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데이비드 베너타는 그의 반출생주의 논증에서 핵심 전제로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를 채택한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고통의 부재는 좋고,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는 비대칭 논증의 뼈대를 구성한다.


그래서 그런가 “반출생주의는 현실이 아닌 개념에 논리 구조를 세우며,

쾌락의 부재를 ‘나쁘지 않음’으로 임의 정의하고 있다.”는 반론이 자주 나옴


본 문서는 이 전제가 임의적 정의가 아니라 철학적으로 정당화 가능한 윤리적 판단임을

다음 네 가지 축으로 방어한다: 도덕 직관, 귀속 가능성, 규범적 일관성, 윤리이론적 정합성 보강.



2. 도덕적 직관 기반 정당화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통의 예방을 도덕적으로 칭찬하지만, 쾌락을 제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도덕적 비난을 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를 낳지 않아 즐거운 삶을 살게 하지 못한 경우는 문제 삼지 않지만, 아이를 낳아 고통을 안긴 경우는 비난 대상이 된다.

이러한 도덕 직관은 쾌락의 부재를 나쁘지 않다고 보는 윤리적 비대칭을 정당화한다.


다른 예시로 당신이 엄청나게 웃긴 개그로 남을 웃겨 '쾌락'을 줘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무를 정당화하긴 어렵지만

남을 인신공격해서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게 정당화 된다는 것을 생각해봐라.



3. 귀속 가능성(Attribution) 기준에 따른 판단

쾌락이든 고통이든, 그 가치 판단은 경험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자는 어떤 상태도 경험하지 않기에, 쾌락의 부재는 손실이 아니다.
즉, "쾌락이 없음"이라는 상태는 귀속될 대상이 없으며, 이로 인해 도덕적으로 나쁘지 않다가 된다.
반면, 고통의 부재는 명백히 좋음으로 평가된다. 이는 존재자의 고통을 피하는 것이므로 윤리적 가치를 갖는다.


4. 규범적 일관성 유지와 과잉의무 회피

만약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모든 잠재적 존재자에 대해 쾌락을 제공하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는 실행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한한 도덕적 요구를 초래한다. 베너타는 이러한 과잉의무(Overdemandingness)를 피하기 위해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는 도덕적 비대칭 원칙을 도입한다.


이 원칙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반드시 실현해야 할 의무가 고통의 예방에는 적용되지만, 쾌락의 부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직관에 기반한다.

만약 쾌락의 부재도 해악으로 간주된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무수한 생명들에게 쾌락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적 비난을 받아야 하고, 이는 실현 불가능한 윤리 체계를 낳는다. 이로 인해 베너타는 쾌락의 부재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따라서 도덕적 비난이나 책임이 귀속되지 않는 상태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윤리 판단의 과잉 요구를 회피하고, 고통 예방 중심의 도덕 판단 구조를 정당화한다.



5. 윤리 이론적 정합성 보강

소극적 공리주의에서는 고통의 최소화를 윤리적 최우선 가치로 삼고, 쾌락의 증진은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허용되지만 우선순위는 아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고통을 줄이는가"에 있으며, 쾌락이 없는 상태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음은 고통이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동시에 쾌락의 부재는 윤리적으로 무해하므로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소극적 공리주의 관점에서 베너타의 비대칭 논증은 자연스럽고 강한 정합성을 지닌다

계약주의에서는 도덕적 정당성은 특정한 원칙이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에게 이의 제기 없이 수용 가능한지에 달려 있다.
이론상, 출산을 통해 고통을 경험하게 될 존재는 명백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반면, 쾌락의 부재는 존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주체가 없다. 즉, 고통의 발생은 계약주의적으로 정당화 불가능하지만, 쾌락의 부재는 정당화 가능하다.
이는 비대칭 구조의 정당성으로 이어진다.

비반복 해악주의(non-comparative harm theory)는 해악을 판단할 때 그것이 더 나은 상태와의 비교로 인해 나쁘다고 보지 않고,
고통이나 손상 같은 내재적 특성에 근거해 해악을 규정한다. 이 관점에서 고통은 그 자체로 해악이며, 비교 대상 없이도 도덕적 문제를 유발한다.

