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기에서 베나타의 반출생주의가 적어도 보편타당한 윤리 규범이 될 수는 없음을 보이려고 합니다.

1.배경

데이비드 베나타는 새롭게 존재하게 되는 존재(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항상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를 낳는건 중단되어야 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점진적 멸종에 찬성하는 도덕적 이유가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물론 철학자들은 크게 동의하지 않는 주장이지만 그럼에도 마땅한 비판이 제기되지 않고 베나타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논문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출산주의에 반대하는 글을 써보려 합니다.

2.데이비드 베나타의 주요 주장.

데이비드 베나타는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을 주요 근거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이란 쾌락의 부재는 고통이 아니지만 고통의 부재는 쾌락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혹은 공리주의에서도 나타나는 주장입니다.

베나타의 주장을 정리하겠습니다.

태어난다면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태어나지 않는다면 직접적인 쾌락은 경험하지 못하지만 고통또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낫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의무인 고통받는 사람을 피하게 해줄 의무는 존재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게할 의무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을 누리게될 새로운 아이를 낳는건 막아야할 행위라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베나타는 2020년 논문에서 피터싱어의 주장을 이용해서 부유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막을 의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은 고통받는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이 자손을 낳는걸 막을 의무가 있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런 주장이 터무니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면 말이죠.

베나타는 이런 말을 예상하고 주장을 펼칩니다.

'인간의 삶이 결코 시작할 가치가 없다고 단언하는것이 반드시 삶이 시작되고 나서 자살같은 행위를 원하는건 아니다'를 반복합니다.

3.베나타는 앞에서 살펴본 내용처럼 근본적으로 '비대칭성'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비대칭성은 취약한 부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베나타는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서는 선과 악 사이의 비대칭성(최초의 근거)을 논리적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베나타는 자신이 공리론적이라는 주장만 반복합니다.

그의 실수중 하나는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이 수용된다면 사실상 이익과 해로움인 더 넓은 수준으로 확대 해석이 가능하다고 암묵적으로 믿는것 입니다.

또다른 분명한 실수는 인식론적 실수 입니다. 과학에서(대표적으로 물리학) 더 많은 현상을 설명하는게 가능함은 좋은 논거가 되겠지만 윤리학에서는 단지 그것만으로 좋은 논거라고 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베나타는 자신의 논증이 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논증이라고 주장합니다.

베네타의 4가지 비대칭성은 논증적으로 제시된것이 아닌 널리 퍼져있다고 가정한 직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철학자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직관을 가정하는데 다소 성급함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nahmias, Morris & Nadelholfer [20]참조-

다소 성급하게 설정된 일반 사람들의 직관에 대한 가정을 기반으로 하는 논증이 과연 타당할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베네타는 자신의 논증이 많은 종류의 현상을 설명하는게 가능하기 때문에 좋은 논거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앞에서 말했듯 그러한 논거는 윤리학에서는 많은 고려가 필요한 주장입니다. 이걸 한번 자세히 보겠습니다.

두 형사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때 A형사는 두명의 범인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B형사는 제3자라고 말합니다. 이때 단순하고 더 많은 설명이 가능한 B의 결론이 더 좋다고 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가정에 반대할 여지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또다른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헤겔의 체계를 생각해본다면 헤겔은 도식적인 구조를 이용해서 많은 이론적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철학에서 종교까지 설명하는 체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체계는 요즘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제가 이 두가지 예시에서 전하고자 하는 부분은 윤리, 혹은 철학적 부분에서는 단지 더 많은 현상을 설명하는게 가능함이 곧 좋은 설명인것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베나타가 주장하는 자신의 논증은 많은 현상을 설명하기 때문에 좋은 논증이라는 말은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입니다.

또한 베나타의 논증은 삶의 질에대한 평가를 신뢰할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긍정적인 기억 편향과 적응의 관련성을 강조합니다.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에 대한 부분은 이 카페에 저보다 훌륭한 설명을 제공해주실 분이 계시죠-

우리 삶에서 부정적인 날은 다음날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결혼생활 등에서 부정적인 사건은 긍정적인 사건보다 더 많은 일을 발생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나타가 주장하는 긍정적 기억 편향에 대해서는 수용하기 힘들듯 합니다.

정리하자면 기억은 베나타가 주장하는것 처럼 그렇게 단순한것이 아니며 우리 뇌가 맹목적으로 낙관주의에 치우친 방식으로 작동하는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나타가 주장하는 '우리 기억에 의존한 삶의 질에대한 평가는 신뢰할수 없다'는 그다지 타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심리적으로 나쁜것이 좋은것보다 더욱 강하게 기억에 남는것은 부정적인 사건이 많기 때문이 아닌 적응의 산물로 간주할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분명히 부정적인 경험이 널리 퍼진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삶의 질이 긍정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확인 가능한 부분은 분명히 부정적인 경험이 존재하지만 어쩌면 그것 이상으로 많은 부분의 긍정적인 경험이 존재한다는 부분 입니다.

+베나타가 주장하는 심리학적 근거들을 연구한 심리학자들은 베나타의 그런 주장에 그다지 동의하는듯 하지는 않습니다.(어쩌면 반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베나타의 두번째 주장에 해당하는 '존재하는것은 다대한 고통이다(해롭다)'는 타당한 증거를 제시했다고 보기 보다는 심리학적 비관론에 기반을 둔다고 해석할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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