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화


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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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대한-나폴리 연합 해군과 한국 육군에 의해 점령되어, 현재는 나폴리의 강력한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리는 그 도시는 유럽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도시였다.


한국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위명을 익히 들어온 소수의 아랍 출신 군인들은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 땅에 입을 맞추며 자신들이 이룩한 이 위업을 찬양하였다. 반면 한국군의 대부분은 이 도시의 명성이나 위명에 대해서는 그다지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이 롬 카이셰리를 자칭한 자가 거하기에 걸맞는 웅장한 도시라는 것 외에는 아랍 출신 병사들의 감정에 별로 동의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앞으로 펼쳐질 더 많은 전투들을 예상했으며, 그 전투들에서 승리해야만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제가 한때 외적들의 공격에 수도를 버리고 파천하였다고 한들, 그것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는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파천함은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요,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였다한들, 그것이 제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오스만과 적대관계인 티무르에게 기회로 비쳐졌다. 그들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벌어진 한국군의 돌격전술에 오스만이 허망하게 수도를 잃어버린 사실에 주목하였다.


티무르는 이 전쟁이 오스만이 승천하는 기세를 무너뜨리고 그들의 위신을 땅바닥에 쳐박을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전쟁에 참가하였다. 이때는 아직 오스만군이 러시아에서 아나톨리아로 돌아오기 이전에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대한은 그들이 세운 전략의 첫 단추는 꿰어맞출 수 있었다. 허나, 오스만은 아직 죽은것이 아니었고 앞으로 계속 단추를 제대로 끼우지 못한다면 대한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군은 무엇보다도 먼저 오스만이 발칸 반도로 들어올 수 있는 가장 빠른 경로에 있는 요새들을 점령하여 그들의 회군을 차단하기로 하였다.


이는 아라비아의 공왕인 애신각라-윤진의 의사이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길목을 막아두지 않으면 오스만군이 만에 하나라도 아나톨리아를 지나 대한의 빈 땅을 공격하는 대신 발칸 반도로 돌아가 한국군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이 전쟁은 대한의 한계를 넘어선 원정이었고, 군사의 편제 역시 서양의 여러 국가에 비해 시대에 뒤쳐져 있었다. 더욱이 대한 기병의 주축을 이루는 만주의 팔기군과 몽골의 기병들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으므로 오스만군과 한국군의 정면 충돌은 그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군들의 참모들이 가장 부정적으로 판단하기에 오스만과 한국군이 모두 한 군데서 모여 거대한 회전을 벌인다면 한국군이 오스만 군에 비해 1.5에서 2배의 병력 차이에서 우세를 점하여야 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더욱이 대한은 병력의 질보다는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을 최대한 관리하여 모든 전선에서 적군보다 더 많은 병력을 운용할 것을 선택한 나라였다.


당연히 그러한 이점을 살리기 힘든 원정전에서 오스만에 비해 열세에 놓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작전 계획에서 정면승부는 전혀 권장될 만한 일이 아니었으며, 모든 부대에 가능한 오스만의 군대와의 충돌을 피할 것을 주문하였다.


아무리 많은 땅을 점령하였다고 한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대의 피해가 없다면 오스만은 어쩌면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에 빠질 수도 있으나, 대한의 동맹국 중에서는 근대 서양 국가인 나폴리와 덴마크가 있었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오스만 군 역시 불리한 상황에서의 배짱은 부리기 어려울 것이다.





1719년 7월. 오스만군이 결국 발칸으로 돌아오는 것을 포기하고 아나톨리아로 군사를 돌렸다. 당연히 아나톨리아에 견제용으로 대기시켜놓은 대한의 군사들은 밀려드는 오스만군에 의해 괴멸하였으며, 오스만군은 빠르게 그들의 본토를 수복하고 콘스탄티니예를 되찾으려고 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이미 자리잡고 있던 대한-나폴리 연합 해군은 또 한번 오스만 해군의 공세를 격퇴하였다. 이는 오스만의 군대가 콘스탄티니예를 되찾기 위해서 지나야 할 해협을 건널 수 없음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매우 협소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도저히 건널 수 없어 불신자들의 손아귀에서 되찾지 못하는 이스탄불을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재해권을 장악당해 갈망의 도시이자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을 수복하지 못하는 것을 원통해 하였다. 해협을 건너온 아시아의 세력이 갈망의 도시를 성벽을 무너뜨릴 만한 대포를 동원하여 어느 누구도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그 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전황을 보고 받은 유럽의 여러 지식인들은 이것에서 제 20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향수를 느꼈다.


