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문학을 배우지 않아 말주변이 없다."
(전쟁 책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히로히토
1901 ~ 1989
재위 1926 ~ 1989
찌질하고 기묘한 인간에 대해 전반적으로 파헤쳐보자
1. 행복하지는 않았던 어린 시절
히로히토는 메이지 시대인 1901년 메이지 일왕의 손자이자 요시히토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름 커엽게 생겼노?
일단 왕자로 태어났으니 유복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최신 장난감을 타고 공주 코스프레도 하며 놀 수는 있었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진 못했다.
그의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는 병신이였다.
어릴 때 뇌막염을 앓아 정신이 오락가락 했던 장애인이였음.
게다가 하는짓도 문란해서 어린 히로히토에게 술을 먹이고 후궁들을 시켜 성을 가르쳤다
이런 성장 배경 때문인지 히로히토는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다르게 평생 후궁도 두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히로히토의 어릴적 스승은 러일전쟁의 영웅인 노기 장군이었다.
근데 말이 영웅이지 실상은 수많은 일본군을 반자이 돌격시켜 학살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책임을 통감하고 자살하려다가 메이지 일왕이 허락하지 않아 대기하고 있다가
1912년 메이지가 죽자 바로 할복했다.
노기 장군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11살의 히로히토는 그의 자살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큰 인물을 잃었다.."
히로히토는 20살이 되자 일본 왕실 최초로 유럽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당시 일본과 동맹관계였던 영국에서는 히로히토를 아주 극진하게 환영했다.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히로히토를 옆에 두고 "내 아들이야..ㅎㅎ"라고 말했다.
히로히토는 이 여행이 자기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회고 했다.
2. 장애인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을 시작하다.
메이지에 이어 장애인 요시히토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다이쇼 일왕이다.
그의 병신력은 날로 더해가 군대 사열식때 멀쩡한 병사에게 채찍질을 하거나..
군장이 무거워 보인다고 대신 들어주기도 하는등 기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도저히 입헌군주로서의 기능도 수행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자..
어린 히로히토가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을 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시스템상 일본 왕실은 수동적일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나
그는 황태자 시절 적어도 두번은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하나는 일본 왕실 최초로 안경을 쓴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택한 나가코와 결혼한 것이다.
1923년 관동 대지진 피해 지역을 시찰하는 히로히토.
섭정 시절 히로히토는 아버지같은 장애인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는 성공했다.
3. 즉위와 암살 미수
재위 14년 내내 장애인 왕 다이쇼는 수명마저도 평균을 못채우고 47세로 사망하고
1926년 마침내 히로히토가 25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연호는 평화와 번영을 의미하는 '쇼와 (昭和)' 정해졌는데 당분간 벌어질 역사는 전혀 평화롭거나 영광스럽지 못하게 된다.
1932년에는 히로히토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도중 한 청년이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바로 한인애국단 이봉창 의사였다.
역사가 바뀔뻔한 순간이었으나 불행히도 이봉창은 여러대의 마차중 히로히토가 탄 마차가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그가 던진 폭탄은 히로히토가 타지 않은 마차의 말과 근위병에게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일본 경찰은 이봉창이 던진줄 모르고 이봉창 앞에 있던 일본인을 두둘겨 패버렸다
이에 이봉창은 죄책감을 느껴 자수. 32세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 충성인가? 반역인가? 2.26 쿠데타
히로히토는 일반적으로 군부 세력에 끌려만 다닌 왕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등장한다.
1936년 2월 26일 일본군의 극우파 파벌인 황도파 장교들이 "간신배 척살, 천황 중심 정치!!!"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키고 원로 대신들을 살해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2.26사건.
이들은 천황 친정 실현을 명분으로 외쳤던만큼 히로히토의 호응을 기대했으나
히로히토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짐이 사랑하는 신하들을 죽이다니.. 이는 짐의 목을 조르는 행위이며.."
반란의 근거를 잃어버린 쿠데타 세력은 당황하여 일부는 자살, 일부는 투항, 부사관과 병들은 원대로 복귀했다.
히로히토는 다 성공한 쿠데타를 말 한마디로 진압하는 위엄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전후로 일본은 급속도로 군국주의화 되기 시작한다.
5.만들어진 전통, 만들어진 신
좀 더 앞선 시절의 얘기를 해야겠다.
++국내에 알려진 일본왕은 메이지나 히로히토,아키히토,
잘 해야 다이쇼 데모크라시(1920년대 일본의 민주화 운동)로 알려진 다이쇼 정도다.
근데 이건 일본인들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천황, 즉 덴노란 고대를 제외하면 실권을 행사한적이 없는 '유명무실'한 존재 정도가 아니라
메이지 유신전까지는 일반 백성들에겐 존재 자체도 생소했기 때문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명목상 왕정 복고가 실현되자
천황은 일본 제국의 군주이자 살아있는 신으로 등장했다.
메이지 초기 천황이 살아있는 신이라는 말에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진짜 신이라고? 가서 소원 빌자."
"그냥 빌면 효험이 있겠냐? 제물도 바쳐야지.."
"천황 폐하 만지면 나 병 나을 수 있음?"
천황이 행차하면 백성들이 돈을 던지거나 춤과 노래를 부르는 풍경이 벌어졌다.
이것은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민간 신토의 전통이었다.
이런걸 원한게 아니었던 메이지 정부는 당혹했다.
"천황 폐하는 느그덜이 섬기는 그런 잡신이 아니라 신성 불가침의 절대 군주란 말이다."
하여 위와 같은 행위들을 금지시켰다.
민간 신앙의 전통은 단절되었고, 새로운 전통이 '발명'되었다.
서양의 근대 군주를 모방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군복을 입히고
초상화를 그려 신성하게 취급했다.
정부는 교육을 통해 사회 곳곳에 이런 이미지를 주입했으나
애초에 이런 개념 자체가 없었던 일본인들이 세뇌만 한다고 천황의 신성함을 믿어 의심치 않을리는 없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억압과 폭력이었다.
미소짓는 히로히토.
당시 이 사진은 너무 인간적으로 나왔다고 언론에 공개가 금지되었다.
이러한 배경이 절정에 달한 히로히토 시대 일본은 숙명적으로 극단적 파시즘으로 치닫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
갓본
저 개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