그러나 쾌락의 부재는 아무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으며,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해악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존재 상태에서 고통이 없다는 점은 좋은 것이며, 쾌락의 부재는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이 점에서 비반복 해악주의는 베너타의 비대칭 구조와 논리적으로 일치한다.


6. 예상되는 반론들의 사전 대응

비판1: “쾌락이 없는 게 나쁘지 않다면 쾌락은 왜 중요한가?”

반박1: 베너타는 쾌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은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에게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

쾌락은 존재자에겐 좋지만, 존재자가 없으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이건 쾌락의 상대적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귀속 가능성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비판2: "반출생주의는 현실이 아닌 개념에 논리 구조를 세우며, 쾌락의 부재를 ‘나쁘지 않음’으로 임의 정의하고 있다."

반박2철학은 현대에도 여전히 비현실적 개념을 다루기도 한다 양상논리의 의미론으로 사용되는 가능세계론이 그러한 예시로
그외에도 자유의지와 결정론 등과 같은 현실에서 입증하기 어려운 성격의 주제 역시 지금까지 다뤄지고 있다.

반출생주의 역시 비존재 상태에 대한 가치 평가라는 철학적 사색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는 논리적 허점이 아니라 정상적인 철학 방법론으로 이러한 사고를 통한 고찰로 우리가 어떤 도덕적 직관을 가지고
사건을 바라보는지 드러내는 역할을 해줍니다

흔히 트롤리 딜레마로 알려진 유명한 문제도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여 개인의 목적론적 윤리관과 의무론적 윤리관을 드러내게 해주죠
롤즈의 무지의 베일과 같은 사고실험도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비개인의 사례에서는 쾌락의 부재 = 나쁘지 않음이라는 설정에 대한 이유도 위에서 여러가지로 설명했고
이를 통해서 단순한 사고에 그치는게 아니라 다른 윤리 이론을 접목하는게 가능함을 논하였습니다. 

비판3:“반출생주의는 현실에서의 고통과 쾌락을 기준으로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개념이 오염되어 논리적 철학이 성립하지 않는다.” 

반박3철학은 언제나 일상 언어를 바탕으로 개념을 조작합니다. 쾌락과 고통이라는 개념은 비록 주관적이지만, 정합적 정의 가능하며,
다양한 윤리 이론(공리주의, 계약주의 등)에서 표준적으로 사용됩니다.

‘오염된 언어’는 철학을 방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문제를 드러내고 정제하는 것이 철학이다.


철학에서 언어의 ‘오염’은 철학적 논증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철학의 출발점이자 대상이다.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철학의 역할을 “언어가 일으킨 혼란을 해소하는 것”이라 보며,

쾌락, 고통, 의미와 같은 일상 개념들이 문맥 없이 추상화될 때 혼란이 생긴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언어 게임’ 개념을 도입하고, 개념은 그 쓰임 속에서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오염된 언어는 철학이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분석의 출발점이다.


마찬가지로 푸코는 ‘담론’ 개념을 통해 개념의 정의와 용법이 역사적 맥락, 권력 관계에 따라 구성된다고 분석하며,
개념의 사회적 생산성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 철학의 과제임을 밝혔다.

즉, 철학은 오염된 언어를 도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작업을 통해 개념을 재구성하고 정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쾌락이나 고통 개념이 현실적 감정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쓸 수 없다”는 주장은 철학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오해이다.
오히려 그런 모호성과 중첩, 언어적 불확정성 자체가 철학의 분석 대상이자 작업 영역이다.

비판4: “사람마다 쾌고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반출생주의는 윤리학적으로도 애매하다.”

반박4: 관성은 윤리학의 전제가 아니라, 숙제입니다.

모든 윤리학은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을 안고도 정당화 가능성, 이성적 설득 가능성을 추구합니다.
윤리학은 ‘모든 이가 동의해야 성립’이 아니라, 도덕적 직관이 충분한 수의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지로 판단됩니다

반출생주의도 공리주의/계약주의 등 다양한 윤리 체계에서 정당화 가능한 논증이 존재합니다
철저한 분석 가능성 존재하며, 오히려 “고통의 부재가 해의 예방”이라는 직관은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비판5“반출생주의자들은 인터넷에서 반박 자료를 애써 무시한다.”

