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승 반출생주의와 대승 반출생주의
불교를 구분할 때 흔히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소승 불교는 개인의 해탈과 깨달음을 중시하고, 반대로 대승 불교는 불교의 전파를 통한 중생(대중)들의 구제를 중요하게 여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반출생주의도 소승 반출생주의와 대승 반출생주의로 구분지을 수 있을 것이다. 소승 반출생주의는 자기 자신만 출산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입장이고, 대승 반출생주의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출산을 하지 않도록 반출생주의를 전파하여 이들을 계몽함으로써 낳음당함으로부터 아이들을 구제하자는 입장이다.
난 개인적으로 대승 반출생주의에 속한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의 출산율이 0.5 아래로 내려가는데 기여하고 싶고, 둘째, 한국, 그리고 지구에서 낳음당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덜 생기는 게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셋째, 반출생주의가 널리 퍼져야 반출생주의가 탄압받을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반출생주의가 소수 의견으로 남는다면 다수에 의한 탄압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지배이기 때문에 다수가 언제든지 소수를 탄압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한국같이 개인의 자유가 존중받지 않는 나라에서는.
물론 소승 반출생주의자들도 이 갤러리에서 활동할 수 있다. 난 소승 반출생주의자들을 이해한다. 타인을 설득하는 건 매우 번거로운 일이고 말싸움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만 출산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타인에게 출산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건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며, 글을 조리있게 잘 쓰십니다. 역사적 사료로서, 원시 불교를 본격 이론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초기 대승불의 소박한 이념 또한 님의 입장과 다르지 않았지요. 용수보살nagarjuna 또한 소승적(사변적:중관madhyamaka) 입장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대승관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사조이자 스승(출발점)인
싯달타의 삶의 행로가 그러했거든요. 나 홀로 깨우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슬픔의 저 만민을 구제하고 싶다. 왜냐하면 세상의 슬픔이란 것도 실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이런 대승적 이타심은 잘 계승되어 구마라습kumarajiva(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릅니다.
다만 님, 오늘날은 더 이상 부처(초월자 또는 신)의 말씀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니체 말대로 신god은 다른 것thing으로 대체되었지요. 즉 님의 말씀이 조리있고 없고를 떠나, 또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만인에게 전혀 먹혀 들지 않을 거란 우려입니다. 그 우려를, 나쁜 예감을 간직한 채 출발하옵소서.
여기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님의 입장은 이미 대외적으론 선언의 형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대승적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들(반출생주의자나 출생주의자나 꼭 같이) 삶은 함부로 장담할 수 없죠.(함부로 낙담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견고했던 어제의 믿음(ex. 종교)이 하룻밤 사이 오늘 아침엔 변절의 첩첩산중을 이루어 가며, 오늘의 형상 또한 내일이면 변질될 게 틀림없습니다. 형상의 덧없음과 인간의 변덕스러움 만큼 확실한 연역의 기초는 없습니다.
나는 지금 반출생주의의 선구자이지만 우연찮게 만난 이성에게 영혼을 빼앗겨 얼마든지 야스xes를 나눌 수 있습니다. 나눔으로는 부족하지요. 인간의 본성상 나눔은 반드시 더하기(=합)를 욕망할 것이며, 돔콘modnoc을 끼고 할 건지 말건지를 망설일 겁니다. 그녀를 정말로 사랑해서(순간적이겠지만 영원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속살까지 느끼고 싶은 나는 그녀에게
일방적 피임(경구용 알약 따위)을 강요할 수 없고(자연의 타고난 원리를 인위적으로 거스르면 반드시 신체는 탈이 나더라), 나는 그녀를 좀 더 느끼고 싶은 욕망을 끝끝내 떨쳐 버릴 수 없다면 74(정사내질)의 충동질은 이윽고 출산의 비극으로 이어질밖에요.(반출생주의자에게서 출산은 더 더욱 비극이니까.)
소승불교가 아니라 상좌부불교다
정확한 지적,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