허나, 지금의 전쟁은 도시 하나만을 가지고 부질없는 저항을 반복하던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그 갈망의 도시는 대한에게 그저 중요 요충지와 오스만의 수도였다는 것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오스만의 롬 카이셰리가 갈망의 도시에 목을 걸고 결사항전하지 않고 파천한 지금 대한에게 있어서 일종의 천명 전쟁으로 변모한 다음었다.





대한이 오스만이 발칸 반도로 돌아오는 가장 빠른 길을 틀어막는 동안 나폴리-덴마크의 육군은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오스만의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다. 나폴리에서 들어오는 군대는 발칸의 기독교인들의 구원자를 자처하며 차례차례 발칸반도를 점령하여갔다.


물론 지금 오스만을 잠깐 위압할 수는 있을 지언정, 발칸의 해방을 강요할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국가는 없었고 대한에는 명분이 없었다. 더욱이 한국군은 오스만군과 정면 대결을 했다가는 필시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오스만에게 발칸의 해방을 요구할 정도의 큰 승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나폴리의 군대를 해방자로 판단하고 환영하고 있는 저 불쌍한 민중들에게는 안타까운 이야기였지만, 그들은 적어도 100년 이상은 다시 오스만의 지배 하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조금 돌아가서, 전황 자체는 대한의 동맹국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스만의 군대는 절반 이상이 아나톨리아에 발이 묶여 멍하니 발칸반도에서의 전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한에 대해 경쟁의식을 불태우는 러시아는 꺼려지기는 해도 오스만에게 군사 통행권을 제공할 터였지만, 바로 코앞에 바로 갈 수 있는 길을 내버려두고 흑해를 빙 돌아 발칸으로 가겠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더욱이 구식 체제와 신식 체제를 적당히 변용하고 있어 집단적 전투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대한을 대신하여 유럽의 훌륭한 군대들이 오스만의 발목을 잡으려 기꺼이 뛰어들고 있었으니, 병력의 분산운용은 오스만이 쉽게 택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한편 인도의 상황은 따로 살펴볼 필요가 없을 정도였는데, 인도의 소국들은 별 다른 수를 써 보지도 못하고 한국군이 그들의 국경을 넘어 국토를 유린하는 것을 용인하였다.
아직 국가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는 자운푸르 정도만이 한국군의 전면 공세를 피하여 한국군의 배후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이미 인도의 대부분이 대한에 넘어온 상황인 지금, 그들의 발악은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


인도 전선은 갑작스러운 대지진이나 운석 충돌 같은 재앙이 없다면 대한의 완전승리로 끝나게 될 것이다.






1720년 5월. 발칸은 완전히 해방되었다. 비록 오스만의 군대가 동맹인 보헤미아의 길을 빌어 러시아를 통해 발칸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미 전력비가 압도적으로 차이나는 지금 그들이 함부로 움직인다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였다.


당장 이곳에 있는 한국군의 수를 합하면 발칸에 들어와 있는 오스만의 3배가 넘고, 거기에 나폴리와 덴마크의 군대의 힘까지 합한다면 오스만에 불세출의 명장이 있다고 해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한국군은 발칸에 발을 내딛은 오스만의 군대와 전투하여 오스만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다.