반박5이건 논증이 아니라 인신공격(ad hominem)입니다.
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건 이론 그 자체의 정합성이지,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인터넷 행동양식이 아닙니다.

비판6“윤리학은 맞고 틀린 게 없는데, 반출생주의는 자기 정당화만 한다.”

반박6: 윤리학에 ‘정답’이 없다는 것은 “무분별한 상대주의”를 허용한다는 뜻이 아님.
옳고 그름의 기준은 논증력, 정당화 가능성, 일관성, 귀결 분석 등을 통해 충분히 평가받습니다.


비판7: "쾌락의 부재도 손실이다"


반박7: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는 손실 개념 자체가 귀속 불가능함


비판8: "쾌락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반론8: 쾌락의 중요성 부정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개인은 귀속성 조건의 부재로 인해 해악이 아닌 상태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해악이 아닌 상태라는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간의 중립적 상태' 같은걸 말하는게 아니라 

상황의 윤리적 책임이나 비난 가능성에 포함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즉, 비개인의 사례에서 쾌락의 부재는 그 자체로 나쁘지 않으며, 도덕적 손실로 간주되지 않는다


비판9: "너무 차가운 시각이다"


반론9도덕 철학은 직관 + 논리적 일관성에 기반하며 감정은 보조적 요소라고 반론 가능


비판10반출생주의는 이상사회를 제시할 수 있는가? 반출생주의는 실현 가능한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한다.

유토피아 없는 사상은 사상으로서 매력이 없다. 인류가 소멸할 경우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이며, "매드맥스"와 같은 디스토피아를 야기할 수 있다.


반론10규범윤리와 정치철학은 어느정도 구분해야 합니다. 

반출생주의는 기본적으로 규범윤리의 입장입니다. 
반면 정치철학이나 정치 이데올로기는 제도 설계나 사회적 청사진을 요구합니다.

모든 윤리학 이론들이 이상사회 제시해야만 하는건 오해입니다.

의무론(칸트)도 이상사회보다는 “정언명령에 따라 행위하라”는 규칙 중심입니다.
동물권 운동도 “공장식 축산을 중단하라”는 실천 윤리이지, 구체적 이상사회를 설계하지 않습니다.
윤리적 정당화는 청사진 제시가 아니라 행위의 도덕적 정합성에 있습니다.

또한 “인류가 멸종하면 매드맥스 사회가 온다”는 식의 주장들은 사실 윤리적 딜레마를 회피하려는 방어기제에 가깝습니다
실현 가능성이 낮거나 이상적이지 않더라도, 그 사상의 핵심 논증이 타당하다면 존중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극단적이라 불쾌하다”는 것은 정서적 반발일 뿐, 철학적 반박이 아닙니다.

좀더 파고들어서 반박하자면

논증 구조의 불투명성


이 주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P1) 어떤 사상은 정당화되기 위해 실현 가능한 결과를 제시해야 한다.

(P2) 반출생주의는 실현 가능한 결과(이상사회)를 제시하지 못한다.

(C) 그러므로 반출생주의는 정당화되지 못한다.


이 구조는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다음 문제점들을 가집니다.


(P1)의 비판: "실현 가능성"은 정당성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형이상학적·규범윤리적 이론들은 실현 가능하지 않아도 정당화된다.


예시: 칸트의 정언명령 "너 자신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원할 수 있는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

이는 실현 가능한 사회 체계가 아니라, 도덕 판단의 형식 기준을 제시하는 것.


예시: 플라톤의 철인정치

'이상국가'의 철인 통치 개념은 실현 가능성보다 이상적 형식의 추구였다.

그럼에도 철학적 영향력은 막대함.


그러므로 실현 가능성은 윤리 이론의 설득력을 높일 수는 있지만, 정당화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P2)의 비판: 반출생주의는 이상사회가 아닌 비극 회피의 윤리이다

반출생주의는 "삶이 해로울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무고한 존재에게 그 해를 강제하지 말자"는 소극적 윤리 주장이다.

