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을 보게 만든 것, 즉, 태어나게 한 것은 전혀 은혜로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대한 해악을 끼친 짓이다.
먹고 자고 입고, 기쁨과 쾌락을 느끼는 것은 애초에 안 태어나서 그 모든 좋음들이 부재한 사태와 비교해서는 조금도 더 나은 것이 아니다.
'부모의 은혜' 같은 소리는 차로 치어서 반병신을 만든 다음 마데카솔을 발라줬다고 고마워하라는 소리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예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한 행복하고 다정한 부부가 셋째를 낳을까 말까 고민하다 셋째 이름도 철수라고 지었는데
걍 말았다고 해보자.
그 부부는 세월이 흘러, '아 철수를 낳았다면 우리 식구들 더 재밌었을 텐데'하고 자신들을 위해서 아쉬워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은 그 철수에게 무언가 아쉬운 일이 생겼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제 이러한 이치를 이용해서
"안 태어나는 게(비존재) 그리 좋으면 지금 당장 자살해서 비존재가 되지 그러냐?"라는 흔히 보이는 비아냥에도 대응할 수 있다.
애초에 안 태어나는 경우에는 부재하는 쾌락이 박탈이 되지 않지만
이미 태어나버린 자아를 가진 유정적 존재가 죽게되는 경우에는
그의 미래에 있을 쾌락의 부재가 박탈이 된다.
다시 말해, 아예 낳지도 않은 철수의 부재하는 쾌락에 대해서는 철수를 위해서 아쉬워할 수 없지만,
철수가 태어나서 무럭무럭 자라 대학교 mt에서 계곡물에 빠져 죽었을 때는
그 구만리 앞길에 있을 수많은 좋음들의 부재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게 너무나 이치에 맞는 것이다.
따라서 애초에 안 태어남으로써 비존재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미 태어나버린 존재가 죽게 되는 것을 꺼리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안 태어나서 쾌락이 없는 사태는 태어나서 쾌락이 있는 사태보다 더 나쁘지 않다>는 명제는 우리의 도덕 체계의 핵심적인 원리다.
한편 <태어나지 않아서 고통이 없는 사태는 태어나서 고통이 있는 사태보다 더 낫다>는 명제 또한 우리의 도덕 체계의 핵심적 원리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우리는 오직 끔찍한 고통만 겪다가 한달만에 죽어버리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기계를 작동시켜서,
그 기계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인간들을 태어나게 만드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안 태어나서 쾌락이 없는 사태는 태어나서 쾌락이 있는 사태보다 더 나쁘지 않은 한편
안 태어나서 고통이 없는 사태는 태어나서 고통이 있는 사태보다 더 낫기 때문에
안 태어나는 게 태어나는 것보다 언제나 더 낫다.
따라서 애초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온갖 아쉬움을 유발하고 그 중 몇 개만 해소해준 부모에게 자식이 진 빚은 단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부모에게, 좋은 것은 단 하나도 안 주고 오로지 나쁜 것들만 준 그 부모에게 최선을 다해 피해 회복을 도울 의무가 있다.
보편 직관은 거슬러 올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그냥 믿어야 함. 언제까지고 허공을 팔 수는 없음. 그렇게 감정적으로 직관적으로 무용함을 잘 파악하면서 꼽을 줄 때까지 허공만 파는지 안타까움. 자꾸 칸토어처럼 무한에 미쳐버리려고 하는 게. 그 좋은 뇌를 두고 자해적으로 메모리를 낭비하는 게.
결국 그따위 유치한 인정욕구론으로 빠지는 거군요. 나도 미칠 만큼 많은 철학책을 읽었고 나댄 적도 숱하며 여전히 나대고 있으나, 과연 누가 나를 먹어주고 떠받든답니까? 되레 님처럼 편견에 갇힌 자가 나를 비정상인, 정신병자로 몰기 십상인데. 그럼에도 나는 철학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무엇보다 형이상학적으로 존재론적(또는 비존재론에 관한)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리가, 인간 앎의 형식이 그러하거든요.