이는 지금 오스만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하여도 한국군이 입을 피해를 가늠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때문에 한국군은 발칸에 진입한 오스만군의 처리를 동맹국에게 맡겨놓고 아나톨리아를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발칸에 들어와 있는 오스만의 군대는 덴마크와 나폴리의 군대가 힘을 합하면 충분히 상대 가능한 수준이었으므로 한국군은 발칸 반도에서 아나톨리아로 다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아무리 오스만이 강대하다고하나 본토라고 할 수 있는 발칸과 아나톨리아가 모두 불타버릴 위협에 처한다면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얻을 수 없더라도 휴전에 동의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국군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한 다음이었기에 마치 제 집을 거닐듯이 아나톨리아로 돌아갈 수 있었고, 보스포루스 해협의 탈환을 포기하고 나폴리의 추가 선단 지원을 막기 위해 해군을 뺀 오스만의 군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스만이 아나톨리아에서 발칸으로 가기위해서는 흑해를 돌아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대한은 오스만에 대해 매우 큰 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문제가 있었는데 한국군은 오스만 군의 동향을 완전히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스만이 아나톨리아에 발묶여 있는 틈을 타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다시 아나톨리아로 복귀시키고 압도적인 수적 우세로 오스만의 전의를 꺽고자 했다. 허나 그때는 이미 오스만이 발칸을 탈환을 위해 많은 부대를 흑해를 돌아야 하는 여정을 감수하고 발칸으로 출발시킨 다음이었다.


처음 보였던 5만의 오스만군이었다면 나폴리와 덴마크군으로서도 희망이 있었겠으나, 오스만의 추가 증원이 들어온다면 그들은 발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허나, 대한과 나폴리 덴마크는 오스만의 군대의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고, 그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주력을 돌렸다. 이제 전쟁은 누가 먼저 전쟁을 포기할 지에 달려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영토를 두고 침공당한 오스만은 말할 것도 없고, 공세의 입장인 대한이라고 해서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고 몸이 성할 리는 없었다. 이제 인도와 아랍에 걸쳐 대한의 주도적인 통제를 거부할 정도의 크기를 가진 세력은 이제 없었으나, 전쟁의 패배는 국내의 정치의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다. 더욱이 동아시아가 거의 평정되었고,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도 없어서 제대로 영향력을 투사하지도 못하는 지금 대한은 저 멀리에서 벌어진 전쟁의 패전으로 위협을 느끼기 보다는 이것으로 어떻게 정적을 쳐낼지에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은 한번 벌어지기 시작하면 멈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부패가 심화된 대한의 상황에 정치권에서의 혼란까지 더해진다면 정말로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지도 몰랐다.




한국군은 그대로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하여 앙카라를 정복하였다. 이 앙카라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요새가 설치되어 있는 지역으로서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서 한국군은 차후 커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아나톨리아 반도에 여전히 머물러 있더 오스만군은 한국군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주했다는 사실에 한국군을 포위하기 위해서 기동했다. 애초에 병력의 수가 많지 않았던 아나톨리아 까지 내려갔던 동맹군은 오스만의 위세에 감히 범접치 못하고 물러날 수 밖에는 없었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남아있는 오스만의 군세 보다는 한국군이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정작 전면으로 맞붙었을 겨우에는 어떻게 될 지 감히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한국군은 그들이 분산되어 있는 틈을 노리기로 했다. 18세기는 아직 군대의 보급이 원할하고 수월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시기였다. 이는 원정작전 중인 한국군에게 더욱 뼈아프게 다가올 사실이지만, 오스만이라고 해서 그 사실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만주의 공왕이자 대한 황실에 합체된 애신각라의 윤진의 허가 아래 한국군은 엄청난 규모의 비전투 손실이 발생할 지라도 아나톨리아반도에서의 작전 중에서는 언제나 한 자리에 뭉쳐서 그들에게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는 꽤 유효한 작전으로 자리매김했는데, 오스만군이 아직 떨어져 있는 동안 한국군은 한 자리에 엄청난 전력을 집중하여 주변에서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오스만의 군대를 가지치기 해 버렸고, 안 그래도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 동시에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오스만의 입장 상 한국군이 주도하는 이 집단전에서 도저히 승산을 찾기 어려웠다.





허나, 아무리 한국군이 집단전으로 오스만의 군대에게 승기를 가져간다고 해도, 오스만의 군대는 그 크기가 남아있었기에 적의 군단을 완전히 해체해버리는 식의 선전은 거두지 못하였다.


일단 한국군의 주요 작전 지역인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에서 오스만의 군대를 철수시킨 것으로 한국군은 원활한 작전을 진행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한국군이 발칸 반도에서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승기를 잡은 오스만의 군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철수하는 오스만의 군대에 의해 함락된 앙가라를 재정복하는 동안 오스만의 군대는 그들의 위대한 도시이자 수도인 이스탄불을 되찾으려 들었고, 한국군은 앙카라만 탈환하고 그대로 북상하여 오스만의 군대를 요격하고자 하였다.





