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원숭환(袁崇煥, 1584년 6월 6일 ~ 1630년 9월 22일)은 자(字)는 원소(元素)이고, 호(號)는 자여(自如)다(일설에는 자(字)라고도 함)
광동성(廣東省) 동관(東莞) 사람이다(별도로 광서성(廣西省) 등현(藤縣), 평남(平南) 두 가지 설이 있으며, '인물 논쟁-본적 논쟁' 목차가 있다)
그는 명나라 말기의 대신이자 명장이다
원숭환은 상인 가문 출신으로, 독서와 과거 응시를 하는 동시에 군사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 만력 47년(1619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복건성(福建省) 소무(邵武) 현령(知縣)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천계 2년(1622년)에 대계(大計, 관리 근무평가)를 위해 북경에 갔을 때
산해관(山海關) 밖으로 나가 후금(後金)을 막고 요동(遼東)을 수복하는 전선에 자원했다. 그는 산해 감군(監軍)에서 시작하여 녕전
병비도(寧前兵備道)까지 승진했다. 재직 중에는 도사(督師) 손승종(孫承宗)을 보좌하여 관녕금(關寧錦)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천계
6년(1626년)에 영원(寧遠)에서 후금의 칸(汗) 누르하치(努爾哈赤)의 공격을 저지하여 녕원대첩(寧遠大捷)을 거두었고, 그 공으로 요동
순무(遼東巡撫)로 승진했다. 천계 7년(1627년)에는 영금대첩(寧錦大捷)을 거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후금과의 화의(和議)를 시도한
행위 등으로 비판을 받고 사직했다. 이듬해 숭정제(崇禎帝)에게 기용되어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로서 계료(薊遼),
등래(登萊), 천진(天津) 등의 군무를 총독했다. 복직 후 원숭환은 "5년 안에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맹세하고, "지키기를 정공법으로, 싸우는
것을 기습으로, 화의를 부수적인 방법으로 삼는다"라는 원칙과 "요동 사람으로 요동 땅을 지키고, 요동 땅으로 요동 사람을 먹여 살린다",
"서쪽 오랑캐(몽골)를 달래 동쪽 오랑캐(후금)를 견제한다"는 전략을 주장했다. 또한 동강 총병(東江總兵) 모문룡(毛文龍)을 처형했다. 숭정
2년(1629년) 겨울, 후금의 칸 홍타이지(皇太極)가 대규모로 명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여 원숭환이 지키던 기주(薊州)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북경성 아래까지 곧바로 진격했다. 이것이 기사지변(己巳之變)이다. 원숭환은 북경의 광거문(廣渠門)과 좌안문(左安門)에서 후금군을
물리쳤으나 이후 숭정제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숭정 3년(1630년) 8월, 숭정제는 원숭환에게 모반 대역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참(凌遲處死)
했다. 이후 청나라에서 편찬한 《명사(明史)》에서 그가 홍타이지가 설치한 반간계(反間計)에 의해 죽었다고 인정하면서부터 원숭환은 비로소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자세한 내용은 '인물 논쟁-체포 및 처형 원인' 목차에 있다)
남아있는 원숭환의 시문(詩文)은 많지 않아 오늘날 사람들이 모아서 《원숭환집(袁崇煥集)》으로 편찬하였다
1. 전기
1. 1. 초기 생애
만력 12년 4월 28일 (1584년 6월 6일), 원숭환은 광주부(廣州府) 동관현(東莞縣, 현 광동성 동관시)에서 태어났다. 원숭환의 선조는 산서성(山西省)
력산(歷山) 출신으로, 복건성(福建省) 녕화(寧化), 강서성(江西省) 우도(雩都), 신풍(信豐) 및 광주 남해(南海)를 거쳐 동관(東莞)의 채원(茶園),
온당(溫塘) 등을 전전하며 이주하다가, 원숭환의 조부 원세상(袁世祥) 때 비로소 동관 수남 원옥돈(水南袁屋墩, 현 광동성 동관시 석제진 수남촌)에
정착했다. 원씨 집안은 대대로 농업에 종사했으나 원숭환의 아버지 원자붕(袁子鵬)은 광서성(廣西省) 평남(平南) 백마위(白馬圩)로 가서 가게를
열고 목재 무역을 했으며, 원숭환도 그곳에서 성장했다. 원숭환은 어려서부터 군사를 선호하여 '오래전부터 병략을 연마하고, 무예에 정통했으며,
기마와 활쏘기에 능했다(夙攻兵略,精武藝,善騎射).' 또한 여행을 선호하여 '평생 산수(山水)에 대한 취미가 있었다(生平有山水之癖)'고 자부했으며
관직에 나가기 전 '발자취가 천하에 두루 미쳤다(足跡幾遍宇內).' 그는 어려서부터 과거 응시를 목표로 삼았으며 편의를 위해 평난(平南)에
기적(寄籍)했으나 고발당하자 인근의 등현(藤縣)으로 본적을 바꾸었다(그의 본적 논쟁에 관해서는 '인물 논쟁-본적 논쟁'을 참고). 만력 25년(1597년)에
동자시(童子試)에 합격하여 등현의 현 학생원(縣學生員)이 되었다. 만력 34년(1606년), 원숭환은 광서성의 성도인 귀림(桂林)에 가서 향시(鄕試)에
참가해 거인(舉人)에 합격했다. 그 후 그는 회시(會試)에 네 번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만력 47년(161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합격했고 이어진
전시(殿試)에서 삼갑(三甲) 제 40위(총 순위 제 110위)로 동진사(同進士) 출신 자격을 받고 공부(工部)에서 관정(觀政)했다. 만력 48년(1620년)에
원숭환은 복건성(福建省) 소무(邵武)의 현령(知縣)에 임명되었다. 그는 재임 중에 '명쾌하게 판단하고 담력과 지략이 있었으며, 마음을 다해 백성을
사랑하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으며, 소송을 잘 다루어 아무리 작은 것도 놓치지 않았다(明決有膽略,悉心愛民,申冤理枉,
善於聽訟,無微不燭).' '또한 한 민가에 불이 났을 때는 원숭환이 직접 신발(靴子)을 신은 채 지붕 위를 평지처럼 달리며 불을 껐고 사후 재난 구호
업무도 '질서정연하게 잘 처리했다(井井有方).'