아닌가 그게 그나마 이 타인 지옥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나름의 방어 대책인가? 그조차도 진짜로 허공에 말을 걸 수는 없어서 타인이라는 벽에 대고 배설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게 인간의 처연하디 처절한 진화 결과겠지
나도 성격이 모나서 굳이 들쑤신 건 미안하긴 한데, 솔직해지면 안 되나? 허공에 손을 휘저어서라도 어떻게든 보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 아닌가? 본색이 나오니까 그부분에서라도 상호이해가 그나마 쉬워지긴 하잖음.
소망과 현실은 다른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현실이 안 그렇다고 소망 자체가 부정되는 건 아니잖음. 떠받들어주는 동시에 완벽하게 이해받길 바라는 거 아님? 안 그런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을까. 쨌든 허공만 들여다 보다가 조현병 와서 자기 폐쇄로 끝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은데 물론 완전 미치는 게 나 자신에게 나을 것 같기도 하지만 왠지 싫지 않음?
직관과 내용. 형식과 실질. 칸트의 유명한 명제구이지요. 님처럼 실용(?반출생이 애시당초 실용과 맞닿을 수 있나)과 실천을 전제하면 곧바로 권태와 자기모순의 함정에 빠집니다. 주화입마에 빠진다는 겁니다. 실천은 실천은 근거가 되는 이성의 작동없이는 맹목의 수심 깊이로 난데없이 추락하고 맙니다. 인간이란 예지체의 성격을 아는 것이 그래서 그토록 중요한 칸트의
목표였습니다.
나는 이미 비정상인이고, 조현병(망상장애)자이며, 전과자이고, 알콜중독자이며 자지도 잘 서지 않습니다. 이게 나의 실존 자체이며 실체이죠. 이런 나와 반출생주의가 무슨 상관입니까? 도리어 이런 실존적 비극의 해소로서 반출생주의에 내 몸(실존)을 의탁하는 거라고 말씀 드리죠.
*추가로, 무직자에다가 벌어논 돈도 없고 최종학력은 공업고등학교 중퇴자입니다; 이런 나는 존재론을 공부하면 안 됩니까? 도리어 이런 못난 내게 존재론은 어떤 신앙의(실용적 의미로서) 역할을 하지 않을까요?
이미 조현병 상태임? 그래도 말이 통하긴 하는 거 보니 중증은 아닌가 본데 웬만하면 그 상태에서 더 멀리는 안 갔으면 좋겠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반출생주의를 순수 사색 놀이 도구로만 삼아도 좋으니까 정신을 분열시키는 무한의 길로 가지 말고 꼭 에포케하길. 근데 자지 안 서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음? 무성애면 더 좋고
*실천은 실천"의" 근거가ᆢ
님한테는 존재론이 뇌를 순환적 사념에 고정시켜서 마비시키는 일종의 진통제 역할인가 봄? 형이상 허공에 집중헤서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은데 내 코가 석 자니 대안 제시도 못하겠고 이미 태어나버린 사람을 어떻게 구할 도리가 없다는 게 정말 갑갑하고 무력감 오진다 그리스 비극을 보는 느낌임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애쓸 일이 없으면 자지가 서지 않든 말든, 내 스스로 조현병자라고 씨부리든 말든 간에 살아가는 데에 있어(곧 실용적으로)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정신병자와 말이 통한다니 맙소사. 님이야말로 지금 위험의 경계선에 서 있으므로 주의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끝끝내 세상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애시당초 반출생주의와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그래도 나는 뭔가 수상해 보였던 님의 진짜 상태 님의 솔직한 심경 님에게 내재된 선의를 알게 돼서 왠지 기쁨 이런 내 기쁨이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사상검증식으로 공격해서 미안하게 됐음 지금 생각난 건데 남의 글에서 계속 우리끼리 댓글 다는 것도 좀 글주인한테 미안해서 이만하겠지만 부디 우리가 각자 덜 아픈 길을 찾길 무에 대고 빌겠음
하하하 푸! 그래요뭐, 고대 그리스 극장의 비극들이 인간 감정의 원형이라고 나도 인정하는 편이니까.
