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윤리는 윤리 자체에 대해 메타적(자기지시적)으로 접근한다. 예컨대 도덕윤리는 무엇인가? 도덕윤리는 실재하는가? 시비와 선악은 무엇인가? 그것이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따위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메타윤리에 천착하는 것은, 그러는 것만으로는 당장 직면한 일상의 윤리 문제에 대해서 마땅한 윤리적 행동 지침을 제시할 수 없고, 오히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돈만을 가중시키게 된다.
비유하자면, '지식'의 정의에 대한 탐구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당장 어떤 지식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런데 '지식'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평생 해결되지 않을 본질적 의문만 붙잡고 사유한다 한들, 실질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타윤리적 논의는 별개로 계속 진행하더라도, 당장 실천적 의미를 갖는, 이미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적 직관에서 윤리적 행동 지침을 추출할 수 있는 실천윤리가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도덕윤리는 허상이고, 상대적이거나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치자. 그런 메타윤리적 주장만으로는 새로 제시되거나 기존에서 수정될 행동 지침이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윤리 원칙을 준수하거나 반대로 무시해야 한다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반출생주의 같읃 것을 반박한답시고 자기도 모르게 저런 메타윤리적 주장을 근거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반대 주장부터 상대적이거나 무의미한 주장으로 만들 뿐이며, 반출생주의 반대에 집착할 이유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자승자박이 되고 만다.
반출생주의는 실천윤리에 해당되며, 대부분이 동의하는 도덕직관을 따랐을 때 도출되는 도덕판단이다. 이에 대해서 메타윤리나 사실판단처럼 접근하는 것은 오독이거나 사전지식 부족에 의한 실수에 해당될 것이다.
반출생주의는 결국 "고통의 부재는 좋고,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라는 도덕직관에 의존한다. 이에 대해 꼭 그렇다는 보장은 없지 않느냐라고 지적할 수 있고, "고통도 좋을 수 있고 쾌락의 부재도 나쁠 수도 있다" 같은 식으로 바꿔서 주장하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실천윤리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여러 도덕직관에서 더 포괄적이고 환원적인 도덕직관을 추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했을 때 가장 그럴 듯한 행동 지침을 가치론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 수준으로 물타기되는 것이 아니라, 반출생주의에 도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도덕직관을 반출생주의에 반하는 쪽으로 그럴 듯하게 짜맞추고 해명해야 비로소 해당 반박이 가치론적으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ㅊㅊ
연민의 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