朕生而頗聖, 先知公主自逺而届, 下臣有納妃之請不敢從焉. 今也淑質自臻眇躬多幸.” 遂以合歡兩過清宵一經白晝. 於是遂還來船, 篙工楫師共十有五人, 各賜粮粳米十碩布三十疋令歸本國. 八月一日迴鑾與后同輦, 媵臣夫妻齊鏕並駕, 其漢肆雜物感使乗載徐徐入闕, 時銅壺欲午. 王后爰處中宫, 勑賜媵臣夫妻私屬空閑二室分入, 餘外從者以賔舘一坐二十餘間, 酌定人數區別安置. 日給豐羡, 其所載珎物藏於內庫, 以為王后四時之費.
校勘) 193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한 글자이다.바로가기
校勘) 194
조병순소장본에는 岡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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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왕 '거등'은 부여 왕 위 구태, 백제 왕 '고이'와 발음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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