그럽시다. 그렇다고 무nothing, void가 응답할런지는 모르겠지만. 진공에서는 님의 외침이 어떤 곳에도, 심지어 자기자신에게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잠시잠깐 고민해 보니 님께서 쓰신 유정의 뜻은 정감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영어 스펠링의 뿌리말도 같고. 정감성이란 것도 굉장히 어려운 개념어라서 다들 모르고 사용하거나 그 참 뜻의 곁가지만을 훑어서 갖다대지요. 일단 알겠습니다.
사실 그래서 무란 거임 진짜로 감각으로 응답받으면 소름끼치니까
철학이란 말부터 개조하게 생겼네 아래 썰이 흥미진진해서 읽다가 또 까먹고 댓글 달았음; ㅈㅅ
낱말이 중요한가요뭐. 요즘 유행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니체, 비트겐슈타인은 엄밀히 말해서 반anti-철학자입니다.
유정이란 낱말이 나와서 말인데, 한국 관념(형이상) 소설의 대가이자 구도자 소설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박상륭 씨가 '죽음의 한 연구(장편)'에서 또 '로이가 산 한 삶(단편집 평심)'에서 구도의 발단을 되묻는 중간계(객관적 주체=>전지적 화자: 실제로-현상계에서-는 가능하지-작동하지-않으나; 그것이 작동한다면 그게 곧 신god인 것) 입장을 한동안 넋두리는
대목이 있는 데, 그 때의 전개방식이 지금 님의 주제글과 흡사합니다. 이건 또 정진홍(이화여대 종교학과) 교수께서 종교학 관련 강연 중에 기가 막힌 일상 사례를 드는 데, 마치 이런 거지요.
정진홍 교수의 지인이자 동료 교수의 아내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한동안 교편을 잡다가 뒤늦게 성경공부에 매진했답니다. 그러다 보니 이름난 교회의 전도사가 되고 집사가 되었고 남편과 자녀 모두를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되도록 설득했답니다.
좋은 집안 출신에 재력과 지성을 다 갖춘 지인의 아내는 인품마저 훌륭해서 사교계의 대모madame 역할을 했다지요. 그런 그런 나이 채 칠십이 되지 않아서 알츠하이머병을 앓습니다. 워낙 급작스럽게 찾아온 몹쓸 병이라서 가족은커녕 본인조차도 병증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나 봐요.
*그런 그런=> 그런데
가족과 주변인은 치매가 워낙 흔한 병이기도 해서 앞으로의 각오를 다져가는 중에, 병증이 심각해질수록 당사자가 더 못 견디어 하는 거죠. 나이 칠십줄에 들어서자 아내는 교회를 나가지 않았으며 집안의 십자가와 갖가지 교회 관련 물건들을 버립니다. 칠십 중반에 이르러서는 성경마저 내다버리고 주말 교회를 나가는 남편과 자녀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기 시작하죠.
반대로 일상생활의 안정은 찾아가더란 것. 예컨대 대소변을 가릴 줄 알고 섬마 증세는 완화돼 가더란 것. 아내가 저주하고 못 견디는 것은 오로지 교회와 관련된 것들. 이러니 주변에서는 교수의 아내를 가리켜 "마귀가 씌었느"니 "하나님의 시험대에 올랐느"니 하며 소곤대는 것.
*섬마=> 섬망.
결국 아내는 요양병동에 수용되어 일흔 후반의 나이에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주변에서는 아내의 죽음을 두고 여전히 말이 많지요. 게 중에서도 많은 말은 '교수의 아내가 과연 천국에 갔을까, 지옥에 갔을까' 하는 궁금증. 바로 이 지점에서 정진홍 교수는 묻습니다. 평생토록 주님의 신실한 자녀 노릇을 해 오다가 말년의 삶 끄트머리에 잠깐 넋을 놓아 주님을
저주한다면 그는 "신앙인인가 반신앙인인가?" 성경 말씀에 '주님을 믿는 자(만이) 하늘나라의 문 앞에 설지어다.' 그렇다면 그녀(교수의 아내)는 하늘나라의 문 앞에 당도했는가. 그녀를 아는 많은 신앙인(지인)은 정말로 그녀의 천국행을 믿고 있을까. 왜냐하면, 그녀는 자의로서(우리가 말하는 제정신 또는 정상인으로서) 말년의 불경함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단지
병 때문에, 그것도 뇌가 녹아버린 반의지적(어쩌면 타의적) 행동으로 인해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것이라면, 이것은 주님 탓(하나님의 섭리)인가 그녀의 인과응보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김재권(심리철학) 교수의 입장은 "그 문제는 타인이 판단할 수 없다." 라고 보는데, 정진홍 교수의 입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정진홍 교수는 도리어 신앙(인)의 맹종, 믿음의 공백(시간성이 배제된 공간적 믿음)에 대해서 성찰해 볼 것을 요구합니다.