1. 2. 관녕으로의 출진
천계(天啓) 원년 12월 25일 (1622년 2월 5일), 원숭환은 복건(福建)의 다른 지현(知縣)들과 함께 대계(大計)(명나라에서 6년마다 지방관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던 제도)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로 올라갔다. 당시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세운 후금(後金) 정권이 동북 지역에서 흥기하여 명나라의 요심(遼瀋)
지역을 함락하자 원숭환은 본래 시국을 근심하며 "변방을 지킬 만한 재주가 스스로에게 있다"고 자부했다. 대계 결과가 발표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홀로 말을 타고 산해관(山海關)으로 가서 최전선의 상황을 약 20일간 시찰하고 돌아왔다. 동료들은 그가 홀로 국경에 달려간 일화를 선전했고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가 베이징 관가에 퍼지게 되었다. 천계 2년(1622년) 정월에 이부(吏部)가 도찰원(都察院)과 함께 대계 결과를
발표했을 때 원숭환은 "상고(上考)"의 평가를 받았다. 관례에 따르면, 원숭환은 당시 사람들이 "좋은 자리(美差)"라고 여겼던 언관(言官, 간관이나
어사)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곧 요서(遼西)의 중요 거점인 광녕(廣寧, 지금의 료녕성 북진시)이 후금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이 크게 놀랐다. 원숭환과 함께 대계에 참여했던 관리들은 서둘러 수도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조정 대신들 역시 경쟁적으로 공용
우편물 운송 체계를 이용하여 가족들을 북경 밖으로 피난시켰다. 명 조정은 후금의 매서운 공세에 맞서기 위해 변방을 지킬 인재(邊才)를 급히
구했다. 원숭환은 어사(御史)인 후순(侯恂)과 강일채(江日彩)의 주목을 받아 병부(兵部)에 그를 불러 시험해 볼 것을 청했습니다. 병부 관리들이
원숭환을 불러 시험하며 "산해관에서 어느 곳이 험하고 어디에 주둔해야 하며 어디에 병마를 숨겨야 하고 어디에 포대(銃台)를 세워야 하는가"를
물었다. 원숭환은 막힘없이 대답하고는 "저에게 군마(軍馬)와 군량(錢谷)을 주신다면, 저 혼자서도 이곳을 충분히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큰소리쳤다
결국 그는 병부의 시험을 통과하여 2월 16일에 병부 직방사(職方司) 주사(主事)에 임명되었다. 2월 23일, 병과(兵科) 도급사중(都給事中)
채사충(蔡思充)이 상소하여 원숭환이 "재략(才略)이 뛰어나다"고 칭찬하며 그를 전임 요동 병비도(遼東兵備道) 염명태(閻鳴泰)를 보좌하게 하여
"유관(楡關, 산해관)의 방어를 분담"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명 조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2월 28일에 원숭환을 산동 안찰사(山東按察司)
첨사(僉事)와 산해감군(山海監軍)으로 승진시켰다. 부임하기 전에 원숭환은 특별히 당시 죄를 받아 조사를 기다리던 전 요동 경략(經略)
웅정필(熊廷弼)을 찾아가 밤새도록 요동의 사정에 대해 자문했다. 동시에 그는 조정에 용맹하고 전투에 능한 량광(兩廣) 보병 10000명과
광서(廣西) 랑병(狼兵) 5,000명을 모집하여 정예 부대를 편성할 것을 건의했다. 이 부대는 각각 그의 족숙(族叔)인 평락부(平樂府) 추관(推官)
원옥패(袁玉佩)와 친척인 영평부(永平府) 추관 임상봉(林翔鳳)이 이끌게 하고, 명나라군이 조선과 파주(播州, 지금의 귀주성 준의시)에서 승리한
역사를 재현할 것이며,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하면 "신을 군문 앞에서 참수하여 일을 경솔하게 처리한 자들의 경계로 삼으십시오"라고 선언했다
명 조정은 그의 모병 요청을 승인하고 호부(戶部)의 은 2천 량과 국고의 은(帑銀) 20만 량을 원숭환 등의 모병 경비로 지급했다. 그러나 이후 광서
순무(巡撫) 하사진(何士晉)이 병력 징발의 어려움을 호소했기 때문에 요청한 병력을 완전히 징발하지 못하고 사성(泗城), 남단(南丹) 등지의
장수들만 일부 차출되었다. 또한 원옥패는 평락에 남아있게 되었고 임상봉은 산해관에 남아 관의 밖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원숭환은 부임한 후에 우선 산해관(山海關)에 주둔했다. 당시 후금(後金)이 광녕(廣寧)과 의주(義州) 등을 함락하고 동쪽으로 돌아가자 요서(遼西)
일대는 몽골의 카라친(哈剌慎, 喀喇沁) 등 여러 부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6월 요동 경략(遼東經略) 왕재진(王在晉)은 원숭환에게 명하여
중전소(中前所, 현 랴오닝성 수중현 전소진)로 주둔지를 옮기게 했다. 광녕 전둔위(廣寧前屯衛, 현 랴오닝성 수중 전위진)에 많았던, 갈 곳을 잃은
요동의 많은 백성들을 시급히 안치해야 했다. 왕재진은 원숭환에게 전둔위로 가서 요동 백성들을 안치하라고 명령했다. 원숭환은 "밤에
가시덤불과 호랑이, 표범이 다니는 곳을 지나 사경(四更)에 성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지며, 그의 담력은 장수와 병사들의 탄복을 받았다. 원숭환은
또 7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전둔위에 주둔할 계획이었으나 왕재진은 이를 경솔하고 무모한 행동이라 여겨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재진은
원숭환을 매우 중시하여 그를 칭찬했다
"'그의 담력은 으뜸이고, 뜻과 기개 또한 뛰어나다. 게다가 그의 깨끗한 마음가짐(澡滌之襟期)과 빛나는 마음은 보통 사람들을 크게