허나, 이미 전쟁은 너무 오래 지속되었기에 한국군이고 오스만이고 더 이상의 전쟁을 유지할 정도의 힘이 떨어져 버렸다. 정확히는 양국 모두 전쟁을 더 하려면 할 수는 있었겠으나, 그랬다가는 양 국가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경쟁국이 지쳐 나가 떨어진 두 국가를 집어삼키고 최종 승리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얀 카칸이자 유럽인을 사칭하는 스키타이 유목민이자 발칙하게도 제 3의 로마를 자칭하는 러시아 유목민 집단이 말이다. 한국군은 지금까지 대한이 점령한 지역들을 토대로 오스만에게 휴전을 요청하였고, 오스만의 군대는 휴전 협상장에 나타났다. 이 휴전 협상장에서는 한국 보다는 나폴리와 덴마크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유럽과 오스만의 정세에 훤하지 않았던 한국이 그들에게 자신들의 영향력을 양보하는 대가로 이 휴전을 유리하게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었다.


나폴리와 덴마크는 그들의 국력 수준으로는 오스만에게서 땅이나 이권을 빼앗아봤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힘으로 다시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선택한 것은 대한과의 공동통치 아래 콘스탄티노플을 얻어오는 것이었다. 이는 오스만에게 매우 충격적이고 모욕적이며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지만, 바로 얼마 전에 러시아와 대규모 무력 충돌을 겪은 이후, 지금은 대한이 휴전 조약서에 오스만이 보헤미아와의 동맹을 파기할 것을 명시한 조약을 집어넣고, 보헤미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서 오랜 혈맹의 배신을 알게 된 오스만이 휴전에 너무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지금은 내륙에 멀리 떨어진 한국군과 보잘 것 없는 나폴리와 덴마크의 군대가 있을 뿐이지만, 조금 더 전쟁이 지속된다면 오스만의 땅을 노리고 배신자들과 로마 참칭자들이 땅을 뜯어내기 위해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이로서 오스만의 오랜 지배에 놓여있던 콘스탄티니예는 대한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지중해에서 대한보다는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는 나폴리와의 공동 통치로서 지배되게 될 것이며,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갈망의 도시의 탈환을 진정으로 기뻐하였다.


또한 대한-나폴리 연합군의 대해전 승리로 오스만의 해군의 기세가 잠시 꺾이면서 당분간은 유럽의 해군들인 지중해 깊은 곳 까지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대한이 점령한 예루살렘으로의 순례자들의 기독교 순례자들의 수가 많아짐을 의미하였으니 대한은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이다.


다만, 유럽의 기독교 순례자들은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이슬람 사원을 불태울 것을 요청하였지만, 갈망의 도시를 동시통치중이며 예루살렘의 정당한 정복자인 대한은 그들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애신각라 윤진은 오스만의 땅에서 돌아오는 한국군을 그대로 중앙 정부에 돌려주는 대신 대한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틈타 독립을 선언한 아덴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인의를 져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그들이 종교를 계속해서 믿는 것을 허용하고 불필요한 탄압을 가하지 않았던 대한에 대한 배신자들이었다. 이들이 존재하며 여전히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한의 지배권을 흔들리게 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아덴은 감히 이러한 상황에서 이익을 취하려는 다우시르의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한국군은 망설이지 않고 아덴의 국경을 넘고자 하였다. 다우시르는 티무르와 오스만 양국과 동맹을 맺고 있지만, 그들이 먼저 탐욕적인 이유로 전쟁사유를 제공하였고, 한국의 목표가 그들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으므로, 티무르와 오스만이 다우시르를 구원하기 위해 참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대한의 아라비아 통치에 문제가 생기면서 대한의 본토인 만주-반도에서는 커피 수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커피는 씁쓸한 맛과 달콤한 향기가 어우러진 최상의 기호품이었다. 이는 교황이 이슬람의 작물임에도 불구하고 축성을 내려 커피를 계속 마실 것을 주장한 일화로도 그 기호품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의 선비들 역시 커피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세종 이후 오랜 상업 지향적인 방향으로 조정이 국가의 진행 방향을 강제하고, 유학자들이 그것에 적응해간 지금, 기호품의 사용 정도는 일상적인 일에 불과해졌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며 공매의 도에 대해 논하였으며, 공화주의의 기치를 높게 들었고, 사회주의에 대해 토론하였고, 노동자들과 같이 전당대회를 주최하였다. 특히 노동자들과 같이 전당대회를 주최하는 조선 공산당의 경우에는 커피의 수요량이 다른 세력들에 비해 월등히 많았고, 이 커피 수급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안정을 요구하였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적어도 이 전쟁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은 기본적으로 모든 전선에서 압도적인 수를 투입할 수 있는 한국군에게 승기가 기울었지만, 그리 유리하다고는 하기 힘들었다. 이는 오스만과의 전쟁 이후 쉴 틈도 없이 연전에 들어가 병사들이 지쳐 있는 것도 한 몫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구시대적인 편제와 동시에 기병들의 주축인 만주인들과 몽골인들이 유목민적 감각을 많이 상실하면서 약체화된 것도 한몫할 것이다.