이는 유토피아 구현이 아니라 특정 행위의 중단을 요청하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이상사회"가 목적이 아닌, "해악의 최소화"가 목적인 것이다.


의무론 (칸트)은 이성에 기초한 보편성으로 정당화되지 이상사회를 제시해서가 아니다.

동물해방론 (피터 싱어) 동물의 쾌고 감수 능력에 따른 도덕 고려를 통한 정당화지 이상사회를 제시해서가 아니다.

청사진 없이도 행위 평가 중심의 윤리학은 가능하며, 반출생주의도 여기에 속함.


(P2)의 비판에서 소극적 윤리 주장이라는 부분만 보고 소극 공리주의로만 해석 될 수 있으니

계약주의하에서 반출생주의가 어떻게 주장될 수 있는지도 다루자면 


태어날 아이는 출산 행위에 대해 사전에 동의할 수 없다.

생명은 필수적으로 강제적이므로 “계약” 불가능한 조건에서의 피해 발생 가능성은 도덕적으로 민감하다.


그 아이는 일생을 통해 크고 작은 고통을 겪게 된다.
이 고통은 피해자인 아이 본인에게 설명이나 정당화할 수 없다.


출산의 결과로서 '고통'이 유발되는데, 그 고통은 누구에게도 사전에 정당화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출산은 정당화 불가능한 강제이다.


정당화 불가능한 행위는 계약주의 윤리에 따라 도덕적으로 비난받는다.

따라서: 출산은 계약주의 윤리 기준에서 정당화되지 않음 


이것에 대한 예상되는 비판들로 


비판11: “동의를 못 한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잘못은 아니다” 모든 중요한 행위가 사전 동의를 받은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교육이나 치료처럼 아이가 사전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를 위해 좋은 행위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출산도 장래의 이익을 위해 정당화 가능하지 않나?


반박11교육·치료와는 다르게, 출산은 존재 자체를 강제하며 해를 피할 수 없도록 만든다.

계약주의의 관점에서 중요한 건 단순한 동의 여부가 아니라, "사전 동의 없이 타인에게 예측 가능한 해를 가하는가?"

교육은 수정 가능하고, 해가 생기면 중단하거나 보상할 수 있지만, 생명은 되돌릴 수 없다.


출산은 되돌릴 수 없는 존재의 확정이며, 그 결정은 해를 포함할 가능성이 높고 수정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도덕적 책임이 훨씬 더 크다.


비판12“태어날 당사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 이의 제기 주체가 없다” 계약주의는 '이의 제기 가능한 자'가 있어야 성립한다.

그런데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당화 여부를 논할 대상이 없다.


반박12: 스캔론의 계약주의는 실존자만이 아니라, 가능한 존재자의 관점에서도 이의 제기를 상상할 수 있어야 도덕적 정당화가 성립한다고 본다.

예시: 태아, 미래 세대, 장애 위험이 높은 유전자 등을 고려한 재생산 윤리에서 이미 널리 적용되는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태어나지 않은 자는 판단할 수 없다”는 주장 자체가 계약주의적 사고에 어긋난다.


계약주의는 단순히 현실적 계약이 아니라,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을 법한 관점도 윤리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비판13“출산은 이득과 손해가 모두 포함된 중립적 행위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삶을 고통스럽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삶을 행복하게 느낀다.

그렇다면 출산은 해도 아니고 이득도 아닌, 단지 확률적 리스크가 있는 중립적 행위일 뿐이다.


반박13 “정당화의 핵심은 평균이 아니라 이의 제기 가능한 피해자의 존재다”

계약주의는 “전체적 평균”보다, 누군가가 정당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비난받는다고 본다.

즉, 10명 중 9명이 ‘행복하다’고 해도, 1명이 “왜 나를 만들었는가? 나는 너무 고통스럽다”고 할 수 있다면 

그 1명의 목소리가 정당화되지 못한 한, 행위 자체는 문제다. 계약주의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정당화 가능성을 요구하며,

이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다면 출산은 윤리적으로 불안정하다.