※야훼교, 예수교인들에게서 하나님은 내 모든 행동의 근거이자 내 존재를 낳으신 조물주이시기에.
와 내가 사고실험한 게 실화였네; 독실한 기독교인 치매 와서 하나님 저주하면 천국이냐 지옥이냐, 목사들은 어련히 하나님이 다 감안하신다 or 순전히 하나님 판단이니 함부로 재단 못한다 이럴 거다 싶었는데; 치매 보면 아무리 봐도 영혼은 개소리고 인간은 그냥 컴로봇 ㅇㅇ
끄덕끄덕. 이런 사소한 질문들에서부터, 아니 이런 질문이 곧 존재론(형이상학)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가(사조 혹은 스승)는 이 원초적 질문을 끝끝내 놓아 주지 않습니다.
*103님 말씀대로, 인공지능a.i의 자율성(나아가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가 김재권 교수의 화두였습니다.
교통사고로 원하지 않는 부상을 초래하는건 이미 존재하는 자의 자유의사에 직접적으로 반한 행위이지만 출생은 아예 무존재에서 존재로 불러들이는만큼 자유의사의 직접적인 침해가 일어나지 않음. 그리고 연고 발라주는건 고통의 해소를 목적으로 하는 도구적 쾌락이지만 인생에는 도구적 쾌락뿐만 아니라 내재적 쾌락도 존재하고 이런 내재적 쾌락을 맛볼수 있게된건 오직부모의 출산이라는 행위 덕분임
이게 뭔 소리인지원. 님은 정신병자, 알코홀중독자인 나보다 더 언어오염이 심합니다. 정신차리세요.
그리고 어떤 이(특히 들뢰즈)의 개념어가 될 수 있는 내재성과 내재적이란 말은 적잖은 차이가 발생합니다. 님은 지금 내재적이라는 흔한 말에 어떤 이들의 내재성 개념까지 껴안은 경우인데요. 이러면 반드시 사달이 납니다. 문맥에 이미 배탈이 났다구요!
님, 칸트 번역서 뿐만 아니라 칸트 자체가 말이(독일식 조어가) 어려워요. 그러니 칸트는 두 번 세 번하고 자꾸 읽어야지 개념어를 외워서는 곤란합니다. 순수이성비판 자체가 기왕의 개념(어) 철학에 반기를 든 것이었어요. 칸트의 개념어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상어와 혼재하여 있어ㅡ국어사전적 의미만 알면ㅡ 따로이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도구적 쾌락-> 부정적 상태를 전제로함 부정적 상태에서 구제됨으로서 획득할수있음 내재적 쾌락->쾌락적인 감각경험 인식상태 등으로 부정적 상태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할수있음 ㅇㅋ? 그리고 "내재적이라는 흔한말에 내재성 개념까지 껴안은상태" <--이거 무슨말인지 이해안됨설명해줘요
문제이지요. 칸트적 의미는 국어사전적 말뜻으로 결단코 해소할 수 없어요. 칸트는 오히려 개념의 덧없음, 무화를 주창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내용이 전부이고, 그 내용의 연역(과정)이 그의 철학 전부입니다. 나는 그게 진짜 철학(생각함)이라 여기고, 많은 철학도는 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한국 시인, 문학 평론가들이 말하는 "변용", "정동성" 따위의 말은
서양철학적(존재론적)으로 아무 의미없는 유행어(쓰레기 언어)입니다.
