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주관적 근거들은

낙천주의자들에 의해 쉽게 반박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살지 마라! 고통 속에서도 행복이 있다! 등)

물론 터무니없고 비논리적인 반박이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반박에 쉽게 선동 당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최대한 건조하고 감정을 배제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철학적 근거죠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베너타의 비대칭성 논증이 있습니다.

간략히 설명드리자면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쾌락과 고통을 비교할 때는

비대칭성이 적용되어 항상 존재하는 것이 손해라는 이론입니다. 즉 태어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손해이며

따라서 아이를 낳는 것은 그 아이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모든 경우에 해당됩니다.

흔히 말하는 금수저 존잘의 경우에도 태어나는 것은 손해입니다. '금수저 존잘이라도 인생이 무조건 순탄하진 않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냐?'

등의 논지가 아닙니다.

오로지 행복으로 점철된 삶이라도

아주 미세한 고통이 있다면(필연적으로 죽기 때문에 있을 수밖에 없죠)

태어나는 것은 손해입니다.

아주 미세한 고통이라도 없다면? 손해도 이익도 아니죠

이 논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베너타는 한 예시를 듭니다.

S(아픈 이)와 H(건강한 이) 유비입니다. S(아픈 이)는 정기적으로 질병을 겪는 몸을 갖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매우 빨리 회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H(건강한 이)는 빨리 회복하는 능력은 없지만

결코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베너타는 S를 존재에, H를 비존재에 대응시킵니다.

그리고 회복능력을 쾌락에, 질병을 고통에 대응시키죠 S와 H를 쾌락(회복 능력)의 측면에서 비교하면

우위를 가릴 수 없습니다.

S에게 회복 능력이 있다는 것이 좋은 점이긴 하지만 애초에 H는 병에 걸릴 일이 없는데

회복 능력이 없다는 게 H에게 나쁘다고 볼 수 없죠 반면 S와 H를 고통(질병)의 측면에서 비교하면 H가 낫습니다.

빨리 회복하는 것보단 그냥 병에 안 걸리는 게 낫죠. 저는 이러한 유비를 욕구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더 이해가 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S(태어난 사람)는 욕구 충족의 필요성을 느끼며

욕구를 충족하면 쾌락을, 충족하지 못하면 고통을 느낍니다. H(태어나지 않은 사람)는 욕구 충족의 필요성이 없습니다. S와 H를 쾌락(욕구 충족)의 측면에서 비교하면

우위를 가릴 수 없습니다.

S에게 욕구를 충족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애초에 H는 욕구를 충족한 필요성이 없기 때문에

둘 간의 우위를 가릴 순 없죠. S와 H를 고통(욕구 미 충족)의 측면에서 비교하면

H가 낫습니다.

S는 욕구를 충족하지 못해서 고통을 느끼지만 H는 그럴 일이 없죠. 결과적으로 태어난 사람과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비교하면

쾌락의 측면에서 우위를 가릴 수 없고

고통의 측면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낫습니다. 즉 태어나는 것은 고통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을 경우

항상 손해라는 결론이 나오죠.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데이비드 베너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이러한 철학적 근거는 매우 강력합니다.

전문적인 철학자에 의해 다뤄졌기에

신뢰성도 높고 무작정 조리돌림 당할 염려도 적습니다. 낙천주의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근거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