한국군은 다른 유럽의 다른 국가들 보다 기병의 규모가 컸는데, 그 만큼 보병의 수는 줄어들고 기병이 약체화 되었으니 전체적인 군대의 힘이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황제의 적자인 이선이 사냥중의 사고로 죽었다. 황태자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황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근위대와 사냥에 따라간 이들에 대한 문책이 잇달았다.


이임해는 황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고뇌하는 표정으로 이 일은 그저 사고에 불과하니 불필요한 논쟁으로 자신의 마음과 조정과 의회를 어지럽히지 말 것을 요청하였고, 사건은 근위대 몇 명을 직무 태만에 관련된 죄로서 다스리는 것으로 끝내게 되었다.


조정과 의회는 황제가 이 충격으로 손에서 일을 놓아버리지는 않을까 염려하였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임해는 다음날 매우 어두워보이는 표정을 하기는 했지면 정상적으로 그의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이 전쟁으로 대한은 다우시르로부터 그들의 해안가 지방의 땅을 얻어내고 대한의 해안가에 접하여 국경의 안전을 위협하는 땅들을 추가로 뜯어내었다.
그들은 이로서 함부로 주변 국가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다우시르마저 떠나간 지금 아덴이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모든 국토를 점령당하고 항복하였으며, 감히 대한이 가장 어려운 시기 독립을 선언하면서 뒤통수를 친 사악한 역도들은 그자리에서 잡혀 버렸다.


왕당파는 이들을 과거 경국대전과 중원의 법도에 따라 삼족을 멸할 것을 청하였고, 공화당과 사회당은 현재의 법률에 따라 그들 본인과 그들의 가장 주요한 협력자들에게 참수형을, 그 밑으로 현재의 법에 의거한 처벌을 요청하였다.


공산당은 이 사악한 자들은 민중의 손으로서 처단하여야 한다면서 그들을 민중들이 보는 앞에 비무장으로 세워두고 민중들에게 돌을 쥐어주고 그들에게 처벌을 맡겨야 할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는 말이 민중들에게 처벌을 맡긴다는 것이지, 전쟁으로 고통받았을 민중들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히 하늘에 있는 사람을 돌로 쳐죽일 기회를 굳이 차 버릴 이유가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결말이 정해져 있는 인민재판이었다.


이임해는 공화당과 사회당의 안을 채택하였으며, 조정에서 내려온 교서를 받아든 애신각라 윤진은 조정에서 요구한 그대로를 행하였다. 덤으로 반란에 참여한 이들의 재산을 압류함으로서 그들을 거리에 내몰았는데, 이는 사실상 거리에 무방비하게 내쫓긴 셈이므로 몇몇은 공산당이 원하는 그대로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자신도 만주인의 피가 흐르는 윤진이었지만, 대한의 기병의 약체화는 더 이상 두고 보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그 존재 자체로서 보병과 포병이 더 늘어나지 못하게 막는 역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장에서 보포가 줄어든 만큼의 역활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전쟁이 끝나고 뒷정리도 마무리된 시점에서 조정에 장계를 보내 일부 팔기군을 해체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고, 조정에서 그를 윤허하면서 승전 행사가 벌어지는 그 자리에서 팔기군 몇 개 연대가 그대로 군사의 직업을 잃게 되었다.


