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존재가 그리 좋다면 왜 살자하지 않는가?
(1) 애초에 태어나지 않아서 비존재인 것과
(2) 일단 시작된 삶이 끝장나버려서 비존재가 되는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물론, 일단 시작된 삶이 끝장나면 (즉, 태어난 사람이 죽게 되면)
더 이상 고통은 없다.
그러나 죽음에는 고통은 없어도 다른 종류의 나쁨이 매우 많이 있다.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나쁨'들에는 고통만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전쟁터의 군인이 열심히 전투를 하고 있는 와중
그 와이프가 그 군인의 절친과 열심히 바람을 피우고 있는 사태는,
그 군인이 그 사태를 평생 알지 못하여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군인에게 매우 매우 나쁜 일이다.
고통만이 인생의 나쁨이라고 보는 것은 이렇듯 터무니없는 것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고통은 겪지 않지만 그에 따르는 온갖 나쁨들이 있다.
그 사람이 하고 싶었던 일, 바라던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되고,
살았다면 느낄 수 있었을 쾌락이 박탈된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아서 쾌락이 없는 것은 박탈이 아닌 반면 일단 태어난 사람이 죽게 되어 그에게 더 이상 쾌락이 없는 것은 박탈이다.)
베너타는 이러한 비대칭성을 설명하면서 그냥 독단적으로 우기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확고한 직관>과 부합하는 판단이라는 것을 논증했다.
그 <확고한 직관>이란 바로,
어떤 부유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신혼 부부가 아이를 낳을까말까 고민하다가
아이 이름도 철수라고 지었는데
그 철수를 걍 안 낳았을 때,
우리는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은 그 철수에게 무언가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애초에 태어나지 않아서 '좋음'이 부재한 사태에 대해 박탈이 아니라고 여겨야만 하는 것이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으면 모든 종류의 나쁨이 없으며, 박탈당하는 좋음도 전혀 없다.
그러므로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삶이 시작되고나서
그 삶이 끝장이 나면,
그 자의식을 가진 주체는 더 살았다면 있었을 쾌락과, 가족들과의 추억과,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일들을 해내는 성취들, 온갖 선호의 충족을 모두 박탈당하게 된다.
그리고 '자의식', '나 자신'이 영원히 소멸되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매우 매우 나쁜 것이다.
2. 베너타는 왜 그냥 '좋음'과 '나쁨'이 아니라 '쾌락'과 '고통'으로 비대칭성을 설명했는가?
베너타를 비판하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인생에는 쾌락과 고통 말고도 여러 가치들이 있는데 베너타는
오직 쾌락과 고통만 고려한 오류를 범했다는 소리를 하곤 한다.
물론 베너타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서 그따위 소리를 한 적이 없지만, 사람들은 책을 안 읽는다.
베너타는 그냥 좋음과 나쁨을 논하면 되지,
왜 쾌락과 고통 타령을 해서 사람들을 오해하게 했는가?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직관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가령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성악설을 부정하기 위해 우리는
아이가 우물에 기어가는 걸 보게 되면,
어떤 계산 없이 바로 직관적으로 심장이 덜컹하고 구하려고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일반적 직관을 드러내는 특정한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서 우리는 일반적인 결론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을 도출해낼 수 있다.
베너타는 자신의 반출생주의 논증을 펼치면서,
일반적 직관을 드러내는 특정한 구체적 예시를 들기 위해 '고통'을 나쁨의 한 예시로서 든 것이다.
가령 어떤 미친 과학자가 태어나서 1년 동안 오직 불에 타는 끔찍한 '고통'만을 겪다가 죽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기계를 작동시킨다고 할 때,
우리는 그 기계를 작동시키지 않아서 인간이 애초에 태어나지 않게 되어 그 고통을 피하는 것이 옳다는 확고한 직관을 갖고 있다.
이렇게 인간이 태어나지 않아서 나쁨을 피하는 사태에 우리가 어떠한 확고한 직관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고통'이라는 예시가 매우 적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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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로스쿨 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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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후대들은 태어남이 없기에(비존재) 군대 자동면제 기후위기 면제 관세폭탄 면제 생로병사 면제
어렵게 생각할 필요없이, 살1자 하라는 건 군대 강제로 끌고 와 놓곤 뭣 같으면 탈영해! 이러는 거나 다름없지.
