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를 다듬고 내 믿음을 강화시키고 싶어서 나름 따져보고 있는데 아직 완벽하게 이해를 못한 것 같다. 반론자들의 반박도 그렇고.
고민이 많다
댓글 37
어떤 면에서?
익명(211.202)2023-06-22 15:02:00
답글
쾌락의 부재는 그것이 박탈을 포함하지 않는 경우 나쁘지 않다
를 나 스스로가 잘못이해하고 있는거 같아서.
이건 뭐 당사자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흐음;;
익명(7lk090jrz9vu)2023-06-22 16:02:00
답글
삶의 질 논변도 그렇고 잘 모르것다
익명(7lk090jrz9vu)2023-06-22 16:29:00
답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면 행복을 빼앗길 수 없기에 좋을 것은 없지만 나쁠 것도 없다.
우리는 타인의 쾌락 박탈 강요(고통 강요)를 피하려고 노력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따라서 비출산은 도덕적 의무일 가능성이 있다. 반면 행복을 강요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출산은 의무가 아니다.
삶의 질 논변은 사람들이 낙관 편향 등 심리학적 요인으로 인해 간과하게 되는 인생의 심각성, 즉 인생에는 결코 사소하지 않고 충분히 고려해야만 하는 수준의 고통, 해악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그러한 인생 강요의 심각성을 드러내려는 논변이다.
Gnostic(gnostic)2023-06-26 16:27:00
답글
만약 베너타의 비대칭성 논증이 옳다면 굳이 삶의 질 논변을 꺼낼 필요가 있나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항상 낫다면 그 고통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말씀하셨듯이 고통의 규모에 대한 환기가 목적이라면 만약 삶의 질 논변이 옳지 않더라도 그의 논증은 그때에도 타당한가요?
익명(7lk090jrz9vu)2023-06-26 19:19:00
답글
삶의 질 논증은 고락의 비대칭성 논증에 비하면 부차적이고 보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삶의 질 논증은 고락의 비대칭성에서 드러낸 존재의 해악이, 심각/중대/다대한 해악임을 드러내기 위한 논증이다. 만약 사소한 해악이라면 그쯤이야 무시해도 괜찮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Gnostic(gnostic)2023-06-27 09:29:00
답글
우리는 이미 태어난 상태고, 우리의 삶을 토대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개인이 스스로 행하는 삶의 질 평가의 부정확성을 지적하는 등의 방식이 '취향 저격(?)'식으로 유효할 수 있을 것이다.
Gnostic(gnostic)2023-06-27 09:35:00
나도 책은 안 봐서 잘 모르겠네. 단지 쾌락과 고통의 존재, 부재에 관한 내용은 절대적으로 이게 딱 정답이다. 라고 판단 내릴 수 없는 것 같음. 베너타는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지만 고통의 존재는 나쁘다고 하지만 누군가한테는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까.. 워낙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고 다만 평균치로 볼 때는 베너타의 논증이 맞겠지.
익명(211.202)2023-06-22 16:41:00
답글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쾌락이 내재적으로 좋다고 말하는건가?
익명(7lk090jrz9vu)2023-06-22 16:45:00
답글
그렇지
익명(211.202)2023-06-22 23:35:00
답글
공리주의자에게는 쾌락의 부재가 악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쾌락의 부재에 대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본다는 것을 사람들의 일상 행동, 여러 비대칭성 사례로 알 수 있다. 고락의 비대칭성을 반박하기 위해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보통은 반사적인 반박으로 가치 문제에 대한 숙고 없이 쾌락의 부재가 나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내뱉거나, 그저 자각을 못할 뿐 일상 행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보통일 것이다.