많은 팔기군들이 반발하였으나, 팔기군에게 있어 대한의 조정보다 더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애신각라로부터 내려온 명령이었기에, 그들의 반발은 무력으로 까지 진행되지 못했다.


이곳의 애신각라 윤진은 실제 역사의 같은 이름을 지닌 자와는 전혀 다른 인물일 수 밖에 없다. 만주족은 중원으로 입관하지 못하고 천명을 쟁탈한 대한의 황가에 종속된 형태로 성장하였으므로 그들의 핏줄에는 중원의 피 대신 한반도의 피가 흐르게 되었는데, 이후 태어날 이들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윤진이 이룬 업적은 그가 쥐고 있던 패들을 생각해 보자면 같은 이름을 지닌 이에 비해 그렇게까지 밀린다고 할 수 없었고, 그러한 이가 팔기군의 끝을 고하였다는 것이 그저 아이러니 할 뿐이었다.


조정에서는 이제부터 앞으로 문제점이 들어난 군제의 개혁을 하기 위해 엄청난 논쟁이 잇다를 것이다.





사보이에서의 혁명은 유럽에서의 여러 국가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만, 대한에게는 그리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더 이상 국가를 올바르게 이끌어 나가지 못함에 분노한 민중들이 역천을 시도하여 성공하였고, 그들이 왕위에 오르는 대신 공화주의를 새로운 천명으로서 인정하였다는 것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기에는 역천의 반란이 성공하였는데 기존의 황조가 그대로 살아남는다는 것도 그저 웃긴 이야기에 불과했고 말이다. 때문에 대한은 혁명으로 완전히 뒤집혀진 사보이를 경계하면서도 그들의 민중이 지중해에 나오는 것을 딱히 견제하지는 않았고, 그 덕에 사보이와 대한은 그렇게까지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게 되었다.


조금 돌아가서 대한의 의회에서 진정으로 황실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공화파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왕당파야 말 할 것도 없었고, 사회당과 공산당은 공화당의 사회 개혁에 대한 미적지근함에 분노하여 탈당하여 새로운 세력을 형성한 이들이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이 유교적 관점에서의 민중의 복지라는 점에서 공화주의자들 보다는 유학자들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국가가 마땅히 민중의 삶을 보살펴야 하고, 민중들의 삶이 도탄에 빠진다면 마땅히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조정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어떻게 공화주의자들이며 상인세력이란 말일까. 때문에 처음 과격파들이 공화당에서 분리되어 나가 구 체제 그 모든 것에 적의를 불태웠던 초기의 인물들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그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채운 새로운 피는 초창기 사회당의 여러 사람들이 품었던 열의는 사라졌고 그저 민중의 복지와 함께 공화주의자적인 입장에서 의회가 바로서기를 바랄 뿐이었다.


조선 공산당은 처음부터 노동자들의 혁명으로 노동자들의 낙원을 건설하자는 이야기가 빠져있었다는 것에서부터 유럽에서 나타날 그 공산당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들과 농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사회당보다 훨씬더 과격하고 급진적인 방법을 주장하고 있지만,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사회당과 그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의회만 제대로 돌아가 준다면 딱히 황제가 도장을 찍는 인물로만 남든 아니면 세속 권력을 어느 정도는 장악하고 있던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한의 땅에서 진정으로 공화주의를 증명하고자 하며 또한 황제가 도장찍는 역활을 가지는 것도 거부하며 황실이 진정으로 정치에서 물러나 주었으며 바라는 것은 공화당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러한 생각은 소수파가 될 수 밖에 없기에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식견있는 자들은 공화주의자들이 입헌군주국 그 너머에 있는 뭔가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는 있었다.


덤으로 폴란드는 어디까지나 흑해의 항국를 빌리기 위해 잠깐 동맹을 맺은 것에 불과함으로 대한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와의 동맹을 파기하였으며, 그 덕이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동유럽에 진출하고자 전쟁을 일으킨 것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