탈영이 나쁜 이유는 결국 붙잡혀 빵에 가서 그 벗어나고자 했던 고달픔보다 더한 고초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에 이견이 있진 않다. 그런데 고통과 쾌락이 없는 비존재 상태가 바람직하기 때문에 반출생이 옳다면, 살자를 통한 비존재는 왜 나쁜 것인지 따져묻는 상황에서, <응, 죽는 건 탈영이야~>라고 하는 건 <죽는 건 나빠, 왜냐면 나쁘니까!>라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이 맥락에서 (살자가 나쁘다는 걸 이미 전제하고 있는) 탈영 비유는 선결문제 전제의 오류라는 거다.
나도 탈영 어쩌고~가 살1자를 통해 비존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완벽한 비유가 아니란 것은 인지하고 있음. (탈영은 후속되는 고통이 존재하지만, 당장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후속되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런데 님이 말한 [나쁘니까 나빠] 수준의 떼쓰는 느낌의 발언이 된다는 건 뭔 뜻인지 모르겠음. 그럼 님이 좀 더 적절한 비유를 제시해 줄 수 있는지?
굳이 탈영이라는 비유를 쓴 건 강제징용을 그만둠으로써 원천적인 고통의 발생을 차단하자는 이야기 중인 특정 집단에 여따 대고 "살1자해!" 라고 하는 것은 탈영하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동문서답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임. 살1자가 나쁘다는 전제를 깐 것이 아니라
1. 굳이 한줄짜리 비유를 할 이유가 없다. 2. 탈영 비유는 <살자를 통해 고통과 쾌락이 없는 비존재가 되는 것>이 도대체 왜 나쁜 것인지에 대해 해명해주는 바가 전혀 없다. 살자를 탈영으로 비유하는 게 공감을 얻으려면, <살자는 탈영처럼 종합적으로 따져봤을 때 그 당사자에게 나쁜 일이다>가 이미 전제돼야 한다. 즉, 살자가 나쁘다는 점을 <다른 논거>를 통해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 수긍할 비유라는 거다. 지금 이 맥락에서는 그 <다른 논거>를 구체적으로 보여야한다. 3. 고통과 쾌락이 없는 비존재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네 논리에 따르면 살자도 바람직하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동문서답이 아니라, 해봄직한 반론이다.
<강제징용 제도를 없애서 군생활도 안 하고 빵에도 가지 말자!>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너는 왜 (빵에 가야 되는) 탈영을 안 해?"라는 물음에 해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쾌락도 고통도 없는 비존재가 좋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그럼 넌 왜 살자를 통해 비존재를 안 해?>라는 물음에 해명을 해야 한다. 살자하는 순간에 고통이 있긴 하지만 인간은 어쨌든 죽으며, 보통 자연사나 사고사의 고통이 살자 순간의 고통보다 작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살자 반대의 이유로 그 순간의 고통을 제시하는 건 궁색하다. 그래서 길게 제대로 해명해야 한다. '강제징용' 사안에서의 '탈영'과는 사정이 많이 다른 것이다.
굳이 한 줄짜리 비유를 할 필요 없다는 것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함 그런데 살1자하라고 별생각 없이 들이박는 사람한테 장황하게 다른 논거 일일이 설명해줘봤자 그 사람에게 와 닿을까? 글쎄... 비존재에게 박탈이란 존재하지 않고, 태어난 자가 죽게 되어 누리지 못하는 다양한 것들은 박탈이랍니다~ 나뻐요 블라블라 이렇게 열변을 토한들... 경청해 주기나 할까? 스스로 납득하고 완결 낼 것이 아니라면 때로는 직관적인 비유나 간결한 한마디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함. PC방 가는 걸 이해 못 하는 사람에게 너는 집에 술이 없어서 가게 가서 마시니? 라는 비유처럼 와 닿는 해명을
비유를 이용하는 것이, 네가 든 예처럼 적절할 때도 있고, 부적절할 때도 있는 거다. 지금처럼 논리적으로 제대로 반박해야할 때도 있다.
공지로 올리면 안되나
나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범주 안에 모든 감정을 입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잘못 알고 있었구나
안락사좀 제발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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