스스로 연역할 줄 아네요. 그만하면 내재적과 내재성의 차이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을 거예요. 제발 다음부터는 말을 좀 쉽게 합시다.
지금 네 번째 읽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감은 잡히는 데, 도무지 풀어내지를 못하겠습니다. 술도 몹시 취했습니다. 취중 핑계를 대고픈 마음은 없구요. 단지 님의 말씀은 허당이 너무 많이 존재합니다. 내게 기회를 주신다면 다음 접속할 때에 조리있게 그 까닭을 설명하겠습니다; 짐작컨대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님의 두 번째 댓글조차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칸트 전공자끼리 하는 말 중에 '칸트의 공백기'라는 게 있어요. 딴 게 아니라 님처럼 모든 걸 까버리기 시작하는 시기인데, 이때의 글은 별로 남아있지도 않고, 칸트 본인조차 그 글이 남겨질 것을 두려워 했죠.
저같이 철학 ㅈ도모르는사람이 쓰는 댓글이면 철학 잘모르는사람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이해할수있겠죠 아마?
그리고 왜 스스로를 알코올중독자, 정신병자라고 비하하시는지?
기성(기왕의 세계, 체제 혹은 체계)을 한 개인이 상대한다는 건 고통과 난해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자경 교수는 칸트를 가리켜 "목숨 걸고 생각한 자"라고 했죠.
왜냐하면 철학(내가 아는 서양 존재론)을 모르면 반출생주의의 참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님처럼 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반출생의 의지는 그래서 한갓 공염불일 뿐이지요.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오래 가더라도 유행의 참여일 뿐이겠죠.
실제로 술을 자주 마시고(요즘은 거의 매일 마십니다) 많이 마시는 편입니다. 나이 오십에 가진 것 없고 배운 것이 없다면 누가 내게 정신병자라고 손가락질하는 게 오히려 깔끔하고 편합니다.
배운건 많아보이는데 암튼 난 반출생주의 이해했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보기엔 아닌가봄요 존재론 이해할수있게 책한권 추천좀여
순수이성비판, 칸트
처음부터 부담스럽다면, 백종현 교수 완역본을 읽기 전에 김진, 한자경 교수의 '칸트-인간은 자연을 넘어선 자유의 존재다'를 입문서로 추천할게요.
182님, 반출생주의는 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반출생 자체가 문제인 듯해요. 그래서 이건 기왕의 존재론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될 듯해요. 일회성 쓰나미가 아니라 8~12미터 파고가 끊임없이 몰려와서 해안가를 조금씩 잠식해 나가는 상태인 거죠.
궤변에 미친 분탕도 철학자로서의 고독사님한테는 어그로를 끌기 싫은가 보네요.
반갤러1(182.221)// 1. 너는 본문 글을 딱 네 줄만 읽은 건가? 그 마데카솔 비유는, 태어나는 것의 해악의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 이후에 삶의 어떤 좋음도 그에 비하면 연고 발라주는 것 따위 정도밖에 안 된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 이후에 나오는 논거들에 대해 할 얘기는 없는 건가? 상대방의 논증의 논거들을 문제 삼지 않고 단지 사소한 비유나 표현을 트집 잡는 것은 너무나 비생산적인 대응이다. 가령 상대방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진 다음, 그것은 적반하장이었다고 한마디 덧붙였다고 했을 때, <아닌뎅, 나는 몽둥이 안 들었는뎅?>이라고 하는 유치한 대응인 것이다.
반출생 자체에는 동의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논거들에대해서는 할얘기가 없음
그럼 존재하게 된것은 비존재에 비해 항상 해악이긴 하나 오직 존재하게 됨으로써 얻을수있는 쾌락과 좋음에 한해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일정부분 빚지고있다는 주장은 어떻게생각함?
3번을 읽고 본문을 읽고 본문 내용에 이의가 있으면 그 내용을 지적하며 댓글을 써라.