뛰어넘는다. 나는 그를 마음속으로 존중하고 사랑한다. 지금 원숭환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왕재진은 그에게 녕전 병비 첨사(寧前兵備僉事) 직함을 추가했다. 이 기간 동안 원숭환은 후금에 저항한 십삼산(十三山)에서 생긴 난민을
구원하는 문제와 왕재진의 중관 전략(重關戰略)(산해관을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삼고 산해관 밖 팔리포에 따로 변장과 관문을 더 건설하여 방어를
강화하는 전략)을 두고 왕재진과 계속해서 다투었다. 원숭환은 십삼산 난민을 구원하기를 강력하게 요청했으며 중관 전략에 반대하고 관외의
녕원(寧遠, 현 료녕성 흥성시)을 방어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관 전략에 반대하기 위해 그는 6월에 내각 수보(首輔) 엽향고(葉向高)한테
상서를 올려 상황을 보고했다. 엽향고는 직접 산해관에 가서 상황을 살펴보려 했으나 다른 각신(閣臣)인 손승종(孫承宗)이 자신이 가겠다고 요청하여
결국 손승종이 산해관을 순시하게 되었다. 손승종은 이 두 문제(난민 구원, 방어 거점)에서 원숭환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리고 8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명 희종(明熹宗)한테 원숭환을 칭찬했다
"그는 기개가 넘치고(英發) 실무에 밝으며(貼實), 책임을 질 만한 역량(綽有擔當)이 있어 스스로 대장(大將)이 되기를 원하니, 그를 단련하고
키워야 합니다."
이에 명 희종은 왕재진을 불러들이고 손승종을 독사(督師)로 임명해 요동의 일을 주관하게 했다. 동시에 산석 병비도(山石兵備道) 염명태(閻鳴泰)가
요동 순무(遼東巡撫)로 승진했고 원숭환은 그의 후임으로 산석 병비도를 맡고 녕전 병비도의 업무를 겸하게 되었다. 9월 손승종이 산해관에
도착하여 임무를 시작했고 원숭환한테 군용 막사를 짓는 일과 요동 백성들을 관외의 여러 성곽에 안치시키는 일을 맡겼다. 원숭환은 부임하여
"안으로는 군민을 위로하고 밖으로는 변경 방비를 엄격히 하여 공로가 크게 드러났다". 그러나 동시에 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 독단적이란 의혹도
있었다. 같은 해 겨울에 요동 순무 염명태는 원숭환에게 신병을 검열하고 가짜 병사(虛伍, 허위로 채워진 병력)를 확인하라고 명했다. 원숭환은
수비(守備) 모대공(莫大功)의 부대 내에서 사적으로 고용되어 대신 복무하던 두 명을 참수했고 사후에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 손승종이 이 사실을
알고 그 연유를 따져 묻자, 원숭환은 자신이 순무의 명을 따랐을 뿐이라고 답했다. 손승종은 분노하여 그를 질책했다
"죽이기 전에 청하지도 않았고 죽인 후에도 보고하지 않았으니 그로 인해 군중에 변란이 일어날지 복종할지 여부를 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된다."
원숭환은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숙여 죄를 빌었다. 천계 3년(1623년) 2월 27일에 손승종은 문무 관원들을 이끌고 관외로 순시를 나섰다. 19일에
일행은 영원에 도착했고 손승종은 그 전략적 위치가 중요함을 인정했지만 그곳을 방어 거점으로 삼겠다고 표명하지는 않았다. 염명태의 후임으로
요동 순무에 부임한 장봉익(張鳳翼)은 영원이 아닌 산해관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산해관 총병 마세룡(馬世龍)은 중후소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 모원의(茅元儀)가 손승종의 명으로 각화도(覺華島)의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원숭환은 그가 손승종한테 영원 방어 문제에 대해 결단을
내리도록 설득하기를 바랐다. 모원의의 적극적인 권유에 힘입어 손승종은 9월 초파일에 영원을 두 번째로 순시했고 공식적으로 그곳을 방어 거점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원숭환과 모원의의 추천으로 만계(滿桂)가 영원의 수장(守將)으로 임명되었고 원숭환 자신도 영원에 주둔하며 만귀와 조대수(祖大壽,
당시 이름은 조천수) 등과 함께 성벽 축조 및 방위 사안을 계획하고 시행했다. 일정 기간의 경영과 건설을 거친 후 영원성은 우뚝 솟아올랐다. 그곳은
"상인과 나그네가 모이고 유랑민이 집결하여 원근에서 살기 좋은 땅으로 바라보았으며" "군민 5만여 호가 모여들어 둔전(屯田) 지역이 50리에 이르니
원근에서 귀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숭환은 기뻐하며 내각 보신들에게 편지를 써서 "변변찮은 내가 영원에 있으니 장안(長安, 베이징의 대유)은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잘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천계 4년(1624년)에 손승종은 원숭환한테 산석 병비도 직책을 내려놓게 하고 녕전 등처의
병비, 둔전, 마정(馬政)만을 전적으로 담당하게 했다. 원숭환은 재임 기간 동안 축성 감독, 소금 굽기와 철 제련, 둔전 사업 진흥, 마정 운영, 수레와 배의
생산, 병력 확인 및 군비 확정, 군량 준비, 전차 부대 훈련, 몽골족 회유, 전투와 방어 계획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손승종이 관녕금 방어선을
구축하기를 도왔다. 원숭환은 이로 인해 손승종이 도독사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제일 신뢰받고 중용되는 사람"이 되었다. 9월에 원숭환은 정 4품 병비
