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의 부재>가 <쾌락의 존재>보다 나쁜 게 아니라고 하는 한편,
<고통의 부재>는 <고통의 존재>보다 더 좋다고 하기 때문에
베너타를 <소극적 공리주의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베너타는, 더 큰 쾌락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경우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베너타가 주장한 것은 다음의 명제다.
<태어나지 않아서 쾌락이 부재한 사태>는, <태어나서 쾌락이 있는 사태>보다 나쁘지 않다.
이 명제는 공리주의를 그럴듯하게 주장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공리주의자는 다음 두 종류의 행위를 구별해야 한다.
(1)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미래에 존재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2) 사람을 존재케함으로써 행복(순효용)의 총량을 늘리기.
바람직한 공리주의는 (1)만을 목표로 한다.
만약 (2) 또한 도덕적으로 요구된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들기 때문에 <더 많은 순효용>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순효용의 양을 더 늘려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인간을 순효용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인간을 효용이 담기는 그릇(vessel) 따위로 취급하는 것이다.
순효용의 극대화라는 공리주의의 목표는,
그것이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만든다는 조건 하에서,
호소력을 갖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것과 전혀 무관한 상황에서) 단순히 순효용의 양만 늘리는 것이 도덕 이론의 목표가 될 순 없다.
즉, 개개의 사람들의 행복 수준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순효용의 총량이 늘어난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수를 늘려야 한다고 도덕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자는
<애초에 태어나지 않아서 쾌락이 부재하는 사태>를 <태어나서 쾌락이 있는 사태>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베너타 반출생주의의 비대칭성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무리 못해도 지구인 절반이상은 살기 개좆같을거임 ㄹㅇ
ㅇㄱㄹㅇ
애초에 공리주의는 입법의 원리로서 나온거지, 개인의 윤리행위에 실천적 지침을 주려고 나온게 아님. 솔직히 공리주의가 대세인 것도 좀 얼척 없긴 해. 이딴게 무슨 도덕이론이라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