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나쁜 이유는, '쾌락'이나 '선호의 충족' 같은 좋음들을 박탈시키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존재를 '소멸'시킨다는 점에서도 죽음은 매우 나쁘다.
죽음으로써 내가 그토록 신경 쓰는 바로 이 사람, '나'가 영원히 사라진다.
다시 말해,
나의 기억, 가치관, 신념, 관점, 희망, <나 자신>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이 끝이 난다.
이러한 '자아의 상실'은 그 자체로 매우 나쁜 일이기 때문에 그 상실의 시기를 가능한 한 뒤로 미룰 강력한 이유를 제공해준다.
물론 말기암 환자와 같이 삶의 고통이 극심하여 그 자아 보존의 이익보다
끔찍한 고통을 멈추는 이익이 더 중요할 때가 도래하면,
달리 결정하는 게 합리적일 수 있으나,
그 전까지는 그래도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게 합리적일 수 있다.
데이비드 베너타가 <인간의 곤경>에서 말했듯,
우리는 태어남으로써 진퇴양난에 빠졌다.
삶도 나쁘지만, 죽음도 나쁘다.
인간은 손쉬운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곤경'에 빠져 있다.
낙하산이 안 펴지지만, 멀쩡한 보조 낙하산이 있다.
그럼 그 문제는 진정한 곤경이 아니다.
진정한 곤경 (비통한 곤경)에는 손쉬운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우리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지만, '자아의 상실'이라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결국 우리는 태어남으로써,
이 고통의 바다 속에서 한동안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다 문득 침잠할 운명에 처했다.
나의 소멸을 매우 나쁘다고 보는 이유가 있을까 나의 기억, 가치관, 신념, 관점, 희망, <나 자신>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이 끝이 난다. 즉 쾌락이 사라지는 것이 고통이 사라지는것보다 가치가 있다고 보게되는데 이렇게되 쾌락의 좋음이 고통의 없음의 좋음 보다 위에 가게됨
배대칭성으로 존재함=고통이있음 -1 쾌락이 있음 +1 비존재=고통이 없음 +1 쾌락이 없음 0(나쁘지않음) 이니 결과적으로 비존재가 1이 더 높으니 비존재가 존재보다 나음으로 귀결되는데 죽음(비존재) = 고통이 없음 +1 쾌락이 없음 0 여기서 이 쾌락이 없음이 0이 아니라 -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야되는거아닐까
박탈로 설명을 한던데 죽음으로 비존재가되면 박탈 당할 존재가 없어지는거잖아 결과적으로 비존재의 평온함을 되찾는거고 나(쾌락)의 상실 보다 고통의 존재가 더 좋게되는거임?
나 자신(자아)은 쾌락이 아니다. 쾌락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경험들 중에 하나일 뿐이다. 쾌락은 그냥 즐거운 느낌일 뿐인데 어떻게 특정한 하나의 느낌이 사람(자아)일 수 있겠나? 인생에는 쾌락 말고도 <가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죽으면 박탈이 생긴다는 말의 의미는, 안 죽고 계속 살아서 <쾌락을 비롯한 우정, 사랑, 선호충족 등등의 여러 "가치 있는 것"들을 얻는 사태>가 <죽어서 그 가치 있는 것들을 얻지 못하는 사태>보다 더 낫다는 말이다. 반면에 애초에 아예 태어나지도 않아서 "가치 있는 것"이 없는 경우, 즉, 나 자신(자아)이란 게 애초에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어서 좋음이 없는 경우에는 그러한 좋음이 없는 사태가 좋음이 있는 사태보다 나쁘지 않다는 거다.