부사로 승진했고 다시 종 3품 산동 포정사 우참정 겸 안찰사 첨사로 진급했다. 10월 22일에 원숭환은 부친상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상을 치르려
했다. 그가 풍윤현(豐潤縣)에 이르렀을 때 조정으로부터 탈정기복(奪情起復)(부모상을 당했음에도 국가 대사를 위해 상을 마치지 않고 관직에 복귀함)
의 명령을 받았다. 그는 먼저 상을 마칠 수 있도록 요청했고 다음에는 휴가를 달라고 요청했으나 모두 허락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11월 23일에
부득이하게 임지로 돌아갔다
1. 3. 일전 이름을 떨치다
천계 5년(1625년) 9월에 명나라군이 류하 전투(柳河之役)에서 패했다. 원숭환은 급히 무너져 달아나는 병사들을 막아 세우고 각자 맡은 거점으로
돌아가 방어하도록 함으로써 관외의 여러 성을 보존했다. 10월에 손승종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원숭환은 이에 깊이 실망하여
손승종을 만나 눈물을 흘렸고 심지어 함께 사직할 것을 요청했다. 새로 료동 경략에 임명된 고제(高第)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주(錦州),
우둔위(右屯衛), 녕원(寧遠), 전둔위(前屯衛) 등의 군민한테 관내로 철수하라고 명했고 관외의 모든 땅을 포기하려 했다. 원숭환은 이에 상소를 올려
강력히 항의했다. 그는 금주와 우둔, 대릉(大凌)의 세 성을 쉽게 버려서는 안 되며 만약 포기한다면 "적에게 약점을 드러낼 뿐 후금(東奴)뿐만 아니라
서쪽 오랑캐(西虜, 몽골)까지도 중국을 얕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는 "영원과 전둔위를 놀라게 하고 산해관의 방패막이를 잃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한 "녕전도(寧前道, 원숭환 본인)는 영원, 전둔위와 흥망성쇠를 같이할 것이다. 만약 영전의 병력을 철수시킨다면, 녕전도인 나는
반드시 관내로 들어가지 않고 홀로 고립된 성에 누워 오랑캐를 막아설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고제는 그한테 강제로 철수하라고 강요할 수 없었기
떄문에 관외의 여러 성 중 오직 영원만 홀로 굳게 보전됐다. 12월 광서도 어사 왕공(王珙)은 원숭환을 "청조와 위대한 전략"을 가졌다며 칭찬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를 승진시키라고 요청했다. 조정은 원숭환을 산동 안찰사(정 3품)로 승진시키고 계속해서 녕전도의 업무를 관장하게 했다. 천계
6년(1626년) 정월 14일에 4년 동안 명나라를 크게 공격하지 않았던 누르하치가 직접 요서로 출정했고 17일에 요하를 건넜다. 정월 18일에 원숭환은
후금군이 요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사 배치를 완료했다. 그는 만계한테 전 성곽의 방어, 특히 동남쪽의 최전선의 방어 임무를 맡겼다
좌보(左輔)는 서쪽을, 조대수는 남쪽을, 주매(朱梅)는 북쪽을 맡았다. 포 관장 팽잠고(彭簪古)와 그가 소무(邵武)에서 거둔 가솔인 라립(羅立)은
각자 홍이대포(서양 대포)의 발사를 책임지게 했다. 전략적으로는 견벽청야(堅壁淸野)의 책략을 채택하여 성 밖의 민가와 저장 물품을 모두 불태웠고
11문의 홍이대포 위력으로 적을 물리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전투 준비 상황을 밝힌 게시물(揭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도(원숭환 자신)는 이 성과 흥망성쇠를 같이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본도가 밝히는 바와 같이 각 장령은 지키든 구원하든 모두 본도와
생사를 함께해야 한다. 한데 뭉쳐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하면 반드시 살 것이요 죽음은 없을 것이다. 다만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지 않을까 두려워하니 싸움터에서 물러나는 자가 있다면 본도가 법대로 군문 앞에서 즉시 처형할 것이다"
장수와 병사들의 수성 결의를 굳건히 하기 위해 원숭환은 전투에서 물러서는 도망병을 처형했다. 또한 전둔위 총병 조솔교(趙率教)와 산해관 총병
양기(楊麒)한테 공문(移檄)을 보내 도망병을 보면 간첩으로 간주하여 체포하고 사형에 처할 것이며 만약 한 명의 병사라도 전둔위로 무너져 들어가거나
한 명의 사졸이라도 관내로 도망친다면 조솔교와 양기 두 장군에게 죄를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산해관의 관문 주사 진조포(陳祖苞)에게
편지를 보내 변복하고 도망치는 병사들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로 인해 녕원의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물러설 뜻이 없었다." 원숭환은 심지어
경략 고제한테 출병 지원을 하지 말 것을 면전에서 간청하여 "그들을 사지(死地)에 놓아두고 생(生)을 구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전투 전 사기 진작을
위해, 원숭환은 피를 뽑아 글을 쓰고(刺血爲書), 전체 장수와 병사들에게 절을 한 다음 풀(草)을 먹으면서 그들을 격려했다
"만약 한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성을 지킬 수 있다면 나는 소나 양이 되어 (희생하여) 보답하는 것도 달게 여길 것이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감동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기를 요청했다
