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을 보게 만든 것, 즉, 태어나게 한 것은 전혀 은혜로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대한 해악을 끼친 짓이다.


먹고 자고 입고, 기쁨과 쾌락을 느끼는 것은 애초에 안 태어나서 그 모든 좋음들이 부재한 사태와 비교해서는 조금도 더 나은 것이 아니다.


'부모의 은혜' 같은 소리는 차로 치어서 반병신을 만든 다음 마데카솔을 발라줬다고 고마워하라는 소리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예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한 행복하고 다정한 부부가 셋째를 낳을까 말까 고민하다 셋째 이름도 철수라고 지었는데


걍 말았다고 해보자.


그 부부는 세월이 흘러, '아 철수를 낳았다면 우리 식구들 더 재밌었을 텐데'하고 자신들을 위해서 아쉬워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은 그 철수에게 무언가 아쉬운 일이 생겼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제 이러한 이치를 이용해서


"안 태어나는 게(비존재) 그리 좋으면 지금 당장 자살해서 비존재가 되지 그러냐?"라는 흔히 보이는 비아냥에도 대응할 수 있다.


애초에 안 태어나는 경우에는 부재하는 쾌락이 박탈이 되지 않지만


이미 태어나버린 자아를 가진 유정적 존재가 죽게되는 경우에는


그의 미래에 있을 쾌락의 부재가 박탈이 된다.


다시 말해, 아예 낳지도 않은 철수의 부재하는 쾌락에 대해서는 철수를 위해서 아쉬워할 수 없지만,


철수가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라 대학교 mt에서 계곡물에 빠져 죽었을 때는


그 구만리 앞길에 있을 수많은 좋음들의 부재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게 너무나 이치에 맞는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안 태어남으로써 비존재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미 태어나버린 존재가 죽게 되는 것을 꺼리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안 태어나서 쾌락이 없는 사태는 태어나서 쾌락이 있는 사태보다 더 나쁘지 않다>는 명제는 우리의 도덕 체계의 핵심적인 원리다.


한편 <태어나지 않아서 고통이 없는 사태는 태어나서 고통이 있는 사태보다 더 낫다>는 명제 또한 우리의 도덕 체계의 핵심적 원리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오직 끔찍한 고통만 겪다가 한달만에 죽어버리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기계를 작동시켜서,


그 기계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인간들을 태어나게 만드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안 태어나서 쾌락이 없는 사태는 태어나서 쾌락이 있는 사태보다 더 나쁘지 않은 한편


안 태어나서 고통이 없는 사태는 태어나서 고통이 있는 사태보다 더 낫기 때문에


안 태어나는 게 태어나는 것보다 언제나 더 낫다.


따라서 애초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온갖 아쉬움을 유발하고 그 중 몇 개만 해소해준 부모에게 자식이 진 빚은 단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부모에게, 좋은 것은 단 하나도 안 주고 오로지 나쁜 것들만 준 그 부모에게 최선을 다해 피해 회복을 도울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