너가 말하는게 존재자의 쾌락은 비존재에 비해서 아무런 우위를 갖지 않는다 아님? 근데 그건 반출생을 옹호할수있는 근거로삼을수 있어도 이미 태어나버려서 여러가지 경험을 해버린 자식이 부모에게 일정부분 빚을지고있냐없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것으로보이는데 네 생각을 얘기해봐
어떠한 이득도 주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빚을 지고 있는 건가? 가령 내가 너에게 1000만원을 훔쳐간 다음 10년 후에 10원을 준다면, 니가 나한테 10원의 빚을 지고 있는 건가?
이해했음 그럼 논외긴 한데 너말을 근거로 부모는 자식한테 책임이 있지만 자식은 부모한테 책임이 없으니까 자식은 부모한테 효도할필요도없고 독립할필요도 고 부모는 자식을 평생 책임져야한다는 명제를 정당화할수 있다고봄?
빨랑 답장해줘 이것만듣고 잘거야
182님, 자주 봅시다. 얼른 주무세요
182/ 이거 답글 못 쓰면 어디 가서도 댓글놀이할 생각 마세요!
182/부담갖지 말고 열심히 구글링하여 베방장님의 요청에 응답하십시오. 이 형이 열심히 응원할게요; 제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일단 나서 보십시오. 실천이 중요하다면서요!
고독사님은 술좀깨시고 내일봅시다. 베방장님의 요청은 뭘말하시는건지..
왜 답안해 아직도 주무심?
2. 네가 말한대로 태어나게 하는 행위에 "자유의사의 침해"가 동반되지 않는다고 쳐도, 태어나게 만듦으로써 그 존재에게 고통이 생기게 만드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오직 불에 타는 고통만 겪는 인간을 만드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한 존재는 그 기계가 아니었으면 태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안 태어나서 고통이 없는 게 그 안 태어난 존재에게 더 낫다고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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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내재적 쾌락이 애초에 안 태어나서 없는 것은, 태어나서 그 내재적 쾌락이 있는 것보다 나쁘지 않다는 점을 본문에서 다 설명했다. 도대체 왜 그걸 전혀 안 읽고 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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쩝.
고독사 이 놈 뭐냐
니개비다 씨발새끼야
칙짜붙지 마라 지긋지긋하다
왜 욕질이냐 개새끼야 자식은 부모의 일방적인 의지로밖에 태어날 수 밖에 없지? 결국 아이의 고통과 죽음은 부모의 책임이다 아니다?
태어났다는 건 이미 물질화하였다, 무엇무엇으로 생산되고 만들어졌다는 말이 아냐? 그럼 인간의 아이를 생산한 건(만든 건) 일차적으로 부모일 테지. 여기서는 세계를 처음 구성하는 물질(원자)에 대해서 묻는 게 아니잖아. 세계의 첫물질, 그러니까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건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이것이다'라고 정의할 만한 것이 없다. 여섯 가지 가능 입자에
열 두 가지 표준(입자) 모형과 그 대쌍을 연결짓는 힉스 따위의 매개질이 있다고 할 뿐, 그것들의 제일원인 또는 원질arche을 또 따져야 하는 지난함만 수반된다. 힘도 마찬가지야. 질량(물질)이 곧 힘이라고 하지만 자연(우주)의 네 가지 (강, 약 핵력, 중력, 전자기력)힘만으로는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할 수 없지. 더군다나 우주에서 우리 인간의
위치는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진 건가 하는 문제까지 개입하는 특이한 존재자란 말야. 즉 우리는 우리의 부모에 의해서 생산되었다는(만들어졌다는) 생물학적 특성을 자연계와 공유하면서도 부모의 부모ᆢ, 최초의 부모, 곧 인간의 제작자(조물주)와 지금 여기 나의 관계까지도 실존의 문제로서 모색한단 말야. 그러니 부모가 나를 만들었다는 그 명백한 사실의 근원까지도
함께 궁리해 볼 수밖에 없는 별난 존재란 것. 그걸(형이상적 문제를) 따로 분리시켜서 생각하면 좋은데 그러면 애시당초 반출생주의라는 이즘의 토대조차 위태로워진다는 것 쯤으로 내 댓글에 대한 오해와 비난은 마무리하자. 거듭 말하지만, 부모가 나를 낳았다는 그 원죄를 따지려면 자연스럽게 그 부모가 속한 시원으로부터의 이 세계에 내재한 원리, 그러니까 부조리함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단 거야. 현상 자체는 형이상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 현상을 마주한 생각하는 인간 주체에겐 반드시라고 할만큼 형이상학이 개입하더란 것. 그게 인간이란 특수한 존재자의 더러운 운명이더란 것.