정월 23일에 누르하치의 대군이 녕원성 아래에 도착하여 성의 서북쪽 5리 밖에 주둔했다. 누르하치는 자신한테 20만 대군이 있다고 주장하며
원숭환한테 항복을 권했지만 원숭환은 회신에서 누르하치의 군사가 13만 명에 불과하다며 항복을 거부했다. 24일 새벽에 후금군이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숭환은 마침 조선 공사(貢使)의 역관 한원(韓瑗) 등과 태연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포성을 듣고 놀란 한원에게 원숭환은 웃으며
"적이 왔다!"라고 말했다. 이후 사흘 동안 누르하치는 방패 달린 수레(楯車)와 중기병을 동원하여 녕원을 맹공격했다. 원숭환은 명나라군을 지휘하여
홍이대포, 화총 등 화기로 반격했고 후금군이 성벽에 뚫은 구멍을 끊임없이 돌덩이로 막았다. 녕원 군민의 완강한 저항은 후금군에게 엄청난 사상자를
안겼고 누르하치는 마침내 27일에 심양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철수하기 전에 누르하치는 군대를 보내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 각화도(覺華島)의
군민을 모두 죽여서 보복했다. 이전에 명나라 조정은 녕원의 방어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원숭환은 명나라군을 지휘하여 사르훠
전투(薩爾滸之戰) 이후 처음으로 후금과의 정면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 측은 이를 "녕원의 기이한 승리(奇捷)" 또는 "녕원
대첩"이라고 불렀다. 승전보가 북경에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은 환호했다. 명나라 희종은 "이것은 칠팔 년 동안 전혀 없었던 일이며 실로 변경 지역에
기개를 토해낸 일이다"라고 칭찬하고 원숭환한테 도찰원 우첨도어사의 직함을 더했다. 원숭환은 상소를 올려 부친상을 마칠 때까지 사직할 것을
청했지만 희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3월 9일에 희종은 오히려 원숭환을 요동, 산해 등의 순무로 임명하고 사의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便宜行事)을 부여했다. 4월에 희종은 다시 원숭환에게 병부 우시랑 겸 도찰원 우첨도어사의 직위를 더해주었고 아들 한 명에게 세습이 가능한
금의위 정천호의 관직을 내리는 은전(恩蔭)을 베풀었으며 은 40냥과 명주 비단 3벌을 상으로 하사했다
1. 4. 요동을 돌보다
녕원성 전투 후에 원숭환(袁崇煥)은 본래 요동 지역의 모든 행정 및 군사 권한을 통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병부상서(兵部尚書)
왕영광(王永光)의 지지를 얻어 경략(經略)과 총병(總兵) 직책을 없애고 모든 권한을 요동 순무(遼東巡撫)에게 집중시키려는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희종(熹宗)은 이 건의를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환관 여섯 명을 감군(監軍)으로 파견하였고 경략(經略)의 직책을 독사(督師)로
바꿔 고제(高第) 대신 왕지신(王之臣)을 임명해 그의 지위를 원숭환의 위에 두었다. 같은 해(1626년) 여름에 원숭환의 휘하 장수 두 명, 즉
전둔위(前屯衛)에 주둔한 조솔교(趙率教)와 녕원에 주둔한 만계(滿桂)가 서로 불화를 겪었다. 원숭환은 조솔교의 편을 들어 조정에 조솔교가
관외(關外)의 병력을 통솔하게 하고 만계를 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원숭환은 상소를 올리기 전에 막 부임한 왕지신과 미리 상의하지 않았고 왕지신
역시 이러한 조치에 반대했다. 이로 인해 원숭환은 왕지신과도 불화를 겪어 한때 사직(辭職)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조정의 중재 아래에 원숭환은
상소하여 자책하고 만계는 산해관(山海關)에 남아 진수하게 하며 조솔교는 녕원으로 옮겨 진수하기에 동의했다. 이후로 원숭환은 왕지신과 여러 차례
이견을 보였다. 예를 들어, 원숭환이 "요동 사람으로 요동 땅을 지키고 요동 땅으로 요동 사람을 먹여 살린다(以遼人守遼土, 以遼土養遼人)"라는 자신의
구상을 관철시키고자 관외에 대규모 군둔(軍屯)을 일으키려 했으나 왕지신의 반대를 받았고 조정도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죽자
원숭환은 후금(後金)의 칸(汗)이 계승되어 교체되는 시기를 틈타 "기회를 타 공격할" 의도로 먼저 자신의 임시 재량권(便宜行事之權)을 이용하여
리라마(李喇嘛)를 심양(瀋陽)에 파견해 누르하치에 대한 조문을 구실로 삼아 후금의 실정을 정탐했다. 후금의 새 칸인 홍타이지(皇太極)는 이 기회를
틈타 화의(和議)를 요청했고 원숭환은 이를 수락할 의향을 보이며 "이로 인해 이간시키려 한다(因而間之)", 즉 화의를 핑계로 후금 내부를 이간질할
준비를 했다. 왕지신은 조문 사절 파견과 화의 모두에 반대하며 그러한 행동들이 명나라의 번속국(藩屬國)인 몽골과 조선을 실망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태감 위충현(魏忠賢)은 원숭환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명나라와 후금 쌍방은 12월부터 화의 교섭을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에 원숭환은 먼저 송산(松山)과 행산(杏山)의 두 성을 수리한 데 이어 금주(錦州), 대릉하(大凌河), 소릉하(小凌河)의 세 성을 수축(修築)했다
후원(後援)을 얻기 위해 원숭환의 입장은 점차 엄당(閹黨, 환관 세력) 쪽으로 기울었다. 10월 하순부터 거의 매번 상소를 올릴 때마다 위충현을
