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부모에 대한 미움이나 출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반영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위 문장이 지니는 어색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를 침착하게 따져보고자 글을 써본다.


우리가 통상 고맙다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는 상대방이 내 요청을 올바르게 들어주었거나 더 느슨하게는, 요청한적 없더라도 사회통념상 수혜자에게 이득임이 명백한 경우이다.

전자는 너무나도 명백할 것이다
다만 후자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해보인다.


가령 누군가가 나에게 아무런 대가없이 1억을 거부하지 못하게 억지로 손에 쥐어준다고 해서 고마움이 꼭 따라오진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을 받을 당사자에게 불편할 수 있다.

이러한 직관은 어떤 행위가 단순히 그것의 수혜자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만으론 고마움이란 문턱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당사자가 거부해버리면 1억이든 100억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낳아주는 것은 전자와 후자중 어디에 속하는가?
전자에 속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낳아주길 요청할 수는 없다.
요청할려면 이미 낳아졌어야 한다.
후자에 속함을 보이려면 우선 삶을 시작하는 것이 사회통념상 명백히 이득이 된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진화적 산물에 의해 그러한 충분조건을 획득했다치더라도 위에서 말한 직관은 여전히 문제를 남긴다.

출산행위를 요청한 당사자가 마치 있었던 것처럼 언어를 사용할거면

어째서 출산행위를 거부할 수도 있었던 것처럼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논박하는 것엔 그토록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출산사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