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 주의.


혹시... 자신의 생애 첫 기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


아마 매우 흐릿하여 아득히 느껴지거나 단편적으로만 기억난다거나 어쩌면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이야기에 앞서 나의 생애 첫 기억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의 첫 기억은 나의 부모가 싸우는 모습을 가구 뒤에 웅쿠려 숨어 지켜보던 기억이다.


그들이 도대체 왜 싸웠는지는 그때 어린 나의 관심사가 아녔던 것 같았다.


그저 폭풍우가 자신을 피해 지나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숨 죽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튼 내 어린 시절은 그닥 유복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인터넷 썰에서 여러번 보았을 법한 유소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꽤 괜찮은 아파트에서 반지하집으로의 이사, 가정폭력, 삐뚤어진 성장 등등


지금 나의 집안 꼬라지를 어린 시절의 나는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그닥 좋은 꼴이 아니란 것을 알았는지 부모가 만약 미래에 결혼한다면 어떨 거 같냐는 질문에는 항상 결코 결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답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는 속담을 알려주며 내 말에 부정하던 사람들은 알까?


나는 오래전 유행하던 도시전설에 나오는 마법사의 전직조건을 충족하기 1년 전이다.


아무튼 유소년기를 대차게 말아먹은 내가 어쩌다 반출생주의를 알게 되었고 이를 지지하게 되었는가부터 이 보잘 것 없던 내 이야기에 장문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평균적인 현대인의 운동신경보다 월등히 운동신경이 뛰어났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간 것은 아녔지만 심마니(산삼 전문 약초꾼) 생활도 해보고 특전사에서 복무하며 공수기본과 낙하산 포장·정비 교육도 이수하였으니 나는 내 생각이 꽤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어렸을 적부터 심심찮게 재미를 보았던 운동신경 덕인지 오래 전 학대에 가까운 매질로 거식증에 비견 될 정도로 식욕이 없던 나는 어느날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멋지게 휘두르는 검술을 상상하며 나 또한 그런 기술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얻지는 못하였으나 이는 내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운동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거식증에 비견 될 정도로 식욕이 없던 이라는 부분에서 짐작했겠지만 지금도 나는 멸치에 가깝다.


그 당시엔 여자인 내 동생보다도 (아니 어쩌면 지금도) 허리가 가늘었으니 뭘 더 말하겠는가.


당연히 그 정도의 멸치 체형이면 무슨 운동을 하던 간에 심각할 정도로 힘들다.


하지만 내 동경심이 생각보다 강했던 탓인지 몇 달~몇 년에 걸친 기간 동안 꾸준히 운동을 하였었는데 이 시기에 나는 지금의 나를 만든 한 가지의 기본적인 명제? 신조?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고통스러워야 한다. 고통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죽는다.


1. 인간은 성장해야만 한다.

2. 일정한 성장에는 그에 상당한 고통이 수반된다.

3. 고통스러운 것은 싫으나 성장하지 않으면 인간은 도태된다.(붉은 여왕의 역설)

4. 도태되면 야생에선 죽는다.

5. 인간은 원래 야생에서 살았으니 도태 = 죽음이라 봄은 타당하다.

6. 즉 살아감 = 성장을 지속함 = 고통 속에 살아감

7. 인간은 고통스러워야만 한다.


음...지금에 와서 보니 그 당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알만하다.


아마 그랬기에 나는 초월자가 되기를 바랬다.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와도 비슷하면서도 살짝 결이 다른 느낌인데 설명의 편의상 위버멘시를 바랬다고 하겠다.


물론 그 당시엔 위버멘쉬가 뭔지도 반출생이 뭔지도 몰랐기에 당연히 자신의 생각에 대한 철학적인 자각은 없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이었다.


내 인생과 사상에 있어 큰 영역을 형성한 사건이자 인간성에 대해 완전한 혐오감을 가지게 된 계기가 생겼다.


다들 2018년에 일어난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을 기억하는가?


요약하자면 pc방 알바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자신의 동생과 함께 알바생에게 수 십 방의 칼침을 놓아 살해한 사건인데 그 당시 페미니즘 등의 이슈로 뉴스가 투기장이나 다름 없던 상태라 나름 재미있게 보던 나였기에 그 사건을 보도한 뉴스의 댓글창 또한 보게 되었는데 이게 그 계기다.


독자들이 느끼기에 그러한 반인륜적인 범행을 저지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올바를까?


나가 죽어라? 감옥에서 평생 썩어라? 사형 집행 왜 안하냐? 등등의 분노에 의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이야기?


피해자에게 평생 속죄하라? 남은 인생 뉘우치며 살아라? 등의 회개를 요구할까?


나는 이 올바름의 가치가 얼마나 허상적이고 무용한 지 그때 깨달았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련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 나온지 오래되지 않은 유튜브 커뮤니티 게시글에는 놀랍게도 아주 놀랍게도 그 살인자에 대한 옹호 댓글들의 천지였다.


불쌍하다? 누가? 피해자가? 아니, 가해자가.


어쩌다 저랬을까...ㅠㅠ? 누구를 위해 우는 건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냐. 나도 오죽했으면 저 글쓴이를 죽이고 싶었겠나.


달리는 하교버스 속에서 나는 혼자 충격을 먹은 채 멍하니 집까지 돌아왔고 그때에 드디어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이 감성으로 살아가는 입만 산 위선자들은 모두 죽어야한다."


이게 내가 반pc주의 또한 지지하게 된 이유다.


개빠, 캣맘, 맘충, 꼴페미, 조선족, 중국인, 게이, 트젠, 귀여운 동물만 보호협회, 업진살 살살 녹여먹는 채식주의자, 개는 불쌍하고 소는 안 불쌍한 개고기 반대론자. 모두 죽어 마땅하다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또한 이것이 내가 스스로 동기와 효과의사는 분노와 증오에 쩔어있을 망정 표시의사와 행동에는 최대한 이성주의로 움직이게 된 이유다.