칭송했으며 심지어 "신이 금년 봄 녕원성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곧 공장(廠臣, 위충현을 높여 부른 말)이 모의한 결과입니다"라고까지 주장했다(이는
"인물 논란 - 위충현에게 아첨" 목차를 참조). 천계(天啓) 7년(1627년) 2월에 왕지신(王之臣)은 원숭환(袁崇煥)과 의견 차이가 너무 커서 병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했고 명나라 조정은 이를 승인했다. 그리고 독사(督師)의 자리는 비워두고 요동 순무(遼東巡撫) 원숭환 한 사람이 요동의 일을 전담하게
했다. 원숭환은 상소를 올려 사양하고 "수성(守城)이 바른 수고 싸움(戰)이 기묘한 수이며 화의(款)가 곁다리 수다"라는 방략을 제시했으나 명나라
조정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에 후금(後金)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소식(정묘호란/丁卯之役)이 전해졌다. 원숭환은 이전에 명나라가
후금에 잠복시킨 내응(內應)인 유흥조(劉興祚)로부터 이미 이 소식을 들었지만 그가 유흥조의 건의대로 조선에 방비를 갖추도록 조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후금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수영도사(水營都司) 서용증(徐勇曾), 장빈량(張斌良), 왕저(汪翥) 각자한테 배 20척과
병사 오백 명을 맡겨 선봉으로 삼아 동쪽의 조선을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조선 측은 3월 초에 후금과 화의(和議)를 달성했다. 3월 11일에
희종은 병부상서(兵部尚書) 풍가회(馮嘉會)의 건의를 따라 원숭환한테 후금이 멀리 약탈하여 본거지가 비어있는 시기를 틈타, 관녕(關寧)의 정예
병력을 선별하고 지혜롭고 용감한 장수를 선택하여 경무장 기병으로 깊숙이 들어가 본거지를 치게 하고 대병력은 요하(遼河)에 진을 치게 하여 때를
보아 계속 지원함으로써 오랑캐의 후방을 견제하고 속국(조선)의 급박함을 완화하라고 명령했다. 원숭환은 다시 총병(總兵) 조솔교와 부총병(副總兵)
좌보(左輔), 주매(朱梅) 등이 정예 병력 9천 명을 이끌고 삼차하(三岔河, 요하 하류) 일대로 가서 습격하여 소탕하는(搗剿) 임무를 수행하도록 파견했다
이어서 참장(參將) 서련(徐璉)한테 수병 1천 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허장성세(虛張聲勢)였을 뿐, 후금에
대해 아무런 견제 작용도 하지 못했다. 원숭환은 4월에 올린 상소에서 스스로를 변명하며 후금은 10만 명은 조선을 약탈하고 10만 명은 본거지를
지키고 있기에 결코 본거지가 비어있지 않으며 직접 본거지를 습격하여 소탕하기는 너무 모험적이므로 산해관과 녕원의 안전을 확보하는 상황에서
조솔교 등한테 기회를 보아 움직이도록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명나라와 후금(後金)의 화의(和議) 교섭이 파렬되었다. 홍타이지
(皇太極)는 원숭환(袁崇煥)을 두고 "거짓으로 화친을 칭하고 그 틈을 타 성곽을 수리했다"고 비난하며 5월에 군을 이끌고 새로 쌓은 금주(錦州) 등의
성을 공격했다. 원숭환은 조솔교(趙率教)와 좌보(左輔), 주매(朱梅)를 금주로 옮겨 주둔하게 했고 5월 12일에 후금의 공성(攻城)을 격퇴했다. 그 후
홍타이지는 성을 포위한 채 공격하지 않았고 원숭환은 병력을 추려 만계(滿桂), 우세록(尤世祿) 등을 파견하여 두 차례 금주를 구원하려 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5월 27일에 홍타이지는 일부 병력을 남겨 계속 금주를 포위하게 하고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녕원(寧遠)을 공격했다
수성(守城) 방략을 두고 원숭환과 만계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원숭환은 작년과 같은 방식으로 성을 죽기로 지키자고 주장한 반면 만계는 굳이
성 밖으로 나가 주동적으로 전투하려 했으며 논쟁 과정에서 원숭환의 령전(令箭)을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결국 원숭환은 성 안에 앉아 지휘했고
만계, 우세록, 조대수(祖大壽) 등의 장수들이 성 밖으로 나가 용감하게 싸워 적을 물리쳤다. 또한 홍이대포(紅夷大炮)의 위력까지 더해져 후금군은
28일과 29일 이틀간의 공성전에서 패배했다. 그 후 홍타이지는 되돌아가 금주를 공격했으나 이 또한 조솔교한테 격퇴되었다. 6월 5일에
홍타이지는 철수하는 도중에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대릉하(大凌河)와 소릉하(小凌河) 두 성을 헐었다. 금주의 포위가 풀리고 원숭환은 6월 22일에
또다시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그러자 희종은 이전과 달리 불허하지 않고 승인하여 7월 1일에 "고향으로 돌아가 몸을 조리하라"고 명하고
왕지신(王之臣)을 다시 독사(督師)로 임명했다. 원숭환은 이전에 후금과 화의를 논의함, 후금이 조선을 공격했을 때 '습격 소탕(搗剿)'에 실패함
그리고 금주 구원전에 실패함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언관(言官)들의 탄핵을 받았다. 이것이 그의 사직이 승인된 진짜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희종은 그를 두고 "의욕이 쇠퇴하여 북돋아 주기 어렵고 물의(物議)가 갈수록 늘어난다"고 비판했다. 특히 그가 화의를 논의한 일에 대해 마음속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공로를 치하할 때 다른 일선 문무 관리들은 모두 관직을 두 단계 올리고(加銜) 후손에게 음직을 베풀었지만(恩蔭) 유독
