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친죽음주의에 반출생주의는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반출생주의⊂친죽음주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친죽음주의는 자신이 선호하는 죽음을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공리주의, 출생주의와 손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친죽음주의는 반출생주의를 기본적으로 탑재하고 있는 사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반출생주의에 친죽음주의가 꼭 포함되지는 않는다.

{반출생주의⊅친죽음주의}


죽음에 대한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1. 죽음은 좋다.

예: 어떤 경우에도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나으며, 사실 더 일찍 죽을수록 해당 개인에게 좋은 일이다.

2. 죽음은 나쁘다.

예: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그나마라도 가능한 모든 좋음을 박탈한다. 따라서 죽음 역시 해악이다.

3. 죽음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예: 사람과 상황에 따라서 계속 사는 것이 더 나은 삶도, 일찍 죽는 것이 더 나은 삶도 존재할 수 있다.

4. 죽음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예: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만을 경험할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으므로, 사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서 반출생주의는 보통 2. 또는 3.을 지지한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싫고 무서운 것,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되는 해악으로 인식되기에, 그러한 죽음의 발생을 예방해야 한다는 책임론은 반출생주의 입장에서 강력한 설득 무기가 된다.

반면 1.을 지지하는 친죽음주의는 그런 무기 하나를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 되며, 왜 죽음을 선호하면서도 최대한 신속하게 자살하지 않거나 못하는지에 대한 다소 구차한 해명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소극적 공리주의는 또 다르다. 소극적 공리주의는 고전적 공리주의와 반대로 고통의 최소화를 추구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윤리 직관, 이미 여유 있는 자의 쾌락을 증폭시키고 행복한 자를 늘리는 것보다는, 보다 긴절한 자의 고통을 감쇠시키고 고통받는 자를 줄이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보는 시각에도 부합한다.

문제는 소극적 공리주의 역시 '희생 강요'로 요약되는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답습한다는 것이다. 사상의 틀대로 논리를 전개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고통을 느낄 주체가 사라져 고통이 0이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위해 어떤 과도기적 고통, 희생도 감수할 만하고, 따라서 수단 가릴 거 없이 당장 자살하거나 무차별적으로 살인하는 것도 나름대로 적절한 윤리 실천 방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 소극적 공리주의자 역시, 당장 자살자나 테러범이 될 것이 아니라면 다소 구차하고 복잡한 해명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또한 소극적 공리주의는 신속한 멸종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출생주의와도 손을 잡고 인구 과잉 같은 과도기적 희생을 빚어낼 여지가 있다.


모든 도덕윤리 사상은 나름의 어떤 실익이 있기에 주장되고 수용된다. 그렇다면 친죽음주의나 소극적 공리주의는 반출생주의를 압도할 만한 실익이 있는가? 아니면 반출생주의 이상으로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직관적으로, 논리적으로 견고하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는 것인가? 딱히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어쩌면 반출생주의와 친죽음주의가 동시에 옳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에 비해 후자가 가치론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더 높아 보이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타인을 설득할 때 반출생주의 대신 친죽음주의를 동원해야 할 실리적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안락사를 예로 들면, '모두는 최대한 빨리 안락사하는 게 그들 자신에게 낫다'라는 주장보다는, 그냥 '안락사라는 선택지 제공은 필요하다'라는 주장이 더 쉽게 수용되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같은 맥락에서, 친죽음주의가 아닌 반출생주의만으로도 사실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미 '고작' 반출생주의만으로도 충분한 거부감을 토로하지 않던가.

반출생주의의 본질은, 최대한 도덕적으로 안전한 지점만을 디뎌서, 도덕적으로 안전한 길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어떤 이기적 이유를 제한다면, 굳이 도덕적으로 위험한 지점을 디뎌야 할 합당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