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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면, 철학이 과학의 아버지라고 답하겠다.

철학이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면, 철학은 항상 그곳에 있었노라고 말하겠다.


아우터 와일즈는 과학과 철학에 관한 게임이다. 근본적으로 두 학문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 미지를 탐구하거나 소음에서 신호를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과학, 그리고 철학의 목표다. 우리는 모른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에 질문이나 가설이라는 형체를 부여하고 그것을 붙잡으려고 애타게 노력한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뇌와 가냘픈 이성을 붙들고서.


게임은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서 시작한다. 플레이어가 가야 할 곳은 위에 있다. 하늘, 혹은 그 너머의 우주가 이 화로인의 탐사지다. 

시선을 내려 주변을 둘러보면 아늑한 문명이 있다. 동포 화로인들이 머무는 이곳에는 화로인들이 알아낸 지식을 모아놓은 박물관이 있고 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있고 마시멜로를 구워먹을 모닥불이 있다. 하지만 지상에 머물 수는 없다. 안락한 지상에 머물더라도 더 알아낼 수 있는 지식은 없다. 

그런데, 무엇을 알아내라는 말인가? 목재 화로에서 눈을 뜬 플레이어는 당황하게 된다. 제시되지조차 않은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란 말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느낌. 탐구의 첫 단계가 가설 수립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결국 광산에서 유영하거나 아이들과 놀아주던 플레이어는 발사 코드를 얻기 위해 박물관으로 향한다. 박물관에는 화로인의 단편적인 지식이 모여있다. 저 보라색 파편은 중력을 뒤트는 기능을 하는군, 양자파편? 우는 천사 비슷한 컨셉인가? 아귀라는 생물은 나중에 나올 것 같은데, 쪼그매서 무섭다기보단 깜찍하군. 

그리고 발사 코드를 받아서 돌아가던 도중 노마이 조각상이 플레이어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조각상은 눈을 번쩍 뜨더니 이해할 수 없는 문자와 기억이 화면을 채운다.

첫번째 질문—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완전한 무지에서 무언가가 나타난다. 형체를 가졌다기보다는 희끄무레한 안개와 비슷한 궁금증이다. 노마이라면 멸종한 고대종족이라는 설명은 들었지만 조각상이 왜 반응했는지,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모른다. 다른 화로인도 조각상에 대해서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플레이어는 질문을 어물쩡 마음속 한구석에 치워둔 뒤, 우주선을 타고 비틀비틀 이륙한다.

그리고 나같은 경우 처참하게 불시착했다. 불시착이라는 표현은 무척 마음에 든다.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착륙했다는 뜻이라니, 듣기에 좋다. 꼬라박았다는 말은 아무래도 천박하지 않은가. 

안전벨트의 존재가 무색하게 경추골절, 두개골 박살 등 이런저런 부상을 입은 나는 죽었다. 못생긴 무언가가 떠오르고 눈앞에 지금까지의 기억이 스쳐지나가더니 시간은 이륙하는 밤으로 되돌아와있었다.

아하, 조각상 덕분에 타임루프를 하는 거구나. 어설프게나마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른다. 플레이어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다시 우주선에 올라탄다.


상당부분을 공유할 튜토리얼의 경험과는 달리 이후로는 플레이어마다 겪은 내용이 천차만별일 것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목재 화로를 슬쩍 둘러보다가 잔바위로 향했으나 누군가는 냅다 태양으로 돌진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행성으로 향하든가.

그러나 한가지 사실만큼은 장담할 수 있는데, 어느 플레이어든 우주로 나가고서는 수많은 방식의 죽음을 겪었을 것이다. 나처럼 우주복 착용을 잊은 탓에 질식했다든가 아니면 잉걸불 쌍둥이의 지하를 탐사하다가 차오르는 모래에 압사당하든가. 우주는 친절하지 않다. 적대적이기보다는 무관심한 쪽에 가깝다(빌어먹을 아귀를 빼고는).

종종 그 무관심은 악의보다도 두렵다. 몰아치는 태풍, 떨어지는 운석에서는 의도를 읽을 수 없다. 행성의 환경은 하나같이 생명체가 살기에는 너무 가혹하며 매 행성마다 다른 시련이 덮쳐오기에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은 무용지물이 된다.

