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으려거든 전편은 필히 읽기를 권유한다.
"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한 사람도 없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수상이자 A급 전범 도조 히데키가 교수형전에 한 말.)
8. 기사회생
+일본은 패망했다. 제국은 불과 80년도 못되 붕괴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망국의 군주가 될 운명은 아니었다.
항복 후의 일본은 미군이 깜짝 놀랄 정도로 고분고분 했고, 그 이후엔 더 고분고분해지게 된다.
히로히토는 아들 아키히토에게 패전의 원인을 이런식으로 설명했다.
"우리 군인들은 정신력은 뛰어났지만 과학력에서 적들보다 미치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일본의 정세에 밝았던 그는 히로히토를 처벌의 대상이 아닌
전후 일본 통치의 효율을 위해 최대한 이용해야할 협력자로 보았다.
그가 바라던 것은 GHQ(연합군 최고 사령부)를 미국이 일본을 통치하는
'20세기의 막부'로 세우는 것이고, 자신이 '쇼군'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엔 중요한 전제가 따랐다.
히로히토가 스스로 GHQ에 찾아와 찍은 유명한 사진.
헐렁한 차림의 맥아더 옆에 나란히 선 개찐따 같은 히로히토에게서는
도무지 아미테라스 여신(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신화적인 기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사진은 일본이 처한 상황을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보여주어
일본인들에게 미약하게나마 남아있었던 저항의식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그리고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는 그 유명한 '인간 선언'을 하는데..
짐과 너희 국민 사이의 유대는 시종 상호 신뢰와 경애로 묶여지는 것이지
단순히 신화와 전설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덴노를 현어신으로 하고, 또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 보다 우월한 민족이라 하며,
나아가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진다는 가공의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선언은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 '현신'이라는걸 부정한 것이지
'신의 후예'임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흔히 알려진 "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일본에서는 신격 부분은 언급도 되지 않았고, 그냥 평화를 기원하는 선언 정도로만 보도 되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전쟁의 한 원인인 일본왕가의 신격 숭배를 스스로 부정하고 굴복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제 살았어!!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주요전범들과는 달리 히로히토는
처벌도 당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전범으로 분류되어 재판조차 받지 않았으며, 자리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쯤되면 아주 영악한 정치인으로 보일 지경이다.
이런 인간을 우리는 용서할 수 있을까?
9. 여전히 충성스러운 신민들
새로운 헌법 아래 탄생한 '민주 국가(!)' 일본의 입헌 군주로서
히로히토는 새로운 이미지 메이킹을 해야했다.
법위에 군림하던 무서운 천황 폐하가 아닌 자상한 가장의 이미지로..
이 때부터 그는 군복을 벗고 양복을 입고 전국 순회에 나선다.
패망한 나라의 억압의 상징..
수백만의 목숨이 만세를 부르다 죽은 그 이름..
함부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자신이 이제와서 뻔뻔하게 국민들과 마주하려고 한다.
위험하지 않을까..?
죽이려고 들면 어떡하지..?
여전히 충성스러운 신민들 ㅋㅋㅋ
이것이 정녕 일본의 종특이란 말이더냐?
전국 순회의 파급 효과는 컸다.
히로히토는 어딜가나 환영 받았고..
전범은 커녕 전쟁때는 불쌍한 꼭두각시이자 평화주의자였다가
이제는 국민들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고, 앞으로는 새로운 일본 건설의 정신적 근원이 될..
말하자면 우리나라 어르신들이 생각하는 원조가카의 긍정적 이미지와 비슷한 모양새가 된다.
(물론 정치력을 행사할 수 없는 히로히토가 직접 일본 재건을 지휘한건 아니고.. 그냥 이미지만..)
10. 변화하는 일본, 변화하는 왕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미군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된다.
한국전쟁을 발판으로한 눈부신 경제성장은 태평양 전쟁 이전보다 훨씬 뛰어난 놀라운 번영을 가져온다.
그리고 히로히토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개막을 선포하는 히로히토.
1959년 황태자 아키히토는 일본 왕실 최초로 평민 출신인 '미치코'라는 여자와 결혼한다.
사실 말이 평민이지 미치코는 재벌가의 딸이었지만
어쨌거나 이 현대판 신데레라같은 러브 스토리에 일본 대중들은 열광했다.
아키히토와 미치코의 결혼식 중계로 일본에서는 TV의 판매량이 2배 이상 증가했다.
기존 왕실의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점차 연예인처럼 친근한 대중적 존재로 탈바꿈 한것이다.
한편 히로히토의 거의 유일한 취미는 어릴적부터 열광했던 생물학 연구였다.
아예 개인 연구실까지 차렸던 그는 할일도 없으니 해양 생물학 연구에 더욱 심취했다.
나름의 연구 성과도 있었는지 <나스의 식물들>을 비롯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11. 충신과 역적
히로히토와 천황이라는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
이를 둘러싼 일본 사회의 다양한 사건, 인물들도 존재한다.
자위대여 궐기하라! - 미시마 유키오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천재 작가이자 극우주의자인 미시마 유키오는
"고대의 신적인 천황을 다시 현실에서 부활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방패단'이라는 극우 청년단을 조직하고
1970년 자위대 총장실을 점거, "자위대여 궐기하라!"는 연설을 하다가..
그대로 할복자살했다. 이 모든 것은 예정된 시나리오였다.
다만 그가 예상못한것은 할복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우며..
옆에서 목을 베어주는 이의 서툰 칼솜씨로 굉장히 처참하게 죽어야 했다는 것이다.
나는 황군이다! - 오노다 히로
오노다 히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패전 소식을 인정하지 않고,
필리핀 섬에서 30여년간 홀로 밀림생활을 하며 투항하지 않았던 일본군이다.
1974년이 되서야 모습을 드러내고 일본으로 귀국하여
"가장 마지막으로 항복한 일본군"이 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복식과 장비를 그대로 간직한 놀라운 모습은 일본 사회에 향수를 자극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히로히토가 있는 궁성을 향해 참배 했고,
영웅 대접을 받으며 한동안 스타가 되었으나..
현대화된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브라질로 건너가 목장을 경영.
2014년 1월 16일 사망했다.
히로히토를 응징하겠다! - 오쿠자키 겐조
1969년 히로히토에게 새총으로 파칭코 탄환을 날린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오쿠자키 겐조라는 사내.
방탄유리 때문에 미수로 그쳤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1년 9개월을 복역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 참전 시절..
전장에서 소속 부대가 모두 굶어죽고 시체까지 뜯어먹는 참혹한 광경을 보며
이 모든 책임이 최종적으로 히로히토에게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후에도 계속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활동을 했고,
12년을 더 복역했다.
"도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불린 그는 죽을 때까지 히로히토를 저주했으나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오쿠자키 겐조는 2005년 2월 16일 사망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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