욕해서 미안하다. 지금 내가 많이 아파서 상세한 이야기는 앞으로 차차 댓글로 올려서 함께 고민해 보자.
고독사/비겁한 변명하지 마라 개새끼야 모든 원인은 부모야
이미 내던져진 것에 대한 원망과 저주 말고는 부모에게 더 무엇을 욕할까.
182님 뭔 개논리에요 ㅋㅋㅋ 애초에 자식이 낳아달라고 했나요?
이걸 깨어났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할지 표현이 애매한데, 지금 우리(반갤러)처럼 반출생을 지향하거나 비존재를 근원 이전의 근원으로 삼는 자는 여전히 소수에 불과해. 그래서 네가ㅡ답답한 마음에ㅡ 운동과 설득의 목적으로서 반출생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건 마땅하나, 이런 식으로는 주장의 한계가 명확하다. 예컨대 저출산 문제만 해도 인간 혹은 인류의 의식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반출생주의자의 입장은 의도적이라 할만큼 공론의 장에 서질 못하지. 반출생 운동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 기성세력은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쉬쉬하는 것 같아. 이건 기왕의 격변과 달리 지들 몫 일부를 떼어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말 그대로 형이상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대격변(진짜 변화)이거든. 그래서 폭력으로도 다룰 수 없는 사태를 맞이한 거야.
본디 이념과 사상이라는 초폭력 앞에서는 국가폭력도 무기력해. 프랑스 혁명 같은 것 말이지. 그런데 이건 그런 사회 혁명보다 더 골치 아픈 개개인의 의식 혁명 (나아가 존재론적 형이상) 차원의 문제라서 기왕의 이념과 사상, 인류의 기원(역사) 따위를 다 갈아엎어야 해. 한마디로 새로운 종의 탄생과 관련된 문제이지. 더군다나 그 새로운 종은 탄생하자 마자
단시간에 자멸하겠다는 결의로 무장하고 있어. 이웃의 한두 사람이 자녀를 갖지 않고 사는 딩크족의 문제가 아냐. 반출생주의라는 이념적 훈련, 의식화가 덜 된 후진국에서는 여전히 아이 많이 낳는 걸 미덕으로 여길 테지만, 반출생주의를 벌써 실천하고 있는 선진사회는 불보듯 멸망의 날을 예견하고 있지. 이거 국가권력의 정점에게는 시한부 암선고와 다름없다. 장차
자본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에게도 엄청난 고민거리가 될 거야. 지금 우리(반갤러)는 그런 어마무시한, 어쩌면 존재(론)의 근간마저 부숴버릴 그런 모험을 시도하고 있는 거야. 서두르지 마라. 모험은 위험에 비례하니까.
여기까지만 할게. 내가 지금 술몸살이 나서 정말로 많이 아프다. 또 보자
좋은 글입니다.
태어나야 해악도, 이익도 깨닫는 거다.
그의 미래에 있을 쾌락의 부재가 박탈이 된다. <-어찌보면 고통의 부재가 사라짐 으로 해석될수있지않나요? 살아있음 = 쾌락이 있음<-좋음 고통이있음 <-나쁨 자살함 = 쾌락의 부재 박탈 <-나쁨 고통이 없음 <- 좋음 이렇게 되는건데 좋음의 양만 따지면 고통이 없음 > 쾌락이 있음
쾌락의 부재 박탈 > 고통이 있음 이 아닐까요? 물론 애초에 태어나지 않음이 제일 좋은거라 치더라도 존재가 된 사람입장에서 쾌락의 부재 박탈보다 고통을 이 없어지는게 더 효용이 높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도출되네요
죽음이 나쁜 이유는 더 살았다면 있었을 쾌락이 박탈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obirth&no=13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