인생의 쾌락 말고도 가치있는것이 있다면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에서 쾌락 외 다른것들을 고려하지않으면 삶은 비존재의 비해 좋지않다를 주장하기에는 비약해지지 않음? 채소는 건강하고 라면은 건강하지 않으니 채소를 먹는것이 옳다는 전혀 맛을 고려하지 않은것처럼 인생이 쾌락말고도 가치있는것이 많다고 한다면 고통과 쾌락만 비교할게 아니라 다른 가치있는것들도 비교대상에
넣어야된다는거지
예를 들어, 20살 길동이가 대학교 첫 MT를 갔다가 계곡에 빠져죽었다면, 우리는 길동이의 구만리 앞길에 놓인 수많은 가치 있는 것들의 박탈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어떤 부부가 셋째 낳으려고 이름도 길동이라고 지었었는데 그냥 안 낳았다는 얘기를 듣고 아예 태어나지도 않은 그 길동이에 대해서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매우 상식적인 거다.
좋음과 나쁨의 비대칭성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쾌락과 고통은 각각 좋음과 나쁨의 한 가지 예시일 뿐이다.
근데 길동이가 만약 사고당하지 않고 60세까지 살다가 암에 걸리든 교통사고로 더 끔찍하게 죽는다면 오늘 계곡에서 죽는거에 안타까움을 느끼는거보단 안도를 느끼는게 맞는거 아닐까 출생을 도박으로 비유하던데 살아가는거도 도박에 불과하다는 의문이 생김 그리고 자아상실을 매우나쁨의로 보기보다 더이상 고통받지않는 좋은 상태로 보지않을 근거가 필요해보임
지금 죽으면 당장 100%로 온갖 가치 있는 것들을 모두 박탈 당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리스크 속에서, 그러한 끔찍한 일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살아보는 게 일반적인 실존적 선택이다. 물론 자기가 실존적으로 다른 선택을 하겠다면, 누가 말릴 수 있겠나? 다만 고통도 피해야 할 <나쁨>이지만, 자아상실도 고통과는 별개의 나쁨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거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아상실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겠지만. (ex.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
어느정도 이해가감 한가지 더 궁금한게
https://m.dcinside.com/board/nobirth/14901
이거에대해선
어떻게생각함?
그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설명을 했다.
https://m.dcinside.com/board/nobirth/14705
오직 행복만을 겪을 인간도 굳이 낳을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직 행복만 겪는 사람은 애초에 없으니 그거는 판단을 할필요 없다고 생각함 상대적으로 고통에 비해 행복을 더 겪은 사람을 행복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그런 사람도 태어날필요가 없다 는 결론으로는 진행이 안되냐는거임
그리고 비대칭비교를 먼저하는 경우의 이야기고 전체평가를 먼저할경우 우리에겐 (비존재에 비해) 불리한 삶을 만들지 않을 의무가 있지만, (비존재에 비해) 유리하지 삶에 대해서는 만들거나 만들지 말아야할 어떤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할수도있음
도덕적 논증에서, 비현실적 상황을 가정하고 우리가 가진 도덕적 직관과 판단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과정은 너무나 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차를 뚱뚱한 사람을 밀어넣어 막아도 되냐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도 나온 예 같은 것. 우리의 도덕적 숙고된 판단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방법이란 말이다.
그 전체 삶에 대한 평가가 바로, <오직 행복만을 겪을 사람도 낳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비대칭성으로 아주 잘 설명된다는 거다.
엄 이제 내 지적능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짐 솔직히 나 혼자 이해시킬려고 님이 이렇게 댓글 써주는것도 고마움 나중에 님이 시간될때 님이 하고싶을때 요시자와 후미타케의 비판 관련 설명을 다시 해주면 좋겠음 방금 올린글은 비대칭적 비교를 먼저하는 경우의 한 사례만 반박한 글같음 요시자와가 주장하는 간극 비대칭적 비교를 먼저하는 경우와 전체 평가를 먼저하는
경우 하나하나씩은 반박이 되지만 하나를 반박하는 근거를 들면 나머지 하나의 반박에서 모순이 생긴다는 주장이라 이에 반박을 재대로 설명이 되는 글로 설명해주었으면 좋겠음 부족해서 너무 질문만하는거같아서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