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땅 위에 서 있는 분홍빛 토담은 달빛을 비추는 게 아니라 그 토담 내면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는 저 분홍빛 이상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멈추어 서서 이 순박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29살이었던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30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다 나는 그 세월을 가늠해 보았다 나는 1800 몇십 년에 있다고 마음먹으니 그 말의 의미는 단순한 상념에서 풀려나 문자 그대로 현실화되는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가 마치 죽은 사람인 것처럼 이 세상에 대한 추상적인 주시자로 느껴졌다 알지 못할 그러나 선명한 형이상학적인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내가 소위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왔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감각할 수 없는 영원이라는 단어의 묵시적이고 부재하는 의미를 포착한 게 아닌지 의심해 보았다 단지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 그 느낌을 이렇게 말해 본다 말하자면 이렇다 적막한 밤 문이 없는 작은 토담 원시림의 시골 냄새 토속적인 흙길 등 순박한 광경을 자아낸 그 모습은 단순히 몇십 년 전 그 모퉁이에 있었던 광경과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나 유사성을 뛰어넘어 그때와 똑같은 바로 그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 동질성에 착안한다면 시간이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서로 달라 보이는 어제라는 시간과 오늘이라는 시간 사이에 내재하는 무차별성과 불가분성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해체시키기에 충분하다
- 우리는 지금 29살의 그 당시 보르헤스가 현재라는 시간의 문을 열고 영원과 마주하여 형이상학적 공포를 느끼며 현상계 그 너머 주시자로서 감광된 인연들의 입자를 문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장면을 직접 확인해 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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