그렇게 몇 달을 철저한 감정 배제, 이성주의로 살다보니 점점 기본적인 윤리관 또한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났는가?


그러하던 도중 문득 나 자신에게 물은 삶의 이유는 욕구 없는 삶은 무상 하며 그저 평온히 크게 기쁘지도 크게 슬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살아감이야 말로 진정 축복 받은 삶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다 또다시 한 번.


내 인생을 바꾸게 되는 사건을 맞이한다.


케장콘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가?


우스꽝스러운 윈도우 그림판 그림체에 익살스러운 캐릭터의 행위 표현으로 상당히 인기 있던 이모티콘인데 그 케장콘이라고 하는 것의 대사 중 하나인 "별님, 달님 제발 인생을 날로 먹게 해주세요"가 내 얼마 안되는 인생의 두 번째 격변이다.


충격이었다.


위의 고통과 성장에 대한 내 글을 보면 알겠지만 난 언제나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사람이었을 것이다.


만약 지금의 나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평행세계가 있다면 바로 이 케장콘을 본 나와 그렇지 않은 나일 것이다 라고 당당히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게 내가 뜬금없이 특전사를 간 이유다.


왜 특전사를 갔을까?


도대체 이 사람은 인생을 날로 먹어 치우겠다는 놈이 특전사를 왜 가려고 했을까?


내 아빠가 쌍팔년도 특전병 출신이라?


줄곧 자라면서 그런 교육을 받은 영향일까?


어쩌면 애국심 넘치는 젊은이의 투혼?


사실 그런 이유는 아녔고 장기복무에 의한(20년 이상) 연금이 주 목적이였다.


일반적인 육해공 부사관보다 많은 월급, 보다 많은 수당으로 인한 타 부사관에 비해 상대적인 경제적 여유로움, 검은 베레모 간지가 나를 불렀는데...


아쉽게도 중학교 때 싸우던 친구 눈알을 볼펜으로 찌를 뻔하고 간 정신병원 기록 덕분에 떨어졌었다.


하지만 한번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기로 한 나는 그 당시 나를 진료한 신경정신과 의사의 소견서와 성빈센트 병원 전문의의 "군 복무에 적합함"이라 적힌 소견서 까지 받아내었고 다시 지원하였으나 또 떨어졌다.


다시 지원했으나 또 떨어졌었다.


결단코 필기, 체력, 면접의 문제가 아닌 최종심사에서(여기서 떨어지면 진짜 문제 있다는 소리라고 들었다)만 여러 번을 떨궈진 나는 나와 같이 지낸 사람들은 나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 아이디어를 얻어 특전병 생활부터 해보고 그에 따라 얻어진 상급자들의 우호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군생활을 시작해야겠다 마음 먹었지만...


놀랍게도 군대에서 날 기다리던 건 내가 가지고 있던 기저질환들의 집요한 괴롭힘이었다.


피부에 문신 없이 육군 픽셀을 그려본 적 있는가?


난 있다.


피부병이 하도 심해서 붉어진 피부와 긁어 생긴 딱지와 아물지 못한 상처가 온몸에 육군 픽셀을 그릴 정도로 심했다.


자고 일어나면 긁지도 않은 부위의 더 심해진 염증에서 진물을 뱉어낸 흔적이 베개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베레모를 이루는 양모엔 딱딱히 굳은 진물이 떨어지질 않았으며 날 가르쳤던 공수교관이 날 보고 "넌 공수 어떻게 받았냐"라며 미친 놈 보는 표정을 지었을 정도니 피부병에서라면 난 어디 가서 한마디 할 자격이 있다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심한 비염과 스트레스성 대장염의 복통도 있었는데 둘 다 만만찮게 괴로웠지만 피부병이 워낙 심각했다보니 상대적으로 덜 괴로웠다.


이 고통은 영원할 것 같았지만 결국 보다 못한 중대장이 코로나로 인한 병사 외출 금지를 뚫고 나를 민간병원에 데려가며 끝났지만 말이다.


그 이후의 군생활은 그냥 부사관이 되면 어떤 역할을 수행할지 어떻게 성장해나갈지에 대한 방안을 점검하고 스스로를 단련하는 나날이였고 코로나 시국인지라 원기옥처럼 모인 휴가(자랑하자면 간부들이 날 좋게 봤는지 포상휴가를 하도 줘서 포상휴가 최대한도에 걸릴 뻔했다.)로 배낭여행도 다녀오는 등 했지만... 불의의 사건으로 전역하고 말았다...


어쨌든 의도치 않게 고행을 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에서 기인한 반출생을 얻기에 이르른다.


"아! 나도 이렇게 괴로운데 나보다 더 괴롭게 사는데도 무지하여 괴롭다는 자각이 없어 괴로운 줄 모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떨까?"


원래도 무서운 게 없었지만 그 뒤론 거칠게 없었다.


강한 수압에 무너진 둑이 물을 콸콸 쏟아내듯 내 안에 무언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린 결론.


"온 세상에 증오와 분노, 슬픔과 고통, 악이 가득하다."


"모두 없어져 사라지는 것이야 말로 진정 옳다."


그 이후로 무슨 사건이 있었을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진 않다.


모두 없어져 사라지는 것이 옳다는 것을 결론 내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모두가 피해자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역하여 근근히 먹고 사는 월급쟁이가 되어버려 반출생에서 파생된 멸망론은 때때로 고찰하는 정도에 그쳤고 내 내면은 쉽고 빠른 은퇴를 희망하는 파이어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