비판14“이 논리는 과도하게 엄격하다. 그럼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동의 없이는 해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면,

사실상 우리는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게 된다. 이건 윤리적 마비(paralysis)를 초래하는 과도한 규범이다.


반박14“출산은 예외적으로 중대하고 되돌릴 수 없는 행위다” 모든 윤리적 판단이 같을 필요는 없다.

계약주의는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 도덕적 정당화 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예시: 교통사고 위험을 감수하고 외출하는 것과 전 생애를 결정짓는 출산은 도덕적 무게가 전혀 다르다.


출산은 “가장 중대하고 비가역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특별한 윤리적 기준이 정당화된다.

이 논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려는 것이 아니라출산이라는 특수한 행위의 도덕적 무게를 정밀하게 따져 묻는 것이다.


비판15“스캔론은 어떤 행위는 특정한 원칙 하에서 합리적인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의 제기 가능한 사람’은 합리적인 당사자(reasonable persons)이며, 이들은 도덕적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이다.

따라서 일부 비판자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음: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자는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므로,

계약주의 기준에 따라 이의 제기 주체가 될 수 없다.” 


반박15스캔론은 실존하는 사람들만을 계약 당사자로 명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이론은 잠재적으로 영향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관점을 고려하는 윤리체계입니다.


예시: 기후 윤리 문제 —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의 이익도 스캔론적 계약주의에서 고려됩니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무권리자라고 보지 않는다는 선례가 존재합니다.


실제 스캔론도 무력하거나 표현 불가능한 존재의 입장을 대리로 고려하는 개념을 수용합니다.

예시: 유아, 식물인간, 장애인, 장래 환자 등은 당사자가 직접 이의 제기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보호되며,

그들을 대신한 판단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스캔론 계약주의의 기저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다: 사전 정당화 불가능한, 불가역적인 해악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출산은: ① 사전 동의가 불가능하며, ② 해를 포함할 가능성이 크고, ③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음

따라서 정당화가 불가능한 해악의 발생은 계약주의 윤리에 위배되며, 그 피해자의 존재 여부와는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금지 가능하다.


비판16반출생주의자는 “태어나는 것은 해롭다”고 주장하지만,정작 그 주장은 이미 태어난 사람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전제로 한 이론은 자기부정, 자기모순이다.


반론16:  이런 비판은 표현 조건(confessional condition)을 존재론적 참(ontological truth)으로 착각하고 있다.

반출생주의 주장의 표현 주체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주장의 진리값과는 무관하다.


예: “지금 말하는 이 언어는 불완전하다”는 말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지만, 그 진술은 모순이 아님.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이 표현상 존재를 전제하더라도이는 표현 구조의 조건이지, 주장 내용의 자기부정이 아님.


철학적 자기부정과 실천적 자기비판은 구분되어야 한다
반출생주의는 “존재는 해악이다” 또는 “출산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규범 명제이다.
이는 이미 태어난 사람도 충분히 인식하고 고찰할 수 있는 윤리 판단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상태로는 죽음이 낫다”거나 “내 삶은 결코 시작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판단을 못 한다면, 자살 문제, 안락사 문제, 비관주의, 염세주의, 극단적 환멸과 우울증 등도 모두 논의 불가능해진다. 이는 지나치게 표현 조건을 진리 조건과 착각한 오류이다.
실천 가능한 윤리 이론은 반드시 “행위자 중심”일 필요는 없다

반출생주의는 “앞으로의 출산은 피해야 한다”는 규범 명제이지, “이미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실천 강령이 아니다.즉, 실천 대상은 “출산이라는 행위”이지, “기존 존재자의 부정”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 삶의 부정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도덕적 반성이라는 구조다.


7. 결론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는 주장은 단순한 정의가 아니라, 도덕 직관, 귀속 가능성의 원리, 규범적 일관성의 요구,

그리고 다양한 윤리 이론의 지지에 기반한 철학적으로 정당화된 원칙이다. 이는 베너타의 비대칭 논증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며,

그 이론적 정합성과 방어 가능성은 충분하고 예상되는 16개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도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