Gnostic(gnostic)2023-06-26 15:50:00
제일 중요한 논지는 결국 인간의 삶을 쾌락(좋음) 고통(나쁨) 두가지 척도로만 판단했을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쾌락의 박탈보다는 고통의 방지를 더 중요시 한다는거고 이 논리면 아이를 낳지 않는게 논리적으로 옳다는거지. 문제는 밑바탕에 있는 쾌락의 박탈<<<고통의 방지 이 공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난 그렇게 생각안하는데? 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긴 함 - dc App
익명(xldnjsrof)2023-06-22 17:18:00
답글
쾌락과 고통이 가치론적 의미이므로 무엇이 쾌락이고 고통인지에 관한 기준을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각자들에게 개념적으로 둘 중 하나로 나뉠 수 있기만 하면 족하다.
이건 맞냐???
익명(7lk090jrz9vu)2023-06-22 18:23:00
답글
비존재시 쾌락은 "박탈"될 수 없다. 존재로부터 쾌락 "박탈"은 곧 고통이며 악이다.
Gnostic(gnostic)2023-06-26 15:52:00
답글
엄밀하게 말하면 쾌락(좋음)을 느낄 기회지 - dc App
익명(xldnjsrof)2023-06-26 16:26:00
답글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태어나게 하여 쾌락을 경험할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면, 우리는 출산의 의무가 생기고, 24시간 아기공장을 돌리지 않은 것은 그랬다면 태어날 수 있었던 누군가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설령 24시간 인공자궁공장을 돌리고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하루에 100억 명씩 생산해내더라도, 그 순간 그로 인해, 난자나 인공자궁 자리가 꽉 차서 수정될 기회를 놓친 무한한 누군가에 대해서 의무를 위반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렇게 어떤 최선의 선택을 하더라도 그 순간 반드시 의무를 위반하게 되는 의무는 실천적 가치가 없다.
Gnostic(gnostic)2023-06-26 16:38:00
답글
"쾌락과 고통이 가치론적 의미이므로~" 이에 대해서 내가 질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가치론적"이라는 것은 "도덕적 직관에 의한", 또는 "직관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정도의 의미로 생각된다. 예컨대 논리적으로는 쾌락의 부재가 좋다고 해도 나쁘다고 해도 상관 없지만, 그것을 지지할 만한 도덕적 직관(예컨대 황금률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동의하거나, 최소한 합당하게 거부하지 못하면서 일상 언행에서 추출할 만한 직관일수록 강력할 것이다.)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가치론적으로" 그런 주장은 딱히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Gnostic(gnostic)2023-06-26 16:50:00
그러니까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 논증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익명(211.117)2023-06-22 21:41:00
답글
엉.....
익명(7lk090jrz9vu)2023-06-22 22:56:00
답글
1. A 라는 사람이 있다고 칠 때: 고통, 쾌락 존재함
2. A 라는 사람이 없다고 칠 때: 고통, 쾌락 없음
1번과 달리 2번은 고통이 없잖아? 그러니까 2번이 우위점을 갖는다. 하지만 쾌락은 2번에서 박탈되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1번이 그것으로 우위점을 갖지는 않는다.
익명(211.117)2023-06-23 07:37:00
답글
즉, 비대칭성이 생기지
이해돼?
익명(211.117)2023-06-23 07:37:00
답글
2번이 더 나은건 알겠는데 2번이 낫다고 말하는게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르겠다.
2번을 누릴 사람조차 없다면 2번이 왜 좋다고 평가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존재할 수도 있는 그 사람의 이익에 준거해서 이해해야한다고 하는데 난 그 이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익명(7lk090jrz9vu)2023-06-23 12:15:00
답글
가령 도심 한복판서 공사 중인 빌딩에서 철골이 떨어졌는데, 마침 근처에 행인이 없어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고 치자. 가능했던 피해 당사자가 전혀 없으므로 행운에 기뻐하거나 감사할 존재도 없지만, 일반적으로 이것은 다행한 일이며, 좋은 일으로 취급된다. 안전 사고 예방은 의무거나 최소한 선행이다. 잠재적이고 불특정한 피해자 발생이 예방된 것은, 고통의 부재는 그 자체로 좋다는 것이다.
