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곧잘
돌을 보고 '죽었다'고 한다.
글쎄,
돌이 죽었나?
어른들은 이게 어색한 표현이라는 것을 금방 느낀다.
그리고 대체 뭐가 문제냐는 아이를 상대로 설명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그 이유가 선뜻 떠오르지는 않는다.
왜 돌을 보고 '죽었다'라고 표현하면 안 되는가?
그것은
돌은 한 번도 '살아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죽었다'라는 표현은 오직 '살아있었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만 성립이 가능하다.
생각해보자.
산 적이 없다면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죽는다.
왜 죽는가?
그건 '나'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 태어난 것인가?
정자와 난자가 만났을 때? 처음 세포분열을 했을 때?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그것도 아니면 최초의 기억이 생겨난 시점에서?
태어남이란 이와 같이 매우 불분명한 개념이다.
언제부터를 인간의 탄생으로 봐야 하는지
그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지금도 정계에서는 낙태법을 가지고 왈가왈부 싸우는 것이다.
왜 불분명한가?
태어남이 그저 우리의 주관적 정의(定義)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작위적 분별이다.
우리 모두는 사실 무의식 깊숙이 느끼고 있다.
바로 '나'가 언제 시작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점을.
태어남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다.
태어남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법적 정의를 하자면 엄마 뱃속에서 나온 시점을 태어난 시점으로 보는 게 맞는 거 같음
'나'도 나라는 어떤 질서일 뿐, 모호한 건 마찬가지다. 철학적 개념은 대부분 모호하다. 그렇지 않은 개념은 대부분 과학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모호함에 기대서 고르기아스식 허무주의 논변을 해선 안 된다. 그건 이미 소크라테스 시절에 논파된 것이다. 그건 모호한 주장 스스로를 허무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존재한다'라는 개념은 공리로 간주하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