모든 것이 명확한 문명의 바깥, 알 수 없고 위협적인 것이 가득한 까마득한 어둠. 즉 야생인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야생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하찮은 광량의 손전등으로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야생을 헤집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세상에 관한 어떤 해명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미지로 이어지는 길은 이미 닦여있다. 여전히 험한 길이지만 누군가가 이전에 걸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미지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지성체의 본능이다. 비단 인류뿐만이 아니라 모든 지성체가 그렇다. 어느 펭귄은 산맥으로 떠나고 어떤 옛 늑대는 괴상한 원숭이들에게 겁없이 다가왔다. 화로인이나 노마이 역시 호기심을 가진 종족이다. 

특히나 노마이의 경우 호기심이야말로 그들의 본성이라 할만하다. 플레이어는 옛 노마이가 남긴 기록을 읽으며 우주를 더듬더듬 헤쳐나간다. 그제서야 우주란 것이 어렴풋하게 이해가 간다. 과학이라는 것이 그렇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면 멀리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어느샌가 플레이어는 자신도 모르게 과학을 하게 된다. 나는 잉걸불 쌍둥이의 고에너지 실험실에서 충격을 받았다. 벽에 있는 정체불명의 정팔면체를 집어넣자 블랙홀이 생겨났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물건같은데, 블랙홀이 있으면 화이트홀이 있어야 짝이 맞겠지. 한쌍이 생겨나자 무언가를 던져넣고 싶어지길래 탐사정을 던져넣어봤다. 블랙홀로 들어가서 화이트홀로 나왔다. 중력왜곡이 시각화된 게 신기하긴 해도 그리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스위치는 무슨 역할을 하지?

다른 스위치를 키고 탐사정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탐사정이 들어가기 전에 탐사정이 튀어나왔다. 기록을 보니 시간여행이 가능해진건가. 신기했다. 그리고 한발짝 늦게 깨달음이 뇌리에 번득였다.

시간여행이 가능한 최대 출력이 22분? 루프 한 번이 그쯤 하지 않던가?

이 시점에서 플레이어는 본능적으로 가설을 수립한다. 가설: 루프는 블랙홀을 이용한 재 쌍둥이 프로젝트에 의해 성립한다. 

즉시 가장 가까운 선인장으로 뛰어들어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타이머를 켜놓고 우주를 돌아다녔다. 태양은 22분에 초신성 폭발을 일으켰다. 업계용어로는 영가설을 기각한다, 전문용어로는 '내가 그랬제'쯤 되는 결과다.

과학을 통해 모르는 것을 밝혀낸 플레이어에게는 일반적인 성취감과는 다른 충족감이 찾아온다. 나는 이것을 알아냈다! 다른 것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플레이어는 애간장을 태우며 우주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저곳에는 어떻게 가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태양의 초신성 폭발은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는가?

그러나 어떤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태양 정거장의 기록을 읽고 곰곰히 생각했다. 정거장이 태양을 폭발시키지 못했다면 태양은 어째서 초신성이 되는가? 침입자가 항성의 폭발을 유도하나?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침입자가 태양과 먼 궤도에 있을 때도 태양은 폭발했다.

어쩌면 그 대답을 미리 알면서도 결론을 회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별들도 폭발하고 있지 않던가. 노마이가 우주의 모든 별을 폭파하고 있었을 리는 없다. 즉, 태양은 수명이 다 되어 초신성이 된 것이다.

우주는 죽어가고 있다. 그건 열역학의 문제다. 

열역학 제 2법칙도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타협의 여지는 없다.

결론적으로 나는 태양과 함께 죽는다. 얼마나 루프 속에서 발버둥치든 간에 다른 화로인과 함께 죽는다. 우주도 죽는다.


이 시점에서 나는 태양계의 모든 행성을 탐사했다. 태양 정거장을 여정의 종지부로 찍은 셈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둘러봤던 행성, 노마이 유적을 몇 번이고 다시 방문했다. 내가 알아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면서.