사고실험으로 오로지 의사능력만을 가진 돌멩이에게 인간처럼 존재하길 권할만한가? 나는 베너타의 비대칭성을 이런 사고실험처럼 이해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억지로라도 가상적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끼리 논해지는 통상의 도덕적 논의들을 어떻게 출산사안에 자연스럽게 적용시킬 수 있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익명(7lk090jrz9vu)2023-06-26 19:55:00
답글
가령 누군가가 ‘나는 태어나서 해를 입었다‘ 고 말했다고 하자.
언어사용에 집요한 누군가는 해를 입었다고 말할려면 해를 입을 누군가가 이미 존재했어야하고 우린 항상 그렇게 사용해왔다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언어사용이 원하고자 하는 결론으로 편향시킨다고 지적할 수 있어보인다.
이런 지적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이런 사고실험처럼 이해하고 있다.
익명(7lk090jrz9vu)2023-06-26 20:02:00
답글
나의 이러한 이해가 베너타의 견해를 올바르게 이해한 것인지가의심스럽다. 돌멩이를 생각한 것은 파딱이 말했듯이 귀신이나 영혼같은 존재를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출산사안이 가지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이해의 용이함을 돕기 위해 설정한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사안을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익명(7lk090jrz9vu)2023-06-26 20:10:00
답글
돌멩이를 비존재와 가장 유사하게 다룸으로써 난 베너타의 견해를 이해했다. 불필요한 사고의 징검다리라 보일 수도 있겠다. 내가 전문적으로 철학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 것일 수 있다. 만약 이런 이해가 아니라면 난 그의 견해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
익명(7lk090jrz9vu)2023-06-26 20:30:00
답글
무가 그러하듯이, 이미 실존하는 현존재인 우리에게 있어서 비존재/잠재적 존재/미래 세대는 어색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와 관련해서 생각이 엉키기 일쑤인 게 사실이다. (예컨대 우리는 죽음의 개념을 제대로 직시하기 어려워서, 자꾸 영혼과 사후세계를 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미래 세대의 모든 권리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여, 향후 그들이 태어나서 열악한 처지에 놓이거나 희생당하도록 유도하는 것(가령 완벽한 노예 기질로 태어나도록 유전자 조작 등)을 당연시할 것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안전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도덕적으로 안전한 선택이라 함은 그들에게 이미 존재하는 우리처럼 최소한의 어떤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Gnostic(gnostic)2023-06-27 10:00:00
답글
그리고 반출생주의는 미래 세대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만 가능하면서, 미래 세대에게 가장 완벽하게 안전한 선택인 비출산을 통해, 미래 세대의 태어나지 않을 (인간)권리를 보장하고, 그로 하여금 그들이 영원히 비존재 상태로 머물게 하여, 이미 태어나버린 탓에 만성적 권리 위협 상태에 놓이게 된 우리처럼 되는 일은 없게 해야 한다는 권리 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쾌락의 부재는 그것이 박탈을 포함하지 않는 경우 나쁘지 않다 를 나 스스로가 잘못이해하고 있는거 같아서. 이건 뭐 당사자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흐음;;
삶의 질 논변도 그렇고 잘 모르것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면 행복을 빼앗길 수 없기에 좋을 것은 없지만 나쁠 것도 없다. 우리는 타인의 쾌락 박탈 강요(고통 강요)를 피하려고 노력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따라서 비출산은 도덕적 의무일 가능성이 있다. 반면 행복을 강요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출산은 의무가 아니다. 삶의 질 논변은 사람들이 낙관 편향 등 심리학적 요인으로 인해 간과하게 되는 인생의 심각성, 즉 인생에는 결코 사소하지 않고 충분히 고려해야만 하는 수준의 고통, 해악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그러한 인생 강요의 심각성을 드러내려는 논변이다.
만약 베너타의 비대칭성 논증이 옳다면 굳이 삶의 질 논변을 꺼낼 필요가 있나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항상 낫다면 그 고통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요. 말씀하셨듯이 고통의 규모에 대한 환기가 목적이라면 만약 삶의 질 논변이 옳지 않더라도 그의 논증은 그때에도 타당한가요?