원숭환만 "관직 한 단계 가자, 은(銀) 30냥, 대홍 주사(纻絲) 두 벌"이라는 미미한 상을 내리는 데 그쳤다. "엄당(閹黨)" 관리였던 곽유화(霍維華)는
상소를 올려 원숭환한테 불공평하다며 대신들한테 가자된 관직 한 단계를 원숭환한테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 희종은 원숭환이 화의로 국사를
그르쳐서 처벌하지 않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답하며 곽유화를 "사리분별(事體)을 매우 모른다"고 질책했다
1. 5. 독사를 기용하다
원숭환이 고향으로 돌아갈 무렵에 희종(熹宗)이 붕어하고 그의 동생인 신왕(信王) 주유검(朱由檢)이 제위를 이었으니 그가 곧 숭정제(崇禎帝)다
11월에 위충현(魏忠賢)이 제거되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관리들이 후금(後金)에 대처하기 위해 원숭환을 다시 기용할 것을 주청했을 때 그 상소가
"공차(公車, 상소를 올리는 수단)에 가득 찰" 정도였다. 11월 19일에 숭정제는 정식으로 원숭환을 도찰원(都察院) 우도어사(右都御史)로 기용하고
병부(兵部)에 새로 설치된 우시랑(右侍郎)의 일을 관장하게 했다. 12월 28일에 그의 영원-금주(寧錦) 전투의 공로를 보상하기 위해 금의위(錦衣衛)
지휘첨사(指揮僉事)의 은음(恩蔭)을 상으로 내렸다. 숭정 원년(1628년) 4월 3일에 원숭환을 병부상서(兵部尚書) 겸 도찰원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로
임명하여 계료(薊遼), 등래(登萊), 천진(天津) 등의 군무를 총괄하는 독사(督師, 즉 계료독사)로 삼았다. 이는 바로 지난달에 파면된 왕지신(王之臣)을
대체한 일이다. 원숭환은 아직 집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숭정제가 그한테 복직(復出)하라는 임명 교서를 내렸고 이후에 "사자(使者)들이 도로에
모문룡은 이에 응답했다
"문룡은 해외의 사람일 뿐입니다. 많은 공로를 세웠으나 소인배의 말 때문에 군량이 부족하고 기물과 말도 없어서 마음먹은 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만약 하나하나 응원해 주신다면 성공을 돕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후 원숭환이 선상에서는 연회(張筵)를 베풀기 불편하다며 작별을 고했다. 이에 모문룡은 섬 해변에 장막(帳房)을 설치하고 원숭환을 연회에
초대했다. 연회석에서 모문룡은 원숭환을 경멸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고 원숭환은 "황상(皇上, 숭정제)께서는 신성하시어 요순 탕무(堯舜湯武)와 같은
군주이니 변방에서 마땅히 힘써야 한다"고 타이르며 선유(宣諭)했다. 하지만 모문룡은 오히려 선황(先帝, 희종)이 자신한테 베푼 은혜를 강조했다
이어서 원숭환이 군사의 방략(方略)에 대해 묻자 모문룡은 "영원의 병마는 모두 쓸모가 없고 동강 병사 2~3천 명만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다가 불을
지르면 완전한 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연회는 밤 이경(二更)이 되어서야 끝났다. 6월 2일에 모문룡은 원숭환한테 섬에 오르도록 청했다
동강의 장수들과 여진, 몽골의 이정(夷丁)들이 차례로 원숭환을 알현했다. 원숭환은 주위에 있는 병졸들이 모두 성(姓)이 모(毛)라는 말을 듣고는
불쾌감을 느끼고 그들을 꾸짖어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모문룡과 절제(節制)를 받을 문제, 영오(營伍)를 개정할 문제, 도청(道廳) 설치 등 여러 일에
대해 논의했지만 모문룡은 오직 염명태(閻鳴泰)와 무지망(武之望) 두 사람을 심하게 욕하는 데만 몰두했고 원숭환은 자신을 간접적으로 욕하는
일이라 여겼다. 삼경(三更)에 이르러 두 사람은 불쾌하게 헤어졌다. 6월 3일에 원숭환이 관리를 보내 모문룡한테 감사 인사를 전하자 모문룡은 다시
술과 연회를 준비하여 맞이했다. 원숭환은 평상복(便服)으로 갈아입고 섬에 올라 연회에 참석했다. 연회석에서 원숭환은 "오래동안 변방 요새에서
일했지만 항주 서호(杭州西湖)에는 즐거운 곳이 많다"고 말하며 모문룡이 스스로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암시했다
모문룡은 이에 "오래동안 그런 마음이 있었지만 오직 나만이 오랑캐(奴)를 멸하는 중요한 비밀(孔竅)을 알고 있습니다. 동이(東夷)를 멸하고 나면
조선(朝鮮)은 문약(文弱)하여 기습하여 취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원숭환은 "조정은 먼 전략에 힘쓰지 않으니 마땅히 군주를 대신할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모문룡은 "이곳을 누가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오만하고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연회가 끝난 후에
원숭환은 부장(副將) 왕저(汪翥)가 모문룡을 거듭 설득하도록 했고 모문룡의 심복들이 그를 설득하기를 바랬다. 6월 4일에 원숭환은 동강의
관병들한테 상금으로 은(銀)을 하사하고 모문룡한테 공문을 보내 여순의 동쪽은 모문룡의 인장을 사용하고 여순의 서쪽은 원숭환의 인장을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공문을 보내 영제(營制)를 정하고 진강(鎮江)과 여순을 수복할 것을 효유(曉諭)했으나 모문룡은 무시했다. 6월 5일에
원숭환은 섬 안의 산에 장막을 설치하고 모문룡이 답례하러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산으로 초대하여 군사들의 각사(角射) 시범을 보도록 했다
