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싫으면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 왜 그 지경이 되도록 옆에 붙어서..."
여자를 괴롭혔냐는 말은 생략했다. '진드기처럼'이라는 수식어도.
"사랑했으니까."
노인은 눈을 끔뻑이며 대답하고 술을 목구멍으로 털어넣었다. 우문에 현답이로군.
"미루와 나는 만나는 순간 이미 고무줄의 양 끝을 서로의 허리에 비끄러맨 거야. 아무리 서로를 밀쳐내고 반대 방향으로 달려도 우린 연결되어 있었지. 고무줄의 장력이 버티는 한도 내에서는."
장력. 문득 미국으로 떠난 진희가 떠올랐다. 우리들의 장력은 어느정도였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랑은 어지간한 현실적 제약은 가뿐히 뛰어넘는 초능력을 발휘하지만, 현실에서는 번번이 후순위로 밀리며 깍두기 취급받기 일쑤였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공항 게이트 너머로 손을 흔들어주는 것뿐이었다. 포스트잇처럼 깔끔한 이별이었다. 이 년이라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청테이프의 그악스런 흔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카치테이프의 투명한 끈적임 정도는 남아도 좋았으련만.
나도 잔을 들어 술을 목구멍으로 털어넣었다. 노인이 내 잔과 자신의 잔을 차례로 채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겠나. 하루하루 이어붙여가기 급급한 날들을. 막연한 파멸의 예감이 목을 죄어오더군. 결국 내가 먼저 허리에 묶인 매듭을 풀어버린 거야.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총알처럼 날아가 그녀의 등짝을 후려칠 줄 알면서도."
-최제훈, <미루의 초상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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