삶의 질 논증은 고락의 비대칭성 논증에 비하면 부차적이고 보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삶의 질 논증은 고락의 비대칭성에서 드러낸 존재의 해악이, 심각/중대/다대한 해악임을 드러내기 위한 논증이다. 만약 사소한 해악이라면 그쯤이야 무시해도 괜찮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미 태어난 상태고, 우리의 삶을 토대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개인이 스스로 행하는 삶의 질 평가의 부정확성을 지적하는 등의 방식이 '취향 저격(?)'식으로 유효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책은 안 봐서 잘 모르겠네. 단지 쾌락과 고통의 존재, 부재에 관한 내용은 절대적으로 이게 딱 정답이다. 라고 판단 내릴 수 없는 것 같음. 베너타는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지만 고통의 존재는 나쁘다고 하지만 누군가한테는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까.. 워낙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고 다만 평균치로 볼 때는 베너타의 논증이 맞겠지.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쾌락이 내재적으로 좋다고 말하는건가?
그렇지
공리주의자에게는 쾌락의 부재가 악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쾌락의 부재에 대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본다는 것을 사람들의 일상 행동, 여러 비대칭성 사례로 알 수 있다. 고락의 비대칭성을 반박하기 위해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보통은 반사적인 반박으로 가치 문제에 대한 숙고 없이 쾌락의 부재가 나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내뱉거나, 그저 자각을 못할 뿐 일상 행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보통일 것이다.
제일 중요한 논지는 결국 인간의 삶을 쾌락(좋음) 고통(나쁨) 두가지 척도로만 판단했을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쾌락의 박탈보다는 고통의 방지를 더 중요시 한다는거고 이 논리면 아이를 낳지 않는게 논리적으로 옳다는거지. 문제는 밑바탕에 있는 쾌락의 박탈<<<고통의 방지 이 공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난 그렇게 생각안하는데? 라고 말할 수 있는 문제긴 함 - dc App
쾌락과 고통이 가치론적 의미이므로 무엇이 쾌락이고 고통인지에 관한 기준을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각자들에게 개념적으로 둘 중 하나로 나뉠 수 있기만 하면 족하다. 이건 맞냐???
비존재시 쾌락은 "박탈"될 수 없다. 존재로부터 쾌락 "박탈"은 곧 고통이며 악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쾌락(좋음)을 느낄 기회지 - dc App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태어나게 하여 쾌락을 경험할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면, 우리는 출산의 의무가 생기고, 24시간 아기공장을 돌리지 않은 것은 그랬다면 태어날 수 있었던 누군가에 대한 의무를 위반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설령 24시간 인공자궁공장을 돌리고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하루에 100억 명씩 생산해내더라도, 그 순간 그로 인해, 난자나 인공자궁 자리가 꽉 차서 수정될 기회를 놓친 무한한 누군가에 대해서 의무를 위반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렇게 어떤 최선의 선택을 하더라도 그 순간 반드시 의무를 위반하게 되는 의무는 실천적 가치가 없다.
"쾌락과 고통이 가치론적 의미이므로~" 이에 대해서 내가 질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가치론적"이라는 것은 "도덕적 직관에 의한", 또는 "직관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정도의 의미로 생각된다. 예컨대 논리적으로는 쾌락의 부재가 좋다고 해도 나쁘다고 해도 상관 없지만, 그것을 지지할 만한 도덕적 직관(예컨대 황금률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동의하거나, 최소한 합당하게 거부하지 못하면서 일상 언행에서 추출할 만한 직관일수록 강력할 것이다.)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가치론적으로" 그런 주장은 딱히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 논증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엉.....
1. A 라는 사람이 있다고 칠 때: 고통, 쾌락 존재함 2. A 라는 사람이 없다고 칠 때: 고통, 쾌락 없음 1번과 달리 2번은 고통이 없잖아? 그러니까 2번이 우위점을 갖는다. 하지만 쾌락은 2번에서 박탈되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1번이 그것으로 우위점을 갖지는 않는다.
즉, 비대칭성이 생기지 이해돼?
2번이 더 나은건 알겠는데 2번이 낫다고 말하는게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르겠다. 2번을 누릴 사람조차 없다면 2번이 왜 좋다고 평가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존재할 수도 있는 그 사람의 이익에 준거해서 이해해야한다고 하는데 난 그 이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가령 도심 한복판서 공사 중인 빌딩에서 철골이 떨어졌는데, 마침 근처에 행인이 없어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고 치자. 가능했던 피해 당사자가 전혀 없으므로 행운에 기뻐하거나 감사할 존재도 없지만, 일반적으로 이것은 다행한 일이며, 좋은 일으로 취급된다. 안전 사고 예방은 의무거나 최소한 선행이다. 잠재적이고 불특정한 피해자 발생이 예방된 것은, 고통의 부재는 그 자체로 좋다는 것이다.
https://youtu.be/azTmEfnp5-k
https://youtu.be/fvUaV8wCKGQ
이렇게 두 영상을 보면은 도움이 될듯
빡대가리라 그런가 내가 이거 보고 더 헷갈리네
안티노미로 가는거라 그럴 수 있음
베너타는 그냥 태어날 어떤 가상적인 존재가 마치 있다고 생각하고 논리를 전개하는거 같은데 맞을까? 하먼은 그런 존재가 있는 것처럼 얘기할거면 당연히 쾌락의 부재는 나쁨이 될 수 있는거 아니냐고 반박하는거고.
https://m.dcinside.com/board/nobirth/429
https://m.dcinside.com/board/nobirth/1236
내
댓글 참고 바란다.
사고실험으로 오로지 의사능력만을 가진 돌멩이에게 인간처럼 존재하길 권할만한가? 나는 베너타의 비대칭성을 이런 사고실험처럼 이해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이해하는 이유는 억지로라도 가상적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끼리 논해지는 통상의 도덕적 논의들을 어떻게 출산사안에 자연스럽게 적용시킬 수 있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누군가가 ‘나는 태어나서 해를 입었다‘ 고 말했다고 하자. 언어사용에 집요한 누군가는 해를 입었다고 말할려면 해를 입을 누군가가 이미 존재했어야하고 우린 항상 그렇게 사용해왔다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언어사용이 원하고자 하는 결론으로 편향시킨다고 지적할 수 있어보인다. 이런 지적을 피하기 위해 나는 이런 사고실험처럼 이해하고 있다.
나의 이러한 이해가 베너타의 견해를 올바르게 이해한 것인지가의심스럽다. 돌멩이를 생각한 것은 파딱이 말했듯이 귀신이나 영혼같은 존재를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출산사안이 가지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이해의 용이함을 돕기 위해 설정한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사안을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돌멩이를 비존재와 가장 유사하게 다룸으로써 난 베너타의 견해를 이해했다. 불필요한 사고의 징검다리라 보일 수도 있겠다. 내가 전문적으로 철학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 것일 수 있다. 만약 이런 이해가 아니라면 난 그의 견해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
무가 그러하듯이, 이미 실존하는 현존재인 우리에게 있어서 비존재/잠재적 존재/미래 세대는 어색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와 관련해서 생각이 엉키기 일쑤인 게 사실이다. (예컨대 우리는 죽음의 개념을 제대로 직시하기 어려워서, 자꾸 영혼과 사후세계를 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미래 세대의 모든 권리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여, 향후 그들이 태어나서 열악한 처지에 놓이거나 희생당하도록 유도하는 것(가령 완벽한 노예 기질로 태어나도록 유전자 조작 등)을 당연시할 것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안전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도덕적으로 안전한 선택이라 함은 그들에게 이미 존재하는 우리처럼 최소한의 어떤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반출생주의는 미래 세대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만 가능하면서, 미래 세대에게 가장 완벽하게 안전한 선택인 비출산을 통해, 미래 세대의 태어나지 않을 (인간)권리를 보장하고, 그로 하여금 그들이 영원히 비존재 상태로 머물게 하여, 이미 태어나버린 탓에 만성적 권리 위협 상태에 놓이게 된 우리처럼 되는 일은 없게 해야 한다는 권리 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