이 모든 여정, 이 모든 길이 그저 죽어버리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목재 화로에는 어린 화로인도 존재한다. 화로인의 문명은 음악을 연주하고 미지를 탐사하는, 솔직히 말해서 쓰레기같은 인류보다 배는 아름다운 문명이다. 이렇게 젊은 문명이 무의미하게 사라질 수는 없다.

마지막 지푸라기같은 희망은 우주의 눈이었다. 정녕 다른 곳이 남아있지 않다면 엔딩은 그곳에 있겠지. 노마이들이 그렇게나 애타게 찾던 천체. 우주의 자원고갈을 피해 유목하던 문명이니 분명 그곳에는 해답이 있을 것이다.

양자의 달에서 최후의 노마이 역시 만났다. 양자의 달과 우주의 눈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보였다. 유령물질이 태양계를 휩쓸어버렸을 때도 살아남았다니, 역시 해답은 우주의 눈에 있을 터였다.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재 쌍둥이 프로젝트에서 워프 코어를 빼냈다. 내가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었다. 정말로 우주의 미래가 내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22분이라는 카운트다운에 진저리치면서 함선을 몰았다. 검은 가시덤불에서 아귀들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눈이 질끈 감겼다. 우주가 죽으면 네놈들도 죽는 건 마찬가지란 말이다...라고 소리없이 비명을 지르면서.

어떻게 했는지 스스로도 모를 지경이지만 단번에 함선까지 도착했다. 컨트롤러로 우주의 눈이 있는 좌표를 입력하는 도중에 손가락이 자꾸 떨렸다. 간신히 워프를 가동했다.


우주의 눈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보다 평온한 장소,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 행성을 꿈꿔왔다.

그곳은 2.5G의 중력이 몸을 끌어내리고 섬뜩한 형상의 암석이 가득했다. 번개와 폭풍이 몰아치고, 어두웠다.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채로 무작정 걸었다.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이곳에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뛰어내렸다.


마지막 장소는 불이 꺼진 박물관이었다. 함께 루프를 시작했던 석상 아래에 글귀가 적혀있었다. 

노마이는 우주의 눈을 찾지 못했으나 그들의 유산덕에 어느 화로인이 마침내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박물관에 있는 전시품은 모두 죽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계속 나아갔다. 

어느 순간 박물관은 어두운 숲속으로 바뀌었다. 너무나도 어두웠다. 손에 들린 손전등은 숨을 다해가는 것마냥 깜빡이고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컴컴했다.

문득 작은 모닥불이 보였다. 처음에는 혼자였지만 어둠속을 더듬어서 동료 화로인 몇몇, 그리고 노마이 한 명과 만났다.

나는 그들과 대화하면서 결국 받아들였다.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모든 것은 끝난다는 것을.


이 여정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너무나도 부조리하지 않은가. 정말로 이대로 전부 끝나는건가.

세상은 그렇게나 부조리한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무관심한 세계다. 우리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세계에 내던져졌으며, 한줌 지식을 얻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나 별이 얼마나 많든 우주가 어두운 것처럼 그 몸부림은 헛되다. 결국 우리는 무지를 몰아낼 수 없으며 손에 쥔 지식조차도 언젠가는 무로 돌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내가 지키고 싶었던 만큼 아름다웠다.

행성 사이에서 쏟아지는 모래를, 목재 화로에서 뜨고 지는 태양을 보았다. 어린왕자가 소행성 B612호에서 그러던 것처럼 우주선을 몰고 몇번이고 해가 지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노마이와 화로인을 보며 경탄했다. 끊임없이 야생으로 나아가는 탐구심을, 농담과 연인의 대화를, 가장 가혹한 땅에 세운 도시를 보았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동안 합주가 시작됐다. 

모든 것이 끝났다.


실존적 허무라는 것은 지금이나 나중에나 결국 사람을 찾아오게 되어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세상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과학과 철학,(그리고 종교)은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만든 도구다. 그러나 궁극적인 답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설령 답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이 옳았는지 알지 못한다.

오로지 단 두가지 분명한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 모든 것은 끝난다.

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름답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