앞서 원숭환의 명령을 받은 참장 사상정(謝尚政)은 매복을 설치해뒀다. 모문룡이 장막 안으로 들어서자 원숭환은 동강 운송로 변경 문제에
불복종한 일을 두고 격렬하게 꾸짖으며 말했다
"본부원이 간과 쓸개를 내보이며(披肝瀝膽) 그대와 사흘을 이야기했으나 그대가 이제라도 돌이키면 늦지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어찌 그대의
늑대같은 마음(狼子野心)이 한결같이 끝까지 기만할 줄 알았겠습니까! 본부원을 눈에 두지 않음은 그나마 괜찮으나 지금의 성천자(聖天子)께서는
영무(英武)하시니 나라의 법도가 어찌 그대를 용납하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원숭환은 서쪽(궁궐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하며 황명(皇命)을 청한 후에 모문룡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모문룡이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원숭환은 그가 마땅히 참수되어야 할 열두 가지 죄목을 열거했다(일방적인 전횡, 군주에 대한 기만 및 공로 조작, 대역무도, 군량 착복,
외번과의 사적인 통신, 임명권 남용, 상인 약탈, 음란한 행동, 요동의 난민에 대한 학대, 위충현(魏忠賢)에 대한 아첨, 패배를 승리로 포장함,
관망하며 오랑캐를 양성). 마지막으로 원숭환은 이렇게 선언했다. "오늘 모문룡을 죽이고도 본부원이 만약 전 요동을 수복하여 조정에 바치지
못한다면 원컨대 상방검(尚方劍)으로 내 목숨을 시험하여 그대의 목숨을 갚겠습니다!" 동강의 장수들은 무릎 꿇고 모문룡을 위해 구명을 요청했고
모문룡 본인도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원숭환은 모두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후 원숭환은 다시 서쪽을 향해 절하며 상방검을 가져오라고 명령했고
수영(水營) 도사(都司) 조가교(趙可教)와 하린도(何麟圖)한테 참수의 집행을 감독하게 했으며 깃발 관원(旗牌官) 장국병(張國柄)이 상방검으로 장막
앞에서 모문룡을 참수했다. 이어서 원숭환은 동강의 사후 처리(善後事宜)를 정리했다. 그는 동강 군대를 4개의 협(協)으로 나누고 모승록(毛承祿),
서부주(徐敷奏), 유흥조(劉興祚), 진계성(陳繼盛)한테 각각 관리를 맡겼으며 진계성한테는 임시로 동강진을 대리 통솔하게 했습니다. 그는 가져온
은(銀)을 각 섬의 관병들한테 상으로 주도록 명령하여 한 사람당 은 3량을 지급했다. 또한 사람을 여순(旅順)에 보내 선무(宣撫)하도록 했고
명패(牌)를 발급하여 각 섬의 군민(軍民)들을 안심시켰다. 모문룡의 친아들인 모승조(毛承祚)에게 공문을 보내 우선 상인들을 안심시키고 모문룡이
상인들한테 빚진 은(銀)을 즉시 갚도록 처리하며 모문룡에게 약탈당했던 상선(商船)들을 석방하게 지시했다. 6월 6일에 원숭환은 직접 모문룡의
관(棺) 앞에 가서 분향하고 절을 올리며 "어제 당신을 참수한 것은 조정의 대법(大法)이었고 오늘 당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우리 동료들의
사사로운 정입니다." 라고 말한 후에 눈물을 흘렸다
6월 9일 새벽에 원숭환은 여순으로 가서 방어 태세를 시찰하고 병마를 사렬했다. 모든 배치를 마친 후에 원숭환은 영원(寧遠)으로 귀환하고 상소를
올려 죄를 청했다. 원숭환은 숭정제한테 사후의 상황을 보고하며 자신이 사전에 허가를 받지 않고 모문룡 처단한 일이 군정(軍政)을 바로잡기
위함이었음을 강조했다. 숭정제는 이 보고를 듣고 처음에는 크게 놀랐으나 이내 자신이 원숭환에 크게 의지하고 있음을 떠올렸다. 이에 모문룡이
죽어 마땅한 죄가 있으며 원숭환의 단호한 행동을 가상히 여긴다는 내용의 황명을 내리고 그한테 더 이상 죄를 청하지 말라고 명했다. 8월
원숭환은 서부주를 파견하여 동강의 군무를 정돈했으며 군대를 더 축소해서 동(東), 서(또는 좌, 우) 2개 협(協)으로 재편했다. 진계성이
좌협(左協)을, 유흥조가 우협(右協)을 이끌도록 했고 동시에 섬의 총병 자리(島帥, 동강 총병)는 공을 세운 자를 기다려 잠시 비워둘 것을 상주했다
이는 장차 동강진을 유흥조에 맡기려는 의도였다(참조할, 모문룡 처형 사건에 대한 다른 관점은 '인물 논란 - 원모(袁毛) 공안' 항목에 있다)
1. 7. 북경에서 용전하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금(後金)과의 화의(和談) 역시 요동(遼東) 반환 문제에서 양측이 협상의 여지를 찾지 못하여
파렬되었다. 이로 인해 양측의 관계는 다시 긴장 상태로 돌아섰다. 원숭환은 관녕(關寧, 산해관-영원) 일대의 방어는 이미 공고히 했으나 북경과
가까운 계주(薊州) 일대의 방어에 대해 매우 우려했다. 숭정 2년(1629년) 3월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계문(薊門, 기주 지역의 관문)은 릉침(陵寢)과 수도(京)의 어깨와 등(바로 뒤, 가장 중요한 방어선)과 같으나 병력(兵力)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만일 오랑캐(夷, 몽골 카라친부)가 길잡이가 되어 오랑캐(奴, 후금)를 인도하여 침범하게 된다면, 그 재앙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그는 몽골 카라친부(哈剌慎部)를 접제(接濟, 구휼하고 돕는 것)하고 회유(籠絡)할 것을 주장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상주문을 올려
"계문(薊門)이 단약함(單弱, 취약함)"을 거
중공 사이트의 글을 번역했는데 저 형식대로 저장할 데가 딱히 없어서
박원숭환이 누구노 - dc App
잘 싸우다가 황제인 숭재인 때문에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