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힌두교의 아힘사(비폭력으로 알려짐)를 참고해 칸트의 실천이성을 반박하고 연민의 윤리를 제시했다.
연민의 윤리란 의지를 직관하는 상태에서 일체가 하나(브라흐마-아트만)임을 깨닫고 남들을 자기자신과 같이 대하는 것을 뜻한다.
연민의 윤리를 받아드리면 비존재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옳바른 행위가 된다. 비존재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일체(브라흐마)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비존재 버튼을 누른다는 것은 다른 모든 생명들을 자기자신과 같이 돕는 가장 이타적인 행위이다.
결국, 비존재 버튼의 문제는 연민의 윤리와 의무론의 대립이다.
연민의 윤리란 의지를 직관하는 상태에서 일체가 하나(브라흐마-아트만)임을 깨닫고 남들을 자기자신과 같이 대하는 것을 뜻한다.
연민의 윤리를 받아드리면 비존재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옳바른 행위가 된다. 비존재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일체(브라흐마)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비존재 버튼을 누른다는 것은 다른 모든 생명들을 자기자신과 같이 돕는 가장 이타적인 행위이다.
결국, 비존재 버튼의 문제는 연민의 윤리와 의무론의 대립이다.
나도 이 생각. 1.누군가가 희생해서 버튼을 누르는 순간 -> 불행 0 행복 0 2.버튼의 존재를 알리고 투표 또는 선택권 -> 불행 a 행복 b 반출생주의 관점에선, 행복b가 얼만큼 증가하든 불행a를 없애는 것이 중요함. 다만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건 아무도 강요할 수 없음. 하지만 누군가 "어쨌거나 누른" 순간 그 행동은 도덕적인 일이 됨
강요할 수는 없지만, 반출생주의에서 출산을 하지말자고 하는 것처럼 "버튼을 누르지 말지 말자" 라고 말할 수는 있을 듯.
지금 네가 말하는 것이 바로 소극적 공리주의다. 반출생주의는 심각한 고통을 강요하지 않을 의무를 수행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일반적으로 '심각한' 사안이다. 아마도 가능세계 비교표를 보고서 소극적 공리주의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소극적 공리주의라는 개념을 알든 모르든). 반출생주의가 네가 말하는 소극적 공리주의자의 희생(?)을 지지한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만약 고지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고통이 된다는 이유로 그러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는 논쟁은커녕 아무런 말을 할 수 없고, 책도 내선 안 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과 달리 태어난 자들은 이미 계약주의적 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 맞는 절차적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가령 우리가 사람을 치어 죽일 수 있는 차량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계약주의 하에서 묵시적 동의를 얻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비존재를 태어나게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계약주의적 정당화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가장 도덕적으로 안전한 길을 택해야 하고, 그것이 비출산이라는 것이 반출생주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ㅇㅋ 애초에 내가 반출생주의를 오해하고 있었나 보네. 근데 님 말대로 내가 주장하는 게 '소극적 공리주의' 라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겠음. (궁금증이 생김) 수많은 과학 이론들이 미립자들의 운동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처럼, 반출생주의도 결국 소극적 공리주의로 환원(이 용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이해해줬으면 함)될 여지가 있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함? 예를들어 어떤 범죄자를 처벌할 때 모든 걸 원자 활동으로 치부해버리면 더이상 논의가 진행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원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덮고 어쨌거나 적절한 처벌을 내리는 것처럼 반출생주의도 결국 의미있는 논의를 하기 위해 "버튼"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그냥 무시해버리는 쪽을 택한 거임?
그니까 정리하자면, 내가 봤을 때 아무리봐도 반출생주의는 결국 소극적 공리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는 이상 버튼을 누른다는 해결책 밖에 남지 않아 더 이상 논의가 이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반출생주의에 머무른 것처럼 보임.
왜냐하면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범죄자가 원자 덩어리일 뿐이고 태초에 빅뱅 때부터 가지게 된 운동량에 의해서 결국 현재에 이르러 범죄를 저지르게 된 사실을 다들 알면서도(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과학을 배웠으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임) 그 범죄자를 욕하고 처벌하는 것처럼
버튼이 눌리는 것이 사실 무조건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켠에선 "에이 그래도 죽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라는 찝찝함 때문에 버튼을 거부하는 것 같음. 결국, "범죄자를 처벌했다고 알렸지만 사실 범죄자는 천국에서 호의호식하게 된다" 에 대해서 나는 "사실을 모르는 이상 상관없다." 라는 입장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래도 실제로 처벌해야된다" 라고 주
하는 것으로 보임.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위의 비유는 좀 이상한 점이 많은 것 같음. 그냥 무시해주면 고맙겠음. 나의 주장이 "소극적 공리주의" 라는 건 이해했음.
공리주의는 의무주의의 상위 개념이 아니며, 의무주의를 공리주의로 치환(?)하기는 어렵다. 행복(생성)에는 "전혀" 가치를 두지 않고 오로지 고통(제거)에만 가치를 두는 것은 소극적 공리주의 중에서도 매우 극단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출생주의는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보다는 둘 다 애초부터 부재하는 쪽이 낫고, 따라서 비출산이 도덕적으로 안전하다는 의무주의의 일종이다. 이에 대한 사적 수행은 비출산이고, 공적 수행은 사적 수행을 장려하기 위한 적법한 수준의 설득, 캠패인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소극적 공리주의를 택하면, 수행 방법은 극단적이거나 모호해진다.
극단적인 소극적 공리주의는 그보다 온건한 소극적 공리주의보다도 취약하다. 만일 0.0001의 고통이 마음에 걸린다면, 0.01의 고통은 더 걸릴 것이고, 0.000000000001의 고통 쯤이야 사소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의무주의를 따르지 않는다면, 더 작은 고통을 감수하면 더 큰 고통을 막을 수 있을 때 더 작은 고통을 감수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소극적 공리주의자는 사적으로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공적으로는 왜 학살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변명에 가깝게 해명할 수밖에 없다. 소극적 공리주의자는 반출생주의도 결국 고통 최소화라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할 뿐이고, 출생주의가 결과적으로 더 이른 멸종에 더 도움이 된다면 출생주의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실천윤리 차원에서, 소극적 공리주의는 그다지 사상을 지지할 만한 실익이 없다. 결국 소극적 공리주의자는 자살자 또는 범죄자가 되거나, 아니면 실천 없이 형식적인 선언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근데 자살자나 학살자가 된다는 건 이해 못하겠음. 저런 버튼은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살이나 학살은 일반적으론 굉장히 큰 고통을 동반하게 되고 그런 면에서 나는 고통이 있는 죽음은 거부함.
아 오타임 존재하기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기
형식적인 정언명령보다는 연민에 기대는 것이 나아보이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무지의 소치일 뿐이더라도, 생의 찰나의 지속에 집착하는 자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 고려하는 것 역시 연민에 기초할 것이다. 아무리 죽는 줄도 모르게 자는 중에 마취시키고 죽인다 한들, 타인의 생을 동의 없이 앗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공리주의적 사고가 되며, 이 사안은